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 평균
ㆍ작성일	2008-02-12 12:57

ㆍIP:

껍질속 땅콩이야기

포근하기만 하던 겨울 날씨가
갑자기 수은주의 빨간 눈의 높이를 끌어 내린다.
역시 대한의 동장군은 자신의 흔적을 안 남기고는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자존심의 심술을 부리는 것 같다.
그래도 겨울 체면이 있지……

오늘 새벽 잠결이었다.

“아침 7시인데?”
아내의 잠자리 뾰족한 닦달이 내 달콤한 꿈속을 헤비고
송곳처럼 내 머리속을 짓쳐 찔러 온다.

‘이게 뭐야? 꿈인가?’
잠결의 내 반 의식도 잠깐.
그렇지 오늘이 그날……
나는 이내 의식을 정비하고 대꾸한다.

“그래. 일어 나야지. 알았어.”

어제 저녁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다
늦게 잠이 들었는데
그 놈의 자명종의 고자질로 내 단꿈을 접어야 했다.
아내의 미역국을 끓여야 하니까.

아내는 오늘,
그러니까 음력 12월 30일이 귀 빠진 날이다.
몇 해전 까지는 명절 전날의 생일을 그녀의 시어머니가
아침 일찍 미역국을 어김없이 끓이고 챙겨 주셔서
서운함이 다소 반감되는 생일을 지냈었는데
이제는 그분이 자리에 누우신 지 어언 몇 해가 되고
그 후론 내가 아들녀석과 함께 아내의(구정 전날이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생일)을 챙겨 주는데,
케익과 저녁은 아들 몫이고 미역국 아침은 내가 챙겨 줘야 한다.

사실 다른 특별한 요리야
일년이면 몇 차례 정도는 하는 식단이니 문제가 없으나
미역국은 1년에 단 한번 구정 전날 끓이니
요리법 절차를 숙지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지난해에 배웠던걸
일년이 지난 후에는 까마귀 고기 먹듯이 까맣게 잃어 버리니
올해의 미역국 끓이기도 다시금 새롭고 버겁다.

사실 잘 아는 척 조심조심 뱉어 놓지만
지난해에 배운 조리법이 그리 썩 생각이 나질 않고
그렇다고 다시 물어 보기는 자존심 팔려 추억을 더듬는 척
은근 슬쩍 확인을 해보면서 요리(?)를 한다.

그렇다고 어쩌랴?
조선에서는 남자가 아무리 요리를 잘 하더라도
능숙한 조리장인 주부를 능가할 수가 없으니…...

어쨌거나
올해는 칼칼한 미역국을 먹고 싶다고
바지락 미역국을 끓여 달라는 아내의 주문에
마땅한 바지락을 어제 저녁에 대충 준비해 놓았다가
아내의 자명종에 눈꺼풀에 덕지덕지 달린 게으름을 떼어 내고
일어나서 두 발을 어렵게 끌고 주방으로 나갔다.

사실 아내도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 보듯 못미더워
이래 저래 침대에 누워 미주알 고주알 훈수를 했다.

엊저녁부터 물에 불려놓은 미역을 씻어서 냄비에 건져 넣고
미리 끓여 논 바지락 국물을 적당히 붓고
진짜 가정표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 바지락 넣고 마저 끓여서
훈김 가득한 미역국을 라면탕기에 한 그릇 담아 내고
새로 한 아끼바리 쌀밥으로 아내의 생일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물어본다.

“어때? 미역국 맛있어?”
아내는 더 생각도 안하고
“으응! 맛있네! 오우! 테이스트 엑설런트!”
하고 엄지 손가락을 곧추 세운다.

흐뭇한 마음으로 아내의 식사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아내가 숟가락을 놓자 나도 미역국에 밥 한 공기를
식탁에 공손히 모시고 아침 공양을 즐겨 본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다던 미역국은 간이 덜 돼서 싱겁고
미역도 들 끓어서 특유의 부드러움 대신 나의 이빨에
꼬들꼬들 항거하다 뚜걱 뚜걱 잘리어 스러져 간다.
‘이게 뭐가 맛있지?’

갸웃 생각하다가 이내 설핏 고소를 머금는다.

‘설마 아내가 이 미역국이 정말 맛있어서 맛있다고 한 걸까?’

사실 맛이 있건 없건
아내는 이미 맛있다고 할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어줍은 실력이 못 미더워
위 아래 눈꺼풀이 서로 털을 비비는 상태로
나의 조리법 물음에 답을 했으니 이 미역국은
거의 아내와 나의 합작품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며
더군다나 어줍어도 남편의 사랑이 담긴 진국 사랑국이니
어찌 입맛으로만 맛을 평가 하리요.

생일 미역국의 맛 평가는 물론 혀끝으로 해야 하지만
진정한 평가는 그녀와 나의 사랑의 척도로 평가함이니
겉 맛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속 평가인 것이다.

어쨌던 우리들 삶이 인형극에서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서로의 손짓에 따라 감사히 움직이며 살아오다 맞은
아내의 52번째 생일날 이었다.

바지락 미역국에 밥 한 그릇 맛있게 비우고 설거지를 하며
나의 뇌리는 추억을 더듬어 결혼하던 해로 돌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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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하던 그 해도 상당히 추웠던 것 같다.
아니면 춥게 느껴 졌거나.

80년대 초에 아내와 결혼해서 신접살림을 차린 방은
그 시대 대부분의 서민들이 그랬듯이 연탄불을 이용한
부엌 온돌 난방에 단칸방 세 들어 살았었다.

내가 군을 전역하고 취업한 2년 후에 서둘러 결혼 해서
제대로 된 신혼 집을 구하기는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니
우리에겐 그만도 감지덕지였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갔다 오고 취직하면
동네 어른들의 인사가 ‘언제 장가가니?’ 였었고
장가가고 나면 ‘언제 집사니?’ 이었으니
아무래도 결혼보다 집 장만이 먼저 일수 없었을 것이다.

그 해 12월초에 결혼한 우리는
하루 종일 불구멍을 개방해도 간간히 입김이 서리는
외풍 심한 셋방에서 그 겨울을 나야만 했었다.

그래도 신혼살림을 차린 집이
재래시장이 거의 끝나는 곳에 있어서 귀찮음만 감수 한다면
먹거리가 바로 지척에 널려있으니 그만도 참 행복이었다.

그 기나긴 겨울밤을 솜이불에 의지해 지내다 보면
얼큰한 김장김치를 썰어 넣고 물을 팔팔 끓이다
라면을 두어 개 넣고 끓여서 맛있게 먹으며 추위를 이기기도 하였고
그도 아니면 서로 꼬옥 껴 앉고 둘의 훈김을 보태며
이불속에서 정담으로 밤을 보냈었다.

그러면서 곧잘 하던 우리의 겨울 밤 대화는
나 : “춥지?”
아내 : “아니?”
나 : “이 방이 뭔 줄 알아?’
아내 : “뭔데?”

아내는 안 춥다며 말이 정말 짧다.

나 : “이 방은 우리의 땅콩껍질이야.”
“우리는 땅콩 껍질속의 땅콩 두 알.”
아내 : “그래요?”
나 : “그~으럼. 앞으로 이 땅콩 껍질속에 땅콩 알이 늘어 나겠지.”
“세 알 그리고 네 알”
나 : “춥지? 우리 새끼 땅콩알 만들자. 이리 바짝 붙어봐.”
아내 :“…….”
나 : “흐흐흐”
시간이 어느덧 흐르고

아내와 나: “드르렁 쿨쿨”

그렇게 몇 해를 지내고 큰 땅콩껍질로 바꿔가며
기어이 한 껍질속에 네 알의 땅콩이 들어 서게 된 것은
한 오 년 이상이 되었나 보다.

사실 땅콩이야 한 껍질속에 세 알 밖에는 안 들어 있고
완두콩이나 일반 콩들은 다섯 개 이상도 들어가 있으나
우리는 유독 땅콩으로 비유했다.
그만큼 우리는 고소하고 행복한 땅콩이고 싶었다.

바다의 꽃게나 새우, 아니면 들과 야산의 초록 뱀들도
커지는 몸을 담기 위하여 자신의 껍질을 자주 바꾼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도 불어나는 땅콩알로 껍질을 바꿔서 살아 왔으니
그들 갑각류나 파충류 동물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살다가 물론 땅콩 알끼리 다투기도 하고
형편상 얼마간씩 따로 살기도 한 4반세기이지만
이제 우리의 껍질은 오래되고 낡아서
알을 몇 알 털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아이들이 각자의 보금자리인 껍질을 만들고
자신들의 짝과 방울 땅콩을 만들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비록 윤택한 껍질속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잘 버텨준 우리의 땅콩 껍질들이 고맙고
비좁아도 같이 숨쉬며 견뎌준 내 땅콩들이 고마운 오늘이다.

나의 방울 땅콩들아!
부디 너희들도 큰 욕심(저택) 부리지 말고
자그마한 땅콩 껍질을 만들어 몸 비비며 살아가거라.

우리는 이제
낡았지만 정들은 이 껍질속에서
그 옛날 두 알이었을 적 그 시절로 돌아가
너희들 눈치 안보고 서로 몸 붙이며 살란다.

아내의 생일인 오늘 저녁에는 보일러 게이지를 낮추고
옛날 하던 수작을 부려 봐야겠다.

“추워요? 땅콩알은 못 만들더라도 이리 꼭 붙어봐요.”

2008년 2월 6일 저녁에

감문주 : 좋은 생각을 하셨군요. 부부지간에 오손도손 깨가 쏟아지는 모습 보기좋습니다.
이곳 양평읍사무소 옆 도서관에서 이정록 문학 강연이 16일 토요일 3시에 있답니다.
무료 강연이고요. 양평문인협회에서 주관합니다. 지나는 길 있으면 한번 다녀가십시요.
-[02/12-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