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력감

신 영 애

    지난해 초, 신입사원 K가 입사했다. K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니 경력 사항은 없었다. 자격증 란을 보니 세무회계에 충분히 관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근무하는 업종은 열악한 근무환경과 낮은 임금으로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자리는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1년에 절반은 야근하고, 3년 경력까지의 급여는 타 업종에 비하면 품위유지도 겨우 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입사할 때의 열정은 금방 식어버리고 이직률은 높다. 더구나 세월은 변했어도 을의 위치는 여전하고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이다. 출근 첫날 점심을 먹으면서 K는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였다. 학생 시절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고,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자신에게 냉정한 사회를 보았다고 했다. 이력서를 제출하여도 면접 보자고 하는 곳도 드물었는데, 면접 보고 나서 합격했다는 곳은 더 없었다면서 자신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 것 같아 허탈함과 절망스러움에 견디기가 힘들었다고 하였다. 나의 20대 시절이 생각났다.

    회계사 시험을 보겠다고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둘 때만 해도 희망이 있었다. 여직원은 결혼하게 되면 다니던 회사를 아무런 이유 없이 그만두어야하는 당시의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격증을 갖게 된다면 내가 일을 하고 싶은 한 계속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하자 내 가치가 낮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겨우 이 정도인가 자조적인 생각만 들었고 거듭되는 실패로 인한 무력감은 내 젊음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디라도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취직을 하여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끔 그때 계속 공부를 하였더라면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온 나의 시간이 후회스러운 것은 아니다.

    세금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늘 긴장의 연속이다. 자주 바뀌는 법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고, 세금에 대하여 상담을 하면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50대 후반으로 가고 있는 내가 아직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경력이 쌓일수록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기 만족도도 높다는 게 가장 크다. K는 적극적이었다. 뭐든 먼저 하려고 일어났고, 질문도 많았다. 내가 늦깎이로 처음 이 일을 시작하던 때가 생각났다. 설명을 들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은데 돌아서고 나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던 시절이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한다는 게 바보 같았고, 선배들을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밤늦게까지 남아서 메모해 놓은 자료를 보면서 공부하고 찾아보고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만약 사수의 위치에 있게 된다면 후배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가르쳐주리라 생각했다. K는 내가 설명을 해 주면 잘 따라와 주었고,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K가 잘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퇴사하고 싶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과 전화하는 것도 두렵고 해마다 바뀌는 세법도 적응하기 힘들다는 거였다. 몇 번씩 나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고 내가 설명해주어도 돌아서고 나면 잊어버리는 자신이 바보 같다고 했다. 처음 3년 정도는 누구나 다 그렇다고 얘기를 해도 소용없었다. 내가 혹시 바보는 아닌가? 나는 구제 불능인가? 하는 생각이 수시 때때로 든다는 것이었다. 결국 K는 그만두었다.

    셀리그만이라는 심리학자는 이런 경우를 ‘학습된 무력감’이라고 하였다. 이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경험을 겪고 나면 후에 같은 경험에 대처하려는 동기가 감소하여, 자극을 회피하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학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현재 처한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나를 향상할 수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안 돼, 할 수 없어 등의 무력감이 학습되어 자신의 능력과 미래까지도 그렇게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일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래처 사람들의 상담 전화를 두려워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주춤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 것은 아닌지. 설명을 듣다가 조금 어렵다고 느끼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습관. 그렇게 되다 보니 계속 모르게 되고, 모르는 것이 쌓이니까 또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원래 잘해, 나는 못 해, 나는 안돼 하면서 스스로 날아보려고 생각하지 않는 미운 오리 새끼가 사실은 백조였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간과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나는 이 땅의 모든 K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삶의 긴 여정속에서 우리는 때로 원하지 않은 걸림돌을 만나 넘어지거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통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인생의 길에는 정답이 없다. 조금 돌아간다고 생각해도 결코 늦지 않고 어쩌면 그런 과정은 누구나 다 겪을 수 있고 또 한 겪어왔을지도 모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잘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지레 겁먹고 기죽지마라고 말해 주고 싶다. 아직 시간은 많고, 삶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력해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나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손을 내밀어 함께 가자고 응원하고 싶다. 이 땅의 모든 K가 아름답게 날아오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