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최 평균
ㆍ작성일	2008-02-2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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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절(上元節) 달맞이
어제가 일년의 24절기 중에 봄의 절기로는
입춘 다음에 두 번째 절기인 우수였다.

앞으로 보름 있으면 개구리가 입을 뗀다는 경칩이니
이미 월력으로는 봄의 대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 선 것이다.
하지만 산야의 호수나 작은 냇물은 아직도 두터운 얼음에
꽁꽁 손발을 묵인 채 겨울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렵게 살피지 않아도
봄은 이미 얼음아래에서나 차가운 피부 밑에서 태동하여
대지의 따스한 수유를 받으며 조용히 자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머지않아 푸른 아지랑이의 신호로 일시에 봉기하여
이 산천에 연록색의 새 삶들을 깨워 내고야 말 것이다.

내일은 음력 1월 15일.
우리가 즐기는 명절중에 하나인 대보름이다.

대보름은 도가에서 말하는 중원 7월15일과
하원인 10월15일과 더불어 삼원(三元)중에 처음이라는
상원(上元)으로서 일년 중에 달이 가장 크게 보인다고 하는데
8월 15일인 만월보다 더 크다고 한다.

정월 초하루는 어두운 그믐달인데 반해 상원인 이날은
최고로 밝은 달을 볼 수 있는데 예전의 선조들은
설날과 대보름 사이를 최고의 명절로 정하고 지내기도 했다.
그 해의 농사 준비를 시작하려는 시기인지라
풍년을 기원하고 한 해를 점치기도 했었다.

또한, 설날은 가족적이고 개인적인 폐쇄적 명절이었던데 반해
대보름은 부락과 이웃이 같이 하는 명절로 개방적인 명절이다.
나라 곳곳마다 그 지방 특유의 여러 가지 단체 놀이들이
대보름 전날과 당일에 벌어지는데 단체적인 놀이 풍습으로는
줄다리기, 다리 밟기, 고싸움, 쥐불놀이 지신 밟기 등
다양한 부락의 행복을 기원하는 놀이들이 있으며,
그와 달리 부럼까기, 귀밝이술 마시기, 더위팔기 등을 하며
개개인의 일년 건강을 기원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혹서를 이기는 방법이 미미한지라 더위를 팔고,
신체의 청결이 부족해 부스럼이나 뾰루지가 자주 나서 부럼깨기,
귀앓이를 피하기 위한 귀밝이술(耳明酒)은 다소 해학적이고
다소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보름 전날인 14일 저녁에
오곡밥과 나물을 하고 귀밝이술과 호두 땅콩을 준비하여
가족이 둘러 앉아 먹었었는데 남부 지방에서는 보름날인 15일에
가족적인 대보름 행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옛 문헌에도 상원절 풍습은 대보름 전날과
당일로 이루어 진다고 되어 있으니 별 무리가 없겠다.

오늘 아침에 아내가 내게
“일찍 집에 돌아오면 시장에서 동태 한 마리 사다 놔 줄래요”
하길래
“당신이 들어 올 때 사오지 그래?”
했더니
늦게 들어 와서 찌개를 끓이려면 동태가 녹는 시간 때문에
식사준비가 늦어지게 된다고 하여 ‘그러마’ 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어머님의 지휘아래 보름 음식을 장만하곤 했는데
20여 년 어깨너머 배운 솜씨로 오곡밥과 나물,
그리고 동태찌개를 끓인다니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고
그나마 둘이서 엊저녁에 근처 대형 마트에 가서 오곡을 사고
취나물, 숙주나물 등 야채와 짭짤한 김을 사서 준비해 두었으니
삶아서 무치고 오곡밥과 얼큰한 동태찌개만 끓이면
훌륭한 대보름 식단이 마련될 터였다.

저녁 7시가 다 되어 꽝꽝 얼어서 커다란 눈이 풀린
동태 한 놈을 빨리 녹으라고 물에 담그어 놓았다.
‘더딘 봄도 이렇게 녹이면 안될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
슬리퍼를 끌고 귀밝이술을 사러 동네 슈퍼로 갔다.

그런데 작년과는 다르게 슈퍼 진열장에 막걸리가 그득 있다.
작년 이때쯤 귀밝이술을 사러 왔을 때는 다 팔리고
두어 병 남은 걸 어렵게 구할 수 있었던 슈퍼인데……

값을 치르며 평소 면식이 있는 주인 아줌마에게 물어 봤다.
“아줌마. 올해는 어떻게 막걸리가 저렇게 많이 남았어요?
작년에는 몇 병 안 남았더구먼, 작년에 막걸리가 딸려
더 많이 들여 놓은 거예요?” 했더니
“올해도 작년만큼만 들여 놨는데 올해는 잘 안 나가네요.
아마 경기가 작년보다 더 나빠져서 사람들이
보름이고 오곡밥이고 귀밝이 술이고 그냥 넘어 가려나 봐요.”
하길래
“그래도 설마 막걸리 한 병이 얼마 한다고
귀밝이 술도 안 마시고 보름을 넘기려고요?”
하고 집으로 돌아 오면서 장터를 둘러 보았다.

시장 곳곳에 가게마다 나물에 오곡에 부럼에
평소의 주 상품을 뒤로 하고 전방에 비치되어 있다.
주 대보름 상품인 오곡도 손님 취향에 맞게
작은 비닐 봉지에 조금씩 가지 수 대로 담은 것들과
아예 오곡을 섞어 놓은 것, 불려 놓은 콩까지 다양 하다.

이곳뿐만 아니라 동네 슈퍼나 대형 마트나
백화점 어디에도 어제 오늘은 대보름 관련 상품이 넘쳐나고
심지어 도로의 곳곳 노점이나 노상에도 가을 들녘처럼
곡식과 나물을 펼쳐 놓고 팔고 있는데
대보름 서민들의 가슴은 이렇게 꽁꽁 얼어 있으니
상원절 맞이 특수는 상인들 가슴에만 커다란 만월을 그리다
모레 아침엔 암울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게 아닌가 걱정해 본다.

8시가 되어 허겁지겁 들어 온 아내가 외출복도 갈아 입지 않고
마치 전투를 하듯 주방으로 들어 간다.
나는 아내의 수고를 덜어 주려고 미리 무우를 깨끗이 씻어서
토막 내어 놓고 대파와 양파, 그리고 고추를 다듬어서
가지런히 도마 위에 올려 놓았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해요. 도움 필요하면 말 하고.”
했더니 혼자서 해도 괜찮다고 한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와 TV를 켜고 중국과 일본의
축구 시합을 보고 있는데 아들도 귀가해 슬그머니 옆에 앉는다.
혼자 한다던 장담과는 달리 잠시 후 나를 불러 내더니
“참기름 좀 딸아 줘요, 고춧가루 좀 찾아 줘요,
고추장 좀 한 숟가락 떠다 줘요, 간장 병 뚜껑 좀 열어줘요.
불 좀 줄여 줘요. 소금 좀……” 별의 별 주문이 많다.

방에서 축구경기가 끝나갈 즈음 동태는 무우를 깔고 누워서
갖은 양념으로 화장을 하며 구수한 향수를 냄비 밖으로 내 뿜는다.

셋이서 둘러 앉아 오곡밥에 나물반찬 등으로
대보름 만찬을 하는데, 아내는 제대로 실력 발휘가 안 됐다고
다소 안타까워한다.
그래도 어머님 맛은 안 되더라도 꽤 맛있고
찰지게 오곡밥이 잘 되었는데 말이다.
“에그~ 괜찮은데. 으응 맛있어. 이 정도면 엑설런트인데.”
라고 하며 아내의 음식 솜씨를 추겨 주었다.

사실 인스턴트에 길들여졌고 손끝의 맛을 잃어 버린
요즘 주부들의 솜씨가 전문가인 예전의 어머님 같은
손끝 솜씨만 하겠는가?
이 정도면 훌륭한 솜씨인 것이다.
다행히 나는 우리 때나 요즘 젊은이들이 청혼할 때 말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줄께’ 라는 약속은 안 했으니
이 정도라도 아내의 손맛을 볼 수 있는 것 일거다.

모르긴 해도 청혼할 때 그렇게 약속한 부부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인스턴트 식품만 먹으며
식기나 수저도 일회용만 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주방에서 항상 고무장갑을 끼거나
그도 아니면
‘내가 언제 그런 약속 했나? 그 약속 결혼 시점에서 모두 무효야.’
‘그 약속 예식장에 반납하고 왔어.’ 하면서
불독 만난 치와와처럼 꼬리말고 방으로 또르르 굴러 들어 갈 거다.

맛있게 오곡밥을 먹고 보니 싱크대에 설거지 감이 장난 아니다.
아내는 항상 음식을 할 때 그릇 그릇 벌려 놓기를 잘한다.
살림을 꽤 잘하지 못하는 여인들의 특징이다.
오늘따라 그 높이가 백두산은 안 되더라도
관악산 연주봉 만큼이나 높이 쌓였다.
그것도 고추장 찌꺼기와 오곡밥, 나물 찌꺼기가 엉겨서
제대로 단풍 든 가을 관악산을 조화롭게 연출하고 있었다.

고무장갑을 찾는 아내의 귓바퀴 뒤에 대고 말했다.
“설거지는 내 버려 둬. 남북한 축구경기 전반 끝나고 내가 할께.”
하니 단호하게
“아니야. 그냥 내가 할께요.”
하면서 대답과는 달리 몸은 얼른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답삭 앉아버린다.
‘에구~ 저런.’

축구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 타임.
경기는 1대 0으로 한국이 이기고 있다.
북쪽 땅에서도 지금쯤 대보름을 저녁을 즐기려
주부들이 식탁을 준비하리라.

부지런히 손을 놀려 세제를 잔뜩 머금은 수세미로 그릇을 닦고
식기에서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헹궈 건조대에 올려 논다.
까짓 것 설거지야 군 시절 통신학교에서 3개월 동안
식기 당번으로 숙련된 솜씨이니 별로 힘들 것 없다.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와 옥상에 올라가니
오늘도 보름달이 곱고 맑은 게 크기도 강호동 얼굴만 하다.
올해는 강호동의 커다랗고 넉넉한 풍채처럼,
그의 넓은 가슴처럼 이 나라의 모든 가정에
행복이 달덩이만큼 가득 차리라 생각을 해 본다.
아니,
억지로라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달님에게 떼를 써본다.
그러면서 둥근 달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내 어릴 때 대보름 추억의 한 조각을 찾아 본다.

어머님의 오곡밥을 일찌감치 실컷 먹고 맹꽁이 배를 앞세워
동네 형들을 따라 이집 저집 다니며 오곡밥과 나물을
한 소쿠리 얻어 가로등 아래에 퍼질러 앉아 나눠먹고
보름달을 쫓아서 인근의 공터로 간다.

형들이 장작을 모아 불을 놓고, 깡통을 적당히 못질하여 뚫고
철사줄로 길게 손잡이를 만들어 논 불놀이 깡통에
벌겋게 성내는 불씨와 함께 나무 조각을 잘게 잘라 넣어
원을 그리며 뱅뱅 돌리면 깡통불은 어지럽다고
‘쉬익 쉬익’ 거친 숨을 몰아 쉰다.

그러다 추위 속에서 따스한 불꽃이 깡통에 활짝 필 때쯤
우리는 일제히 허공을 향해 깡통을 던진다.
제 멋대로 개구리 뛰듯이 하늘로 올라간 깡통들은
달을 향해 윽박지르듯 밤하늘을 날아 올라가다가
이내 주황색 꽃씨를 허공에 ‘컥 컥’ 뱉어 가며
어두운 밭고랑에 곤두박질 친다.
마지막 ‘파~악’ 하는 비명과 한줌의 피를 사방에 뿌리며……

어릴 적 내가 살던 영등포는 서울이라도 변두리라서
동네에서 조금만 나가면 논과 밭이 있었고
커다란 벽돌공장의 벽돌 건조하는 공터가 있어서
시골 못지 않게 아이들이 대보름을 즐겼었는데,
단지 쥐불이용 나무를 구하기가 시골 보다는 다소 어려웠었다.

그 시절 집 앞에 가로 세로 일 미터 가까운
콘크리트 쓰레기통이 생기기전에 각 가정의 쓰레기통은
나무 사과박스가 그 역할을 대신 하고 있었다.
과일을 담아 상품으로 파는 사과박스는 나무로 짜서
잔뜩 넣은 왕겨를 스티로폼 삼아 사과 등 과일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갈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사과박스는 불을 때기에 최고로 적합한 재료라서
당번을 정하고 목표물을 정해서 서리(훔쳐)해 왔는데
그 목표물은 대부분 도둑질 당번의 자기집 쓰레기통이었다.

밤이 지나고 대보름 아침이면 어머니가 사라진 쓰레기통에
‘어떤 놈들이 우리 집 쓰레기통을 훔쳐 갔냐’ 고
큰소리로 화를 내시면, 우리들 작은 가슴은 지난밤 지은 죄에
콩딱 콩딱 뛰었지만 그것도 잠시
어머니는 이내 화를 가라 앉히고 평소의 얼굴로 돌아 가신다.
이미 범인을 짐작으로 알고 있으나
대보름의 풍습으로 인정 하시고 더 이상 추궁을 안 하신다.
더군다나 가족의 일년 무사 안녕을 위해 한강으로
방생을 가셔야 하는데 노여운 마음으로
어찌 부처님에게 발복을 기도할 수 있으리.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보니
전하는 옛 말에 ‘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
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은 좀생이 별을 보고 농사를 짓고,
우리나라 사람은 달을 보고 농사를 짓는다’ 라고 한단다.

이제 내가 본 올해의 상원에 이렇게 달이 크고 밝으니
밖으로는 우리나라의 국운도 크게 번성하여
좀생이 같은 중국인들의 대륙은 물론
세계 곳곳 오대양 육대주의 깊은 곳까지
대한의 커다란 웅지가 저 달과 같이 밝게 빛나리라 생각하고,

작은 소원이라면
‘대보름은 질병과 재앙을 밀어 내는 밝음의 상징’ 이라 하니
이제는 보름달을 보며 가족과 형제들의 건강과 행복과
아버지의 건강, 그리고 그 시절 자애로웠던 어머님이
병상에서 나마 평안 하시고 여유롭고 밝은 마음으로
후생을 기다리시길 빌어 본다.

2008년 2월 21일(음 1월15일) 대보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