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그 순간에

신 영 애

 
   시작과 끝이 일어나는 공존의 시각.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면서 동시에 새해를 맞이하는 시각. 그 시각에 깨어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한 번쯤 말도 해 보련만, 코로나 19 상황이 어디로 떠나려고 해도, 무엇을 하려고 해도 발목을 잡는다. 지난주 뮤지컬을 보러 가면서 선배 언니한테 새해 해맞이 가자고 한마디 던진 게 정말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 연일 영하의 기온에 바람까지 불고 있는 날씨였지만 호기롭게 가자고 큰소리를 쳐버렸다. 살아오면서 새해맞이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늘 새해를 맞으러 가는 차량 행렬에 끼어 지친 나머지 마음으로만 엉성하게 떠오르는 해를 보거나, 전날부터 미리 도착해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다가 새벽 일찍 해맞이하자고 해놓고 해가 떠오르기 한 두 시간 전에 살짝 잠이 들어버리던가, 늦잠을 자서 정작 아침 해돋이 시간을 놓쳐 이미 한참이나 떠오른 새해를 보며 그저 한해의 행복과 건강을 의무적으로 중얼거렸었다. 언젠가는 한번 제대로 신년 해맞이를 하고 싶었다. 12월 31일 종무식을 하고 일찍 귀가하여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들떠서 배낭을 꺼내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가는 거니까. 짐 규모만 보면 며칠 여행을 떠나는 사람 같다. 남편은 날도 추운데 뭣 하러 사서 고생을 하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가자고 부추겼으니 추워도 반드시 가야 했다.

   새벽 알람 소리가 미처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고 종이컵과 커피, 그리고 약간의 간식을 주섬주섬 챙겨 담았다. 남편이 데려다준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하였다. 1월 1일 아침 6시 30분.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 앞에는 아차산에서 신년해맞이를 하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하는 산행이라 나는 신이 났고 날씨의 추운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해돋이를 볼 생각에 기분은 한껏 들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겹겹이 옷을 든든하게 껴입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차에서 내리자마자 온몸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어묵 하나씩 집어 들었다. 어묵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온몸으로 뜨거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곧이어 일행들이 모두 도착했다. 코스는 광나루역-생태공원-고구려 정-낙타고개-해맞이광장-광나루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출발 시간이 되었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평소와 뭔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아쉬움과 후회를 떨쳐버리고, 나를 돌아보는 어떤 구실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둑어둑한 길을 갔다.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누가 보면 군중 집회라도 나가는 모양새다. 아빠 등에 업혀 올라온 어린 아기, 주인 따라 올라온 강아지,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몸으로 오른 아저씨, 손을 꼭 잡은 연인들, 그리고 가족이 함께한 듯한 모습까지.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 속에 휩쓸려 올라가다 보니 마치 초행길임에도 늘 다니던 길처럼 익숙하게 올라갔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더니, 어둠이 가득한 캄캄한 등산로를 후레쉬도 없이 간간이 켜진 가로등에 의지하면서 누가 길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저절로 떠밀리듯이 정상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새벽기온은 입김으로 눈썹과 모자에 서리를 맺히게 할 정도였지만 중간 즈음 오르자 등에 땀이 흐르고 후끈한 열기로 어느새 추위는 가시고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힘들어 죽겠다고 투덜거렸을 경사 길도 어렵지 않게 오르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동안 꾸준히 만 보 걷기를 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옷을 벗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미 앞서 산에 오른 사람들은 저마다 웃고 떠들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자리를 잡고 앉거나 서 있었다. 해맞이 광장 정상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더 오를 수가 없어 중간 즈음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서울의 새해 새벽은 푸르스름과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고, 고요함이 내려앉아 새해를 맞이하기 전의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7시 40분이 넘으면서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서로 카메라를 켠 채 주위의 사람들과 덕담을 나누고 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새해를 맞이하려는 마음이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게 따뜻한 응원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새해 소망이 얼마나 간절하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7시 45분이 지나면서 1분 1초의 순간순간이 손에 땀을 쥐게까지 했다. 모두가 고개를 힘껏 내밀고 언제나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더디게만 갔던 그 몇 분의 시간, 태양이 떠오르기 바로 전의 그 침묵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손목시계가 46분에서 47분으로 넘어가려는 시각,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군가가 “해가 떠오른다~.” 하고 외쳤다. 순간 모두의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 붉은 태양은 힘차게 떠올랐다. 마치 뜨거운 활화산에서 용암이 솟구치듯이. 온몸을 불태우듯 발갛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그 모습에 눈이 부셔오고 가히 장관이었다.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경이로움. 감격스럽고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어제의 그 해가 아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을 담아 보냈다. 부디 저들의 간절한 기원을 들어주시기를.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새벽 추위에 떨며 올랐던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고 충분한 보상이 된듯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고 주위의 어둠이 가시는 시간까지도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주위의 산등성이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선물이라고 했던 전혜린 시인의 글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일어났다.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