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영화 구경

신 영 애

 왁자하던 그리움이 마음 언저리에서 머물다가 어느 순간 공허함으로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텅 빈 순간. 아득히 먼 그 시절의 내가 되어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비가 온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여름 소나기처럼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우산을 사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큰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아빠~ 우리 영화 구경 왔다가 가려고 하는데, 비가 너무 내려요. 우리 좀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어요?” 순간 내가 놀라 아이에게 손사래를 쳤다. 밤 10시가 조금 넘긴 시각이지만, 별일 없으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남편이라 못 오겠다고 하면 아이가 속상해할 것이 뻔했다. “그냥 우산 사서 쓰고 가자. 아빠 지금 주무실 텐데.” 했더니 “아빠가 곧 오신대요.” 한다. 참 내, 내가 좀 늦은 시각 데리러 와달라고 하면 나를 태우고 집에 갈 때까지 잔소리해대면서 아이의 말에는 군 말없이 나섰는가 보다. 아빠가 뭐라고 하시더냐 묻는 말에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니 딸 바보는 확실하게 맞기는 하다.

 영화 구경을 좋아하는 건 아버지를 닮았다. 형제 중에 아버지를 닮은 자식은 작은오빠와 나뿐이라고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중환자실에 누워계실 때 작은 오빠가 병실에 들어서면 엄마의 눈동자가 커지고는 했다. 지금의 오빠 나이쯤 돌아가셨으니, 엄마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딱 그러한듯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엄마와 그리 살가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퍽 다정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평소에는 그냥저냥 여느 집 부부처럼 데면데면하셨지만, 어쩌다가 시장에 가시면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을 자전거 뒤에 싣고 들어오시는 정도였다. 오늘은 뉘 집에서 소를 잡는다고 엄마가 말씀하시면 아버지는 해거름에 외출하셨다가 소고기 한 덩이와 간이나 천엽을 담아오고는 하셨다. 내가 천엽을 먹을 수 있는 건 그때 아버지 코밑에서 받아먹은 덕분이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일 년에 한 번 단옷날이 되면 강릉 단오제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단오장에서 친구분들을 만나 술을 한잔하신 뒤 내 손에 사탕 봉지와 내가 좋아하는 문구류를 쥐어주시면서 함께 어둑한 밤길을 걸어왔다. 약주를 하셔서 기분이 좋으신지 아버지는 꼭 노래를 부르곤 하셨는데, 이것 또한 내가 닮은 모습이다. 나는 술은 잘하지 못하지만, 어쩌다 모임에서 한잔하면 당연히 노래를 부르고는 한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꼭 나만 찾으셨다고 얘기를 하면서 부러워했으나 나는 가끔 싫어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눈치채신 듯,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멈춰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시다가 다시 내 손을 꼭 잡고 비틀거리면서 걸으셨다. 조금은 쓸쓸하신 듯해서 아버지께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마 네댓 살 되었을 무렵일 텐데, 평소에는 초저녁잠이 많고 새벽잠이 없던 내가 어쩐 일로 늦은 저녁까지 깨어 있었다. 외출 준비를 하는 엄마 옆에서 아버지가 팔을 휘저으시며 따라나서자고 하셨다. 엄마도 애를 데리고 어디를 가느냐고 하지 않으신 것을 보면 어린 내가 가도 되는 자리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양손에 엄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따라나선 길은 다름 아닌 영화 구경 가는 길이었다. 내 기억 속의 ‘미워도 다시 한번’ 영화를 보기 위해 아버지는 나를 안고 엄마와 함께 극장에 들어섰다. 온통 깜깜한 장소에서 내가 놀랄까 봐 나를 미리 안고 들어가셨다. 엄마 무릎에 앉아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내 손에 쥐여 주시는 군밤을 먹던 기억은 지금도 행복한 추억이다. 영화 구경이 끝나고 어둑한 밤길을 걸을 때면 엄마는 나를 등에 업고 아버지와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셨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가 표현은 하지 않으셔도 아주 많이 다정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그때 그런 일을 기억하시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운 채 수줍은 듯 빙그레 웃으셨다. 나의 첫 영화 구경이었고, 그때부터 영화 구경을 좋아하는 건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확신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청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편 대신 딸아이들과 영화 구경을 간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영화 구경이나, 연극, 뮤지컬도 많이 보러 다녔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 이내에 어김없이 코를 고는 남편은, 몇 해 전 유명한 영화 ‘맘마미아’와 ‘타이타닉’을 끝으로 지금은 그저 아이들과 다녀오라고 한다. 남편이 운전하는 조수석에 앉아 옆모습을 본다. 공허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함으로 차오른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이 다음에는 아빠도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제는 군밤이 아닌 팝콘 한 봉지를 사서 품에 안고 영화관에 들어서는 생각을 해본다. 아빠와 함께 영화 구경을 한다는 것이 어떤 추억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20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