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 평균
ㆍ작성일	2007-12-12 19:29

ㆍIP:

추억의 펜 글씨본

“김군 이게 무슨 글씨야?”
“……….”
“이 사람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글씨가 이게 뭐~냐?”

작년에 나를 도와 일하던 김군에게 장비 List를 확인하고
메모하여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괴발개발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하도 난해하게 써 놓은 글씨에 자존심 상할세라
내가 웃으며 말했더니 이 녀석 머리를 긁적이며
제가 쓴 글을 해독(?)해 주다가 머쓱하게 대꾸한다.
“글씨를 잘 못쓰는 사람은 머리가 좋다고 하던데요?
“이 사람아 그럼 요즘 젊은이들은 모두 다 천재게? 나 참!

언제부터였는지 ‘글씨가 악필인 사람은 머리가 좋다.’
라는 말이 이 나라에 탄생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어느 교수는 학생의 노트에 작품해설을 잔뜩 써 줬는데
그 학생이 집에 가서 읽어 보려니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꼬불탕 글씨에 읽기를 포기하고
다음날 그 교수에게 뭐라고 설명을 해 주신 건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고 다시 읽어 달라 부탁하니
그 교수는 자기가 쓴 글을 한참 들여다 보다가
“글쎄…… 나도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가 없구먼……”
하더라는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 되어 버렸다.

나도 적지 않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안 내력인지 필체가 좋지 못하다.
‘필체는 유전’이라는 검증된 적 없는 말도 있으니……
군 전역 후 입사한 회사에서 기안 문서를 작성할 때는
남들은 30분이면 뚝딱 완료하는 분량을
나는 1시간 이상을 정성 들여야만
그런대로 결재 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것도 ‘Plus Pen’으로 정성 들여 한자한자 써 내려 가야지
평소 속도로 글을 섰다가는 문서 서식 용지에
기러기를 몇 십 마리 이리 저리 그려놓고 말았을 것이다.

대외문서는 기안한 글을 여사원이 타자로 쳐 주지만
기안 문서는 상사들을 거쳐 이사님들이나 사장님께 까지
결재를 득해야 하는 문서들이 대부분인지라
정성을 기울여 또박또박 쓰지 않으면
올리기 미안한 문서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의 부서에는
나보다 십여 년 이상 나이가 많으신 선배 소장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선배가 기안하시는 문서를 슬쩍 들여다보니
이건 나보다 훨씬 글씨 쓰는 재주가 없는 것 이었다.

기러기, 오리, 왜가리가 곳곳에 그려져 있고
눈을 크게 뜨면 간신히 읽어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말했었다.

“K소장님 저도 글씨는 못쓰는데
소장님은 글씨를 저보다 정말 더 못 쓰시네요.
저는 소장님을 위안 삼아 이 세상 살아야겠어요. 하하하”

그런데 나의 별 생각 없이 농담조를 던진 말이
그분에게는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 이였었나 보다
그 후 크게 티를 안 냈어도 가끔 나에게 농담 식으로 핀잔을 주던
그 소장님은 세월이 몇 년 흘러 어떤 술자리에서 내가 여쭤 본
‘나에게 어떤 감정 있느냐고 왜 그렇게 내 말에 핀잔을 주냐’
는 나의 항의성 취한 물음에 그제사 나에게 털어 놓으셨는데,
그러잖아도 악필이라 항상 핸디캡으로 알고 지내 왔었는데
나의 농담에 오랜 시간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다고 한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서로 마음을 풀었지만
선배님이 그렇게까지 가슴에 담고 아파할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분은 지금쯤 70세에 근접한 노인이 되어있을 것이지만
그 당시 지방의 농업고 졸업학력으로 악필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주력 사업인 첨단 통신 분야의 알아주는 실력자였고,
지금이야 젊은이들 토익 수준이 9백점 대도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 그분은 부단한 노력으로 내가 근무하던 80년대 초에도
토익 점수가 항상 7백 점 대 상위에 머물렀고 회화도 잘해서
가끔은 사장님의 통역으로 해외를 다녀 오시기도 했던 분이다.

요즘은 PC가 집집마다 있어서
직접 펜으로 글을 작성하는 기회가 아주 적어졌다.
학교에서도 대학진학을 위한 지식 교육에만 치중하여
일부 특수한 목적의 수업을 제외하면 그다지 수기로
글을 그렇게 많이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가족도 군에 가있는 작은 아들에게 편지를 쓸 때면
나나 아내는 볼펜으로 편지지에 정성껏 써서 보내지만
큰아들은 컴퓨터로 뚝딱 작성하여 프린트해서 보내 버린다.
그게 시간도 훨씬 절약되고 힘도 덜 든다고 한다.

컴퓨터가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다가오기 전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군에서나 사회에서나 대접을 받는
대단히 커다랗고 매력적인 재주였었다.

군에서는 주특기와 관계없이 서무병으로 선발되어
훈련도 덜 받고 상관들의 편애도 받았으며,
사회에서 직장 생활도 기술직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부서 사무직 핵심 사원으로 발탁되어 재주를 뽐내곤 하였었다.

그때는 군이나 직장에서나 수기로 작성하는 문서가 다였고
더군다나 모든 행사나 보고를 할 때는 챠트 보고가 주였으니
업무 성과를 뛰어 넘는 탑(Top)에게 하는 보고에서
글씨를 잘 쓰는 인재가 필요한 건 당연하였으리라.

그래서 군에서도 챠트병이 항상 총애를 받고 포상도 자주 받았으며
실제로 그때 당시 회사의 동료 중에
어려서 시골동네 서당에서 한문과 붓글씨만 배우다
나중에 검정고시로 어렵게 학교를 졸업하고도
잘 쓰는 글씨 재주 덕분에 발탁되어 업무 실적을 무시한채
쉽게 진급을 하고 학벌이 좋은 사원보다 상당히 빨리
요직의 부서장으로 자리를 잡고 목에 힘주는 친구도 더러 있었다.

60년 대 70년 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는
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1학기까지는 글을 배우지 않고
연습장에 색연필로 가로 긋기, 세로 긋기, 동그라미, 네모 등을
수없이 그렸으며 숙제도 그런 것들을 해서 가지고 가면
담임 선생님이 찍어 주는 ‘참 잘했어요” 라는
스탬프 도장을 받으며 1학년 1학기를 보냈었다.

그 후 2학기나 또는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도
원고지처럼 네모난 칸으로 줄 쳐진 바둑판 같은 국어 공책에
정성 들여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따위를
빼곡히 쓰기도 하고 숙제도 하여 학교에 가곤 했었다.
그것이 글씨를 잘 쓰기 위한 체계적인 필체 공부였었던 것이다.

중학교로 진학을 하면 글씨 재주를 다듬기 위해
만년필도 아닌 펜으로 잉크를 찍어 점선의 흔적을 따라 그리며
글씨를 잘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 했었다.
학교 교과목 중에도 펜 글씨 시간이 있어서
펜과 잉크를 담은 병을 책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다가
딱딱한 무엇에 부딪혀 잉크병이 깨지거나 뚜껑을 꼭 닫지 않아
잉크가 흘러 나와 가방속의 책과 노트를 파랗게 적시는
곤란을 겪는 일도 있었다.
그 시절 졸업이나 입학 선물은 만년필이 최고였으며
특히 ‘Paker’ 만년필은 그 시절 최고의 선물인데, 그 만년필은
용돈이 궁하면 학교 주위 가게에 팔아서 요긴하게 쓰기도 했던
학창시절 비상금이 되었었다.

나도 펜촉을 잔뜩 사서 글씨 쓰기 연습을 했었다.
그때 있던 ‘펜 글씨본’에다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더 기초적인 연습에 주력했었는데 한글 자모음 중에 ‘ㅣ’와 ‘ㅡ’
그리고 ‘ㅇ’을 위주로 연습을 했다.
적어도 그 세가지만 잘 쓸 수 있으면
어느 정도 글씨가 예쁘게 써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노력을 했어도 필체는 유전이라던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요즘 학생들 보다는 꽤 괜찮은 것 같다.

그 후에도 군에서 전역을 몇 개월 앞두고 먹과 벼루
그리고 붓을 몇 자루 사서 내무반 침상에
전우신문을 한 뭉치 깔아 놓고 붓글씨 연습을 했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오직 제사나 차례 때 필요한 지방(제사 때 올리는 조상 신위)만
전우신문에다 가득가득 쓰면서 제대 날짜를 기다렸었다.

장남인 내가 다른 건 못 써도 ‘지방문’은 제대로 써야
조상들 제사상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로 열심히 연습하고 써서 지금은 제사 때 마다
‘붓펜’ 이라는 간편한 필기구로 제법 그럴듯하게 쓰곤 한다.

집안에서 장남 인지라 제사 때 마다 지방은 내가 쓰고
간혹 급한 업무로 제사에 참석 못 할 때는
미리 써놓고 출장 등을 갔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큰 아들이 배워서 필요할 때는 직접 쓰겠다며
내가 쓰는걸 내 곁에서 따라서 써 보곤 하였었다.
아들이 써 놓은걸 슬쩍 넘겨다 보니
한문 글씨는 장마철 마당에 지렁이 기어 가는 듯 하게 써놓아서
녹도문자를 그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보기가 영 안 좋았다.
나의 어느 정도 노력에도 불구하고
겨우 한문 흉내나 내는 실력이고 보면
그저 지식 습득의 대학 진학 공부만 줄 창 해댄
지금 아이들에게 명필 ‘지방문’을 바라는 건 무리인 듯 하다.

어쨌던 원하는 소기의 목적만 달성하면 될 테니
이제는 문명의 이기인 PC로 지방을 작성한 것을
프린터로 인쇄해서 제사 때 마다 쓰라고 해야 될 것 같다.
시대가 바뀌어 가니 글씨 문화도 적당히 따라가 줘야 할 것이다.
명필이 아니더라도 남이 알아볼 정도만 글씨를 쓰면
사회생활 하는데 전혀 어려움 없이
문명의 이기들이 도와주는 좋은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의 악필도 전처럼 자주 남에게 보이지 않아도 되는
자존심 덜 상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조만간 아이들이나 내 동생들에게
조상들의 ‘지방문’을 워드 문서로 작성해서 나눠줘야겠다.
지난날의 펜글씨 쓰기나 붓글씨 쓰기는 이제 서예 작가나
꼭 필요한 사람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필요가 되어버렸다.

잠재된 추억으로 내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옛날 나의 글벗들이 그리운 이 아침이다.

‘펜촉 펜과 Paker 만년필’, ‘모눈종이와 오선지’
특히 ‘국어공책’과 ‘펜 글씨본’은 주위에서 찾아 보기 어려운
나의 옛 벗이 되고 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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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수: 저도 글씨를 못 쓰는 편이지만요,
어느날 문득,
부모님께서 고생 고생하시며
제가 공부를 잘하도록 뒷바라지를 해주셨다는 생각에,
비록 가방끈은 짧지만
글씨 하나만큼은 정성들여 적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사에 정성을 들이고 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하더군요.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일 수록 똑똑하고 천재가 많다는 말을요..
ㅋㅋㅋㅋㅋ

언젠가 은행에 적금을 하나 들려고 갔다가
여직원이 건네주는 양식을 받아 적었더니
인물은 정말 별로지만,
글씨는 억수로 맘에 든다며
먼저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작업에 성공하여
한동안은 무척 행복했었던 적이 있었답니다.
ㅎㅎㅎㅎㅎ

근데,
무엇이든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잘 할려고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연애 편지를
(그때는 하루에 수십통은 기본이었습니다만...)
줄기차게 적어왔기에,
지금까지도 말빨과 글빨로 (hirashi2000@yahoo.co.kr) -[12/13-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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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수: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생일과 졸업 선물로 만년필을 주고 받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만년필 한자루를 구입하려고 그렇게나 돈을 모으곤 했었는데...
이젠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잘 지내시죠?
계속 바쁘다보니 자주 연락도 전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오후부턴 기온이 내려가고 추워질거라는 일기 예보이니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즐겁고 건강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운 글밭에서 함께 추억을 더듬으며
쉬었다갑니다. (hirashi2000@yahoo.co.kr) -[12/13-12:46]-

재활용품

그 해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