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 평균
ㆍ작성일	2007-10-15 13:41

ㆍIP:

안경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 와 PC를 켜 놓고 글을 읽는데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고 거북하여
내가 쓴 안경 다리를 연신
흘러 내리는 귓불의 머리를 쓸어 올리듯 쓰다듬었다.
한참을 지나도 이상해서 안경을 벗어 보니
내가 쓰고 있는 건 내 것이 아니라 아내의 안경 이었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의 세월길이가 비슷해 지고
같은 문화에 같은 식생활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안경은 같이 쓸 수는 없는가 보다.

어제 저녁에 PC앞에서 아내와 함께
글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잠이 들었었는데
아침에 출근 시간에 쫓기어 각자의 안경을 챙기면서
서로의 안경이 바뀐 것이다.

같은 안경점에서 같은 가격으로 맞춘 안경이라
테의 색깔이나 타입이 똑같고
유리알이 있는 둥근 모습만 약간 상이 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내 안경이려니 썼었는데
아무래도 나의 두상과 아내의 머리 크기가 다르니
아내의 안경이 다소 큰 내 얼굴에서 안간힘 쓰며 버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뺨으로 미끄러질 때마다
내가 부축해 쓸어 올려 준듯하다.

핸드폰 문자로 안경이 바뀌었음을 아내에게 통보하고
입가에 쓴 웃음을 훑어내며 상념에 잠겨 본다.

아내나 나나 비슷한 나이에 같은 지천명 세대이니
노안도 같이 가는 게 순리 일 듯 하지만
순순히 결과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건
아내의 돋보기 안경은 미리부터 예견되었던 것인데 반해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유리창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엿보는 일은 없을 줄 알았었다.
직장생활 중에 일년에 한번씩 있었던 신체 검사에서도
항상 양쪽 눈이 1.5를 건강 기록부 빈칸에 찍었었고
적어도 1.2 미만으로 떨어져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돌이나 백일잔치 문화도 뷔페식당에서
이벤트 전문가의 현란한 진행으로 성대하게 치러지고
금붙이 보다는 현금의 축의금을 건네는 것으로 발전 됐으나
그런 문화는 근세에 상인들의 기발한 상술로 정착 되어 왔지만
내가 어린 아이들 키우던 시절에는
가까운 친지나 우인友人들을 집으로 초청하고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나누어 먹고
각자의 라이브로 흥을 돋우어 즐겁게 놀았으며
축하선물로 은수저나 금반지가 일반화 되어 있었다.

** 아마도 삽 십대 초반 이었나 보다.
하루는 직장 동료의 아들 백일잔치가 있는 날
부서원 십여 명이 한곳에 모여 같이 잔칫집에 가는 길에
백일반지를 사기 위해 금은방에 들렸는데
그곳은 안경점을 같이 병행하는 가게였다.
반지를 구입하는 동안 우리들은
가게의 이것 저것을 구경하다 크기와 모양이
영사기 필름 틀 같은 둥그런 물체에
여러 개의 구멍이 뚫린 쇠붙이 기구가 진열장 위에 있어
점원에게 물어 보니 시력을 측정하는 기구라고 하였다.
호기심에 동료들은 시력을 측정을 하는데
유리알이 박혀 있는 여러 개의 구멍들을 돌려 가며
전방에 걸려 있는 시력 측정 도표를 보다가
가장 뚜렷하게 잘 보이는 유리알이
자신에게 맞는 안경 도수이며 시력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측정할 눈에다 컴퓨터 기능이 숨 쉬고 있는
디지털 현미경 같은 문명의 이기를 들여다 대고
따로 숫자나 도표를 맞추지 않아도 기기가 알아서
눈의 흰자위 검은 자위 상태를 살펴 프린트 해주면
그 자료에 따라 안경의 도수를 맞추어 생산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신기한 게 있는 줄 몰랐고
대부분의 안경을 낀 동료들도 처음 보는 듯 하니
아마도 그 시절에는 얼마 전까지 우리가 공익 CF에서 보았던
“4, 5, 새, 거, 꼭 군대 가고 싶습니다.”하는
그런 아날로그적인 시력 측정으로 안경의 도수를 맞췄는가 보다.

돌아 가며 가장 잘 보이는 유리구멍을 찾고
시력을 물어 보니 점원은 기구에 작게 적힌 숫자를 확인하며
각자의 시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모두들 시력을 확인 한 후 나도 시력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기구를 내 눈 앞에 붙이고 이리저리 돌려서
드디어 가장 뚜렷이 도표가 보이는 구멍을 찾았다.
나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점원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게 저 한 테는 가장 잘 맞아요.”
“이건 시력이 몇 이예요?”
하고 물으니 점원은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하며
내가 가리킨 구멍에 거침없이 손가락을 쑤~욱 찔러 넣으며
“이건 유리가 없는 그냥 맨 구멍 이예요.”
하는 것이었다.
그 점원의 하얀 손가락은 용감하게 기구의 구멍을 뚫고 나와
내 배때기를 꼬나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으며
한편으론 내 양쪽 눈의 우월성을 동료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 시켜 줬다.**

그때는 안경 낀 친구가 안경을 벗으면
사물이 흐릿해 잘 안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었는데
어언 세월을 못 이기고 이제는 내가 안경의 힘을 빌려야
원만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다니.

그렇게 내 생전에 안경을 쓰는 일은 없을 거란
자신감으로 한 세상 살았었는데
그것이 세월의 진리를 얕잡아 본 나의 오만이란 것을
지천명인 요즈음에야 깨 달게 된 것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좋은 눈을 과시하며 다니던 친구들도
책을 볼 때는 너나없이 볼록 유리 두 알을 어김없이
콧잔등 위에 올려 놓고 있으며,
컴퓨터나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많은 젊은 학생들도
콘텍트 렌즈나 안경의 기능을 사랑하고 있으니
다소 위안을 삼을 뿐이다.

그렇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이만기 장사를 이겼던 강호동도 세월의 굴레를
이만기 장사에게 씌워 놓고서야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월과 작당을 해서 이만기를 쓰러트린 것이다.

세월의 무서움을 지천명인 지금이라도 깨달았고
그렇게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억울하지만 세월의 완력에 어느 정도 굴복하고,
보다 좋은 과학의 산물들을 잘 활용하여
작은 반항을 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야겠다.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일은 아직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이 안경과 벗하여 좋아하는 책을
다정하게 같이 읽어야 하겠다.

2007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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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진: 최평균 시인 그동안 안녕하신가?
나는 이것 저것 잔일들이 많았었지. 요즘은 조금 한가하다네.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거야 나도 몇 년전부터 눈이 조금씩 나빠지더니 지금은 안경 없으면 책을 못보게 되었다네. 지난번 노트북도 눈이 나빠저서 큰 pc로 바꾸었지.
자네의 세월 속 안경을 감칠맛으로 읽고 간다네. 잘 보았네.
늘 건안 건필하시고 행복하시게............. -[10/17-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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