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cing in the rain

신영애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고 일기예보도 비 소식뿐이다. 더위가 없어서 다행이다 싶지만, 극한의 무더위를 겪고 있는 유럽을 보고 있노라니 이 비를 적당히 나누어 그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다. 모처럼 멋을 내어 구두를 신고 출근했는데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비 오는 날, 특히 비가 내리는 모습을 요즘 말로 비 멍(비가 내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하듯이 쳐다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때로 장화라도 신고 철벅거리며 걸어 다니고 싶다. 뉴스에서 학생인 듯한 친구 둘이 어깨동무를 한 채 비를 맞으면서 스케이트 타듯이 서로를 밀면서 가는 모습을 보니 문득 오래전 그날이 생각난다.

   대부분 업무가 전산화가 된 지금도 상반기는 바쁜데, 손으로 직접 입력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업무를 보던 그 시절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야근은 당연하고, 심지어 집이 먼 곳에 있는 직원들은 밤새워 일하던 때였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안부를 물어보거나 살펴볼 겨를이 없을 만큼 바쁜 매일이었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고,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다.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은 경력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절대적으로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사소한 문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날을 세웠다. 곧 신고 마감일이 임박했는데도 진도가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 누구라도 좀 도와주었으면 했다. 제한된 시간에 해야 하는 일이기에 계산해줄 사람이 있다면 시간이 단축되고, 업무 처리가 빨리 될 것 같아서 대표님께 말씀드렸더니, 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마침 방학이라 집에 있는데 오라고 해야겠다는 것이다. 잘 되었다 싶어서 친구들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젊은 친구들은 오자마자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듣더니 바로 자신들의 노트북을 열고 일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의 퇴근이 반복되었고, 그날따라 컴퓨터마저 말썽을 부려 업무가 마비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퇴근해야 했고, 내일은 더 늦은 시각까지 야근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은 초조해졌다. 며칠 동안 계속 내리는 비로 곳곳에 크고 작은 물이 고여 있었다. 피곤한 마음에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학생 두 명이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사무실에서 내가 맡은 직책이 있다 보니 다들 나를 어려워하겠다고 생각했고, 특히 그날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업무에 스스로 자책하며 우울해하고 있던 터였다. 어색한 침묵 속에 걷던 중, 한 학생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학생에서 물웅덩이의 물을 튕겼다. 그러자 둘은 서로 질세라 물웅덩이를 찾아 물장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심란한 마음에 별생각 없이 그들이 하는 장난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바지에 물이 튕겨 왔다. ‘아, 이게 뭐람.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 일도 없이 짜증만 나는 건지.’ 인상을 잔뜩 쓰면서 고개를 들고 두 학생을 쳐다보았다. 둘은 얼어붙은 채 서로 눈치만 보면서 서 있었다. 순간 픽 웃음이 나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표정이 ‘이젠 죽었구나.’ 하는 듯했다.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업무의 흐름이 느린 것도, 컴퓨터가 이상한 것도 그 학생들 잘못이 아닌데, 괜히 뾰족하게 감정의 날을 세운 못난 내가 서 있었다. 이 순간 화를 내면 정말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게 마치 이미 일어난 일은 그만 걱정하고, 내일 일은 내일 다시 고민하라고 하는 듯했다. ‘에잇, 나도 모르겠다.’ 나도 그 학생들에게 물웅덩이의 물을 힘껏 튕겼다. 그제야 환하게 웃고 있는 두 학생이 보였고, 행복한 기운이 주위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에서 보면 ‘singing in the rain’이라는 노래가 있다. 축축한 빗속에서 어떻게 노래가 나올까 싶었는데 막상 아이처럼 물장구를 치고 나니 재미있어서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어쩌다 비가 오는 날 외출을 하면, 꼭 물웅덩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첨벙거리며 걸었다.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였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즐겼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늘 쨍한 날만 있는 게 아니라, 비도 내리고 눈도 오고 때때로 바람도 부는 날들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면 힘들다고 주저앉지 말고 그냥 그 상태로 즐기며 살아도 좋겠다. 특히 누군가와 함께 무엇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아주 많은 힘을 얻는 일이기에 나는 아이들과 비 오는 날을 즐겼다. 억지로 힘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주책이라고, 누가 보면 웃긴다고 하겠지 만 말이다.

  비가 내리는 오후. 차 한잔을 들고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할머니 손을 잡고 자기 키만큼이나 큰 우산을 들고 어린 꼬마가 물이 고인 곳을 찾아서 첨벙거리며 걷는다. 나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피식 웃음이 났다. 나이를 먹어도 내리는 비의 감성은 어릴 때 느꼈던 감성과 크게 다르지 않나 보다. 살다 보면 오늘처럼 예상하지 못하고 비를 맞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비는 곧 그칠 거예요. 우리 물 첨벙 하실래요? (202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