훗날 지금을 기억한다면

신 영 애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하는 말들을 마음에 담고 듣는 이가 있다. 그것은 아마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간절함이나 절실함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그랬다. 항상 계획 없이 훌쩍 떠나는 여행을 꿈꾸던 나였다. 그날도 ‘여행 가고 싶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은 반짝였고, 그 마음이 간절하게 다가왔다. 늘 뭔가 한 발짝 늦는 듯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어쩌면 느닷없이, 어쩌면 계획했었던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것도 큰 딸아이와 둘이. 그날부터 일상의 공기는 깃털처럼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다가가 손을 잡고 자랑하고 싶었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드디어 내가 여행을 간다고, 어쩌면 내 인생의 최고의 여행일 것 같다고. 늘 남의 이야기 같았던 여행이었기에 계획만 잔뜩 늘어놓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는데, 이제 그 열망의 보따리를 풀어 헤치기만 하면 되었다.

   비행기 예약을 하고, 여권을 신청하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준비 과정이 나에게는 생일파티를 앞둔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 사진관에 들렀을 때는 너무 환하게 웃어 표정 관리를 여러 번 수정해야 했다. 또한, 여행하기 하루 전에는 엄청 추운 날씨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인 채로 PCR 음성확인서를 받기 위해 검사를 받으러 가면서, 다음날 무사히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짝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떠나는 여행처럼 나는 설레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큰아이의 방을 볼 때마다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5일 동안 함께 있을 수 있다니. 아이는 편하게 갈 수 있는 패키지여행을 마다하고, 스스로 계획한 여행 계획서를 내밀면서 나를 한껏 기대에 부풀게 했다. 엔화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짐은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그곳 날씨는 어떠한지, 수시로 내게 알려주고 확인했다.

   이국의 거리를 거닐면서, 이색적인 문화와 초겨울 날씨 같은 공기가 여행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았다. 우리는 아침 9시 전에 출발해서 밤늦게 호텔에 돌아올 때까지 밤낮으로 인파가 몰린 그 초행길을 즐기기에 바빴다. 크리스마스 계절답게 휘황찬란한 조명과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소음들. 그 속에서 갖는 우리만의 시간은 그냥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부족할 뿐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그 어떤 대화보다 의미 있는 말을 많이 했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늘 낙지처럼 흐느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던 우리는, 숙제하듯이 코스를 밟는 여행이 아닌 순전히 우리들만의 시간 속에서 오롯이 즐기며 보냈다. 편리하게 영어로(혹은 한국어로도) 표기되어 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거나, 한두 정거장 정도는 걸어 다녔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여행지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맛집을 만나고 거기에서 박장대소를 하며 우리의 삶을 충전시켰다. 서두르지 않고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고, 결국 우리가 원했던 것은 마음의 여유를 찾는 시간이었는데, 우리는 잘 해냈다.

   혹시 아이가 계획한 대로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걸음 속도를 잘 따라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이 아이의 섬세한 마음이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저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곳저곳 볼 것 많고, 즐길 것도 많아서 밥 먹는 시간조차 아껴가면서 즐겼다.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2시간가량 기다리던 중이었다. 서서히 발바닥은 불이 난 듯이 아프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해 아이한테 몇 마디 투덜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재미있게 놀이기구를 타고 나오자 아이가 두리번거리면서 자리를 하나 마련하더니, 자신은 기념품 가게에 갔다 올 테니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했다. 여행지에 가는 곳마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샀기에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빨갛고 예쁜 폭신한 슬리퍼가 들려있었다. “엄마, 신발 벗어봐. 그리고 이거 신어 봐.” 한다. “이거 사러 갔다 온 거야?” 묻는 내게 발이 편해야 한다면서 슬리퍼를 신겨주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싸웠던 순간들이나, 상장을 받고 휘날리며 내게 뛰어오는 아이를 반기며 안아주었던 그런 감정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나는 보호자였는데, 아이가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편안하고 아늑하며 한없이 너그러운 느낌이라니.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기뻐도 눈물이 나올 수가 있다니.

   고작 5일 동안의 여행이었는데, 고단한 현실을 위로하면서 천금 같은 휴식이 되었고, 따뜻한 위로를남겼다. 때로 여행은 돌아온 후에도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겨준다. 은은한 향수처럼 내 주위를 맴돌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혼자 헤죽헤죽 웃게도 만든다. 천년만년, 이 감정이 그대로 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좋은가. 온전히 우리의 선택으로 보냈던 여행길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 신뢰감이 충만해졌으니.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흔하디흔한 여행일 수도 있겠지만, 바쁜 일상에서 허덕이며, 늘 ‘다음에’만 외쳤던 나에게 설렘과 떨림 그 자체로 출발한 이번 여행은, 추운 날 얼음 낀 논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의 발그레 한 볼처럼 감출 수 없는 행복이었다. 훗날, 지금을 기억한다면 내 삶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날들이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날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해맑게 웃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내 나이쯤 된 아이가 그날을 떠올리며 뚫어지게 내 사진을 보고 또 보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런 게 행복 아닐까. 새삼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저녁이다. (20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