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 평균
ㆍ작성일	2007-12-01 22:15

ㆍIP:

그 해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어느덧 올해도
마지막 달의 문 앞인 12월 1일로 접어 들었다.
한달 뒤인 올해의 큰 뒷문을 생각하며
총각시절인 80년대 초의 추억으로 들어가본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은 도시 전체가 무척이나 소란스럽고
거리는 불야성에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내 젊은 청춘이 녹아 들기에는 충분히 친근한 모습이었다.

일년에 통금이 해제되는 이틀 중에 하루이니
젊은 청춘들은 마치 부모님이 출타하고 없는 집안같이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고 관대해지고,
뭐 그런 기분이다.
내 나이 이십 대 후반이던 12월 31일 10시 30분.
청량리역에서 강릉으로 떠나는 그 해의 마지막 열차에
동갑내기 친구와 둘이서 가방 하나씩 달랑 메고 올라섰다.
젊다는 건 참 좋은 것 같다.
간섭도 받지 않고 훌쩍 소란스런 이 도시를 떠날 수 있으니까.

드디어 열차는 게으르게 기다란 쇳덩이 육신을
조금은 버거워하는 바퀴위에 올려놓고
궤도에 뺨을 비비며 역사를 출발한다.
하품 같은 기적 소리로 그 해를 떠남을 아쉬워하면서.

도시가 따라 나설까 봐 잠시 숨 고르던 열차는
불빛이 사위자마자 남한강 줄기를 따라 힘껏 달려간다.
어린 동생들 몰래 떼어 놓고 앞 개울로 놀러 가는 형처럼.
차창엔 흑공단 커튼에 빤짝이 별을 수놓은 것 같은데
서너 가지 색체로 그린 것 같은 야경이 이렇게 화려하게 느껴짐은
길 떠나는 나의 마음이 한없이 여유로워서 인 것 같다.

열차 안에는 젊음이 넘쳐난다.
다행히도 나이든 손님은 한 분도 없고 파란청춘 일색이다.
등산복차림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아가씨들……
작업에 열중인 그야말로 떡거머리 총각들……
게임을 하며 서로의 손목을 때리고 깔깔대는 남녀들……
그 중에 우리좌석 뒤편은 유난히 시끄러웠는데
돌아보니 젊은 녀석들(이십 대 초반) 한 떼거리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박수 장단에 한참 흥이 났다.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가수 김세환의 노래였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그 분위기에 녹아 들었던 것 같다.

열차는 제 녀석 위장속의 손님들이 비빔밥으로 범벅이 되었던
파김치로 숨을 죽이고 축 늘어져 있던 개의치 않고 빠르게
그리고 조금 더 빠르게 어두운 산골짜기로 숨어든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뒤편에서 일제히 카운트 다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열” “아홉” “여덟” “일곱” ……
이게 뭔 소리야?
열차안에서 아폴로 우주선이라도 발사하는 건가?
궁금해서 뒤 돌아보니 그 소란한 패거리들이 빙 둘러서서
하얀 케익에 불 붙여 놓고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다.
“둘” “하나” “땡” “후~욱(촛불 끄는 소리)”
“와아!” 짝짝짝
“해피버스 데이 투유~♬”

아마도 일행 중에 1월 1일이 생일인 친구가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중계되는
제야의 종소리 카운트 다운에 맞춰서 같이 소리치고
정확히 새해 새날 00시 00분 00초에 축하를 해 주는가 보다.
참 멋진 젊음들이라고 생각하며 일편 가버리는 그 해를 생각해보니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쳐 흘러간다.
아쉬운 날들, 지난 12달 동안 내 곁에 일어났다 스러진 일들……
지금 내가 이 열차에 안탔으면
분명 광화문 제야의 타종행사에 끼어 박수를 치다가
무교동에서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으로 뒷풀이 하고 있겠지……
에구!
얼른 지난해의 기억을 털어 버리고 나의 새해 새날을 반겨본다.

열차는 제 흥대로 달렸다 쉬었다 하면서 알 수 없는 나라의
검은 터널 같은 세계를 잘도 간다.
간간히 어둠 속에서 등불 몇 개가 다가오다 흠칫 놀래서 달아날 뿐.

어느덧 시간도 꽤 흘러 시끄럽던 젊은 패들도,
새침데기 아가씨들도 모두 잠이 들고 옆을 돌아보니
친구녀석도 제법 잠이 깊이 들어있다.
모두들 잠들은 산골짜기에 나와 열차만 댕그러니.

내가 밤새워 달리는 열차에게 물어본다.
나: “열차야! 피곤하지 않니?”
열차: “너는 피곤하다고 돈 안 버냐?”
나: “그야 먹고 살려면 일 해야지.”
열차: “그래, 나도 피곤하지만 일이니까 그냥 달리는 거야.”
“의미는 나도 몰라.”
나: “그래, 나도 왜 사는지 모르고 그냥 사는 거야.”
“삶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증도 없어.”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저 사는 거야.”
나: “근데 열차야? 언제까지 달릴 거니?”
열차 “시끄럽다. 너도 잠이나 자라! 가다가 연료 떨어지면 서는 거지.”
“너는 얼마나 살 거라고 정해 놓고 살고 있는 거니?”

에구! 할말 없다.
쓸데없이 말을 걸었나 보다.
괜히 보이지도 않는 창 밖만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나는 정말 왜 살까? 얼마나 살수 있을까?’

어느덧 열차가 깊고 높던 산자락을 벗어나고 개활지를 달릴 즈음
신년의 태양이 바다 저 깊은 곳에서 빠져 나와
잠에 빠진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붉은 팔을 뻗어 잠을 깨운다.
선잠 깬 나그네들은 새벽을 털어내며 창 밖 바다를 바라본다.
어느새 햇님이 바다 한가운데 보란 듯이 우뚝서 있고
파도는 흰 포말을 아낌없이 일으켜 생맥주 거품 같은 포말로
새해의 새 태양을 환영해 준다.

“와~아!”
“해다!”
“새해다!”
“멋있다! 하하하” 짝짝짝

저놈 태양은 밤새 술을 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갛다.
나는 슬그머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해나 어제 해나 그 밥에 그 나물이지 뭐가 그리 새롭나?’
그렇게 끝과 시작이 교차되던 밤이 지나고 맞이한 새해였다.

열차는 그렇게 가파른 강원도 내륙인 황지, 도계 고개를 달려
아침 8시를 조금 넘겨서 강원도 강릉에 곤한 육신을 누었고.
우리는 해장국을 먹은 후 경포대와 묵호를 카메라에 담아 왔었다.

요즘은 매년 12월 마지막 날에는 해맞이 관광을 위해
온 나라의 대부분 백성들이 도심을 뛰쳐나가고 있으나
그때는 해맞이인지 해돋이인지 도무지 관심이 없고
그저 먹고 사는 민생고에 온 정신을 쏟아야만 했으며
송년 모임에서 쓴 소주로 하루 밤을 보내고 새해를 맞고
젊은 남녀들도 약간은 느슨한 통금 없는 날의 관대에 편승해
조금은 위험한 밤을 보내곤 하여 ‘크리스 마스 베이비’나
‘뉴 이어 베이비’ 라는 유행어가 있기도 했었다.
부모님들도 국가의 단 두 번 통금 해제 시책에 충실히 따라서
딸들의 귀가도 해제 시켜주는 날이었던 것 같다.

하긴 그 해맞이라는 문화도
십여 년 후인 90년대 중반 방영 되었던 인기 드라마 ‘모래 시계’에서
촬영지로 부각된 정동진과 ‘고현정 소나무’가
연인들의 인기 여행 코스로 부각 되면서 전국에 불길처럼 번져 나갔고
이제는 정동진 위쪽에 있는 ‘등명낙가사’나 경포대,
아래쪽의 옥계로 가는 길인 ‘곰두리연수원’ 언덕을 내려간 곳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별당 아씨 같은 산골마을 심곡을 지나
금진항까지 해맞이 특수로 출렁이고 있으며
심지어 백두대간의 정상이나 정맥의 정수리들도 명소로 부각되어
해맞이 객들의 발자국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는 그 해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떠났던 추억도
몇 장의 빛 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을 뿐이고,
쉽게 그런 열차의 아름다운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워 졌으나
모든 해맞이 객들이 동해로 떠난 틈바구니 명소를 찾아서
해맞이 추억을 만들 계획을 다시 해봐야 하겠다.
그 시절처럼 질이 낮게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기에는
이젠 너무도 내 남은 삶이 소중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서 해맞이 여행길을 떠날 수는 없겠지.
만약 혼자서 그런 여행을 즐기려 계획안을 올리면
결제는커녕 뾰족한 목소리로 아내는 분명히 한마디 하겠지?

“혼자 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