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를 낮추고 보니

신 영 애

  오늘날 많은 여성이 날씬하고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하이힐을 신는다. 하이힐 하면 보통 여자가 신는 신발이라고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 유래를 찾아보면 재미있는 역사적인 사실도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는 남자들이 발걸이에 발이 잘 걸리게 하려고 주로 신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화장실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밤사이 쌓인 오물을 그냥 창문 바깥으로 던지는 경우가 많았었고, 건물의 으슥한 곳에서 남의 눈을 피해 대소변을 처리했었기 때문에 오물투성이인 거리에서 발을 높임으로써 오물로 인해 신발이나 긴 옷 등이 오염되지 않도록 했다고도 한다. 16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남녀노소 불구하고 하이힐이 대유행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활동을 많이 했던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많이 애용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면 하이힐을 신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 굽이 20cm를 훌쩍 넘을 정도인 것을 보면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이힐은 높이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명칭 또한 달라진다. 남성들이 보기에는 그냥 모두 하이힐 같지만, 굽 높이나 디자인에 따라 펌프스 힐, 스틸레토 힐, 웨지 힐, 플랫폼 힐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보통 7cm ~15cm 정도의 스틸레토 힐은 걷기에는 불편하고 아프지만, 그래도 다리를 더 늘씬하고 예뻐 보이게 하여 가장 인기가 많을 뿐만 아니라 운동화보다 훨씬 유혹적인 걸음걸이와 몸매를 돋보이게 한다. 마릴린 먼로가 “하이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천재성에 큰 덕을 보았다.”라고 했을 정도로, 많은 여성이 고통과 불편함을 감내하면서도 여전히 하이힐을 신는 것을 보면서, 내게는 굽이 높은 신발을 신는 것에 대한 어떤 로망 같은 것이 오랫동안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신발의 굽 높이를 5cm 이상 신어 본 적이 있던가? 5cm는커녕 대부분 굽이 없는 플랫슈즈거나 겨우 높여야 3센티 정도였다. 가끔 모임에서 하이힐을 신고 나온 지인을 만날 때면 괜히 더 아름다워 보이고 내심 부럽기도 하였다. 어쩌다 신발 매장에 가서 나도 한번 신어볼까 하는 마음에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 걸어 보았지만, 불과 몇 센티 높아진 것인데 왠지 허공을 걸어 다니는 불편한 걸음걸이와 주변 사람들보다 삐죽이 솟아오른 머리 높이가 어색해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해, 우연히 방송에서 하이힐을 신고 빙그르르 돌면서 우아함을 뽐내는 광고를 보다가 큰마음 먹고 5cm 굽 높이에 도전하기로 했다. 겨우 5센티지만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디자인은 아주 마음에 들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굽 높이를 낮게 주문 제작도 하느냐고 문의를 하였다. 그런데 신발의 형태가 굽을 낮추면 디자인이 틀어지기 때문에 굽 높이 조절은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을 듣고 포기할까, 살까를 고민하였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신어볼까 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샀다. 집에 와서도 계속 신경이 쓰여 몇 번이나 다시 신어보고, 정말 괜찮은가 하다가 벗어서 고이 두기를 여러 번. 집안에서만 걸어봐서일까 크게 불편한 것 같지 않아서 이제 좀 익숙해졌나보다 생각하던 어느 날. 송년회 모임에 한껏 멋을 부리고 큰 마음먹고 산 5센티 굽의 구두를 신고 나들이를 나섰다.

  모임 장소에 갈 때까지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 잘 샀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뭔가 달라졌다는 둥, 이뻐졌다는 둥 예의 인사치레에 혼자 신이 났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으로 한껏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흥이 무르익고 모임이 끝나갈 무렵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계단이 불과 많아야 다섯 개정도였던가 싶은데, 조심해서 내려온다고 했음에도 발이 꼬여 계단에서 삐끗하더니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친한 선배가 먼저 보고 달려와서 부축해주었고 괜찮다고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걸을 때마다 복숭아뼈 부근이 시큰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응급실에 갔다. 응급으로 실려 온 환자들 틈 속에서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하루 만에 이렇게 되냐고 하면서 신세 한탄을 했다. 젊을 때도 신지 않던 힐을 나이 들어 신어보겠다고 하더니 겨우 5센티에 밀려 신발장에 다시 들여놓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게 아니어서 반깁스를 보름 정도하고 끝났지만, 어쩐 일인지 다시는 힐을 못 신을 것 같았다. 보란 듯이 무게를 잡으며 워킹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은 하룻밤의 꿈처럼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한동안 굽이 높은 신발은 나오지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 하이힐은 어쩌면 나의 내면의 욕망 같은 게 아니었을까. 높이 오르고 싶고, 눈에 띄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욕망. 그런 생각이 철 지난 감기처럼 내 주위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고든 팻쩌(Pstwer)는 ‘룩스(looks)’라는 책에서 매력적인 외모를 갖게 되면 인간관계, 사회관계 속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흐르면 외모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억지 욕심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내 속의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지나친 기대로 무장했던 마음을 비우고 나니 비로소 몸도 마음도 모두 편하고 가벼워졌다. 대신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살기로 했다. 세상의 눈높이를 낮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플랫슈즈나 운동화를 신고도 무심하게 지나쳤던 주변의 행복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나를 온전히 담아내는 신발. 누구보다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어디든 데려다주는 내 발에 편안함을 주어야겠다. 우리는 하이힐에 연연하지 않아도 이미 아름답지 않은가. 신발장 안에서 고개를 삐죽이 내민 나의 구두가 미소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