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한영택
ㆍ작성일	2024-03-03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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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에서의 봄날

청산도에서의 봄날

한영택

2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고 푸른 바다, 산, 구들장 논,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져 2007년 아시아 최초 솔로 시티로 지정된 아름다운 섬 청산도. 밤사이 내리던 비가 이른 새벽에 멎었지만,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고 흐려 밝은 햇살을 기대하기 어려운 날씨다. 친구들 모두 직장에 매인 몸이라 가장 좋은 시기에 맞추기는 어렵다. 휴식이 필요한 나이지만 아직은 일을 해야 하기에 어쩌다 한 번씩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없이 짜릿하다. 오늘은 길이 멀고 빡센 하루 일정이라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에 나선 섬 나들이에 마음은 즐겁다.

광주 방향 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버스에서 잠을 청하며 가는데, 광주에서 국도를 타고 완도로 기는 중 안개비가 내렸다 멎었다 반복한다. 배를 타야 하는 데 지장은 없을까? 했지만, 다행히 바람도 없고 낮에는 비가 그친다는 일기예보에 안심하고 완도에 당도하자 햇살이 비친다. 여객선터미널엔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이 청산도로 가는 거 같다. 이윽고 부두에서 배가 떠나자 멀리 또는 가까이 작은 섬으로 해무가 운치를 더하고 있다. 잔뜩 낀 구름에 하늘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반복한다.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거리는 19km 50분 정도 배를 타고 청산도에 당도 하선 후 곧바로 항구 앞 대기하고 있는 마을버스를 탔다.

오늘은 청산도 솔로길 11코스 중 낭길 코스로 보적산 → 범바위 → 권덕리 → 낭길 → 구장리 → 읍리 → 당리(서편제 촬영장) > 도청항이다. 10분 뒤 청계삼거리에서 내려 보적산을 오른다. 보적산 높이(330m)는 얼마 안 되지만 정상까지 오르막의 연속이다. 편백나무가 등산로 주변을 감싸고 있어 제법 괜찮은 느낌이다. 오전 10시~12시 사이에, 나무숲에서 뿜는 피톤치드가 가장 왕성하다고 했던가? 맑은 공기에 숲속을 걸으니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정상에 다 왔을 무렵, 왔던 길 아래를 내려다보니 운무가 뒤 덥혀 멀리 산봉우리만 보이고 비치는 햇살에 장관을 연출한다. 어쩌면 맑은 날에는 볼 수 없는 광경을 비 온 뒤 산을 오르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은 거 같다.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범바위로 향한다. 범바위는 바위를 향해 포효한 호랑이가 자신의 소리보다 크게 울려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다는 생각에 놀라 섬 밖으로 도망쳤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바로 옆 보적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자철석 성분이 아주 많아 옛날 청산도를 찾아오는 배들이 주변 해안에서 나침판이 먹통이 돼 헤맸다고 하는데, 生氣福德(생기 복덕) 한다고 기가 모여지는 이곳에 기를 받으러 범바위를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말탄바위로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니 남쪽 해안으로는 해무가 가득 바람 따라 끼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앞으로 가야 할 낭길 쪽으로 붉은색 바위가 보인다. 아래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니 해변 근처에 큰 소나무 아래 탁자가 놓여 있고 객들이 쉬어 갈 공간이 있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밥을 먹었다. 잠시 후 권덕리 마을회관을 지나는데 가이드와 일부 여행객은 걷지 않고 차편으로 서편제마을로 간다고 한다. 그냥 보내고는 친구 세 명과 본격적으로 낭길 코스로 접어들었다.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벼랑길 아래로는 공룡알 같은 몽돌이 촘촘히 널려있고, 철분이 다량 함유된 붉은색 벽바위가 즐비하다. 산길 옆 한쪽엔 야생 난초가 꽃을 피우고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 고목 사이로 멀리 바다 위로 해무가 떠 있는 풍경이 운치를 더한다. 구장리에 다다르자, 해변에는 무더기로 쌓여있는 커다란 몽돌이 자연의 신비함을 더하고 썰물로 빠진 자리에 동네 아낙은 해산물 채취에 여념이 없다.

읍리 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얼마 만인가? 푸른 청보리가 바람결에 넘실거리니 옛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적엔 보리밭에 밀밭에 봄이면 푸른 들판이 가득했는데, 요즘은 이런 곳 아니면 보기가 어렵다. 학창 시절 보리 베기며 모내기며 농촌일손 돕기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기에 추억을 소환하는 의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차도로 걸어가던 중 마을 어귀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00년 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한참을 걸어가서야 당리 서편제마을 표지판이 보인다. 좁은 샛길로 내려가 정겨운 돌담길 사이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유채 꽃밭이 객을 맞는다. “봄의 왈츠” 세트장에 “서편제”와 “여인의 향기” 촬영장이기도 한 이곳 주변 풍경이 너무도 아름답다.

황톳길 사방으로 노랗게 핀 유채꽃이 널브러져 시간을 멈추게 한다. "여인의 향기" 표지판 바로 아래 초분(草墳)과 서편 바다로 엄청난 면적의 전복양식장 바라보며 망중한에 빠져본다. 다행히 평일이라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많지 않은 관계로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공간적 여유를 가질 수가 있었다. 장소가 너무 좋아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으로 꼽혀 5분 30초에 걸친 긴 테이프로 “서편제”가 촬영된 곳. 1993년 작 임권택 감독의 소리꾼 음봉의 의붓딸 송화와 “진도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던 길을 걷다 보면 “느림”의 섬 청산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서편제 가락처럼 잔잔하게 마음에 담아진다.

많은 객을 불러들이고 기쁨을 선사하는 유명 관광명소엔 어디를 가도 사람의 손길이 안 가는 곳이 없음이라. 평온한 것 같지만 곳곳에서 분주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게 꾸며지는 것 같다. 삶의 현실을 보는 순간이다. 10km를 걸었으니 조금은 지친 듯 털레털레 출발점인 도청항까지 돌아왔다. 막간의 휴식 시간을 틈타 청산도의 주 특산물 전복과 해물 한 접시로 친구들과 소주 한잔 걸치며 여정을 마무리한 소확행 하루였다.

23.04.19

청산도 솔로길 11코스: 1코스 미향길, 2코스 사랑길, 3코스 고인돌길, 4코스 낭길 5코스 범바위길, 6코스 구들장길, 7코스 돌담길, 8코스 해맞이길, 9코스 단풍길, 10코스 노을길, 11코스 미로길

生氣福德: 자연 상태의 음이온이 가장 많이 방출되는 곳이라는데, 生氣는 활기를 불어넣고, 福德은 재물을 상징

서편제 촬영지: 한국영화 사상 1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임권택 감독작품 “서편제” 촬영지로 극 중 송화(오정혜)가 남도민의 정가 담긴 진도 아리랑을 애절한 소리로 노래한 민족 고유의 향토색 짙은 장소다. 영화진흥공사에서 주최하는 제31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신인 여배우 주연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고, 중국에서 개최한 제1회 상해영화제 본선 부문에 진출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서편제는 광주, 강진, 보성, 해남, 진도지방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애절하고 섬세한 소리로 여성적인 반면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 지방에서 내려온 웅장하고 호탕하며 상쾌한 남성적인 소리가 특징이다.

초분(草墳) :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도서 지역만의 특수한 여건이 반영된 독특한 묘제로 망자가 발생하면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솔가지와 볏짚으로 가묘를 만든 다음 보통 3년이 지나면 파분하여 본장하는 이중장제(二重葬製)이다.

북한산 숨은벽능선을 오르다.

3년 만에 뛰어 본 질주 본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