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히면 뚫어야지, 꼬챙이로!

시인/ 수필가 김 락 호

가을!

가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아 다 이야기 하려면 아마 한권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을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여행을 하고 싶고, 청아한 가을 하늘의 코스모스를 보면, 첫 사랑 그 여인이 생각난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쓸쓸함과 함께 지금 함께 하고픈 그리운 여인이 생각나고, 이런 날에는 책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가까운 산책로에 나가 낙엽이 떨어지는 벤취에 앉아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기는 고독한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의 먹을거리였다. 산과 들에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먹을거리였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군것질 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산에 가서 머루와 정금, 으름 등을 따먹기도 하고, 산밤을 주어 앉은 자리에서 생밤으로 먹기도 했던 시절. 시금털털한 정금을 따서 주머니에 넣고, 넘어지고 장난치다 보면 어느새 보랏빛 물이 성글성글 들어 어머니께 빗자루로 맞아야 했던 그때의 가을.

지금은 김치로만 먹지만, 그때는 길가에 있는 밭에 몰래 들어가, 무를 하나 뽑아 손톱으로 껍질을 까서 먹기도 하고, 배추 속잎의 달큼한 맛에 속잎만 뜯어 먹고 덮어 놓기도 했었다. 그때 시절에도 최고의 먹을거리는 역시 감이었다. 마을 어느 집에 단감나무가 있으면, 흙담에 올라가 단감을 따다 주인에게 들켜 작대기로 맞기도 하고, 떨어진 떪은 감을 주어다 된장에 우려서 떫은맛을 없애고 먹기도 했다. 가을의 추억은 이리도 많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풍경은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어디선가 날리는 낙엽이 유리 창가에 슬쩍 내려앉는다. 참 멀리도 왔구나.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내 가슴을 스치는 듯 쓸쓸함이 밀려들 때쯤이었다. 책상에 놓아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시골에 있는 집으로 오란다. 고기를 구워 먹게 점심을 먹지 말라며 지금 오고 있느냐며 재촉을 한다. 그러지 않아도 갈 곳도 별로 없어 가을 풍경이나 구경하러 갈까 하던 참이었는데 반가운 전화가 온 것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에서 30분쯤 걸리는 산으로 향했다. 그동안 바빠서 열흘 만에 가는 길인데도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경이다. 청옥빛 하늘과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처럼 생동감 넘치는 산과 들이 타는 듯 열정을 보여준다.

도착한 집에는 이미 동생이 숯불을 피우고 제수씨는 주방에서 밥을 하고 어머니는 텃밭에 심어놓은 상추를 따고 계신다. 따스한 햇살, 춥지 않을 만큼의 바람, 일상적이지만, 가장 평범함이 살아가는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님 식사하세요. 라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자 마당에 차려진 먹을거리는 돈 많은 부자들이나 하는 파티처럼 호화스럽다. 소고기는 부위별로 있고, 밥은 내가 좋아하는 잡곡밥이다. 혼자 사는 형을 늘 챙겨 주는 동생과 제수씨가 고맙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아서 만들어 주시는 어머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행복한 마음까지 더해져 몸과 마음이 이 가을처럼 풍요롭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남의 살을 내 살로 만들며 즐거운 시간의 공간 속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나에게 동생이 “형님 감 따러 갑시다.” 하는 것이다. “무슨 감?” “엄니가 감 따서 곶감 만들래요.” “잉 뭔 곶감.......” 가만히 생각해보니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감을 따기로 했다. 미리 준비해둔 감 따는 장대와 소쿠리를 들고 동생과 나는 집 주변에 있는 감을 따기 시작했다. 2그루의 나무에서 감을 따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의 감을 딸 수 있었다. 어머니와 제수씨는 감을 깎기 시작했고, 나와 동생은 감을 줄에 매달기 시작했다. 이번 설 때는 곶감 안사도 되겠다 이거로 제사 지내면 되겠는데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나는 웃음이 입가에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생이 “형! 뭐 좋은 일 있어?” “뭘 그렇게 싱글거려?” 동생의 질문에 나는 “야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께.” 어머니도 잘 아시는 이야기다.

유년시절의 이야기였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아마도 예닐곱 살 정도쯤이 아닐까 싶다. 내 위로 누님이 한분 계신다. 어린 시절 이야기니, 꽤 오래 된 이야기다. 그때는 지금처럼 깊은 가을이었다. 그때도 어머니께서 집주변의 감을 따러 가셨고, 어머니는 감을 따시고, 나와 누님은 떨어지는 감을 주워 담는 일을 했다. 떨어지는 감 중에는 홍시도 있고, 절반 정도 홍시가 된 것도 있었다. 누님과 나는 서로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하루만 놔두면 홍시가 되는 감 까지 서로 경쟁하듯 먹어치우기에 바빴다. 감을 줍는 것인지 먹는 것인지 절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절반은 바구니로 들어가는 일은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물론 종일 허리를 굽히고 오리걸음으로 감을 주어야 하는 막노동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먹을 수 있는 행복에 가려져 그리 힘들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날 밤은 노곤함에 누님과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무렵...

누님이 푸세식 변소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왜 우느냐고 물어 봤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내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변소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내 큰 울음으로 울고 말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조금 조용해지나 싶더니, 어머니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등을 때리는 듯 짝! 짝! 소리가 나기도 하고, 아 조금만 더 참어 봐! 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도 들려왔다. 궁금함에 문을 열고 변소 옆으로 다가갔다. 누님은 손을 바닥에 짚고, 엉덩이를 살짝 위로 들고 울며 큰일을 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작은 막대 꼬챙이를 누님에게 들이대고 뭐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궁금해서 가까이에 다가갔다. 참 이상하다 싶었다. 엉덩이가 아픈데 왜 꼬챙이로 콕콕 찌르는 것일까 싶어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어머니 등 뒤로 다가가 보았다. 아뿔싸! 누님이 큰일을 보고 싶어 하는데 너무 단단한 변이 그만 자그마한 항문을 뚫고 나오지를 못하는 것이 아닌가. 곧 찢어질 듯 팽창해 있는 항문은 뻘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이 너무 웃겨 그 자리에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어머니께서 잠깐 도움을 주니 이내 무난하게 볼일을 끝내기는 했지만, 누님은 며칠 동안 방안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철없는 나이였던 내가 온 가족이 있는 방에 들어가, 누님의 모습을 흉내 내기도 하고, 누나만 보면 놀려댔으니, 누님은 어린나이에도 창피하여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재미있는 추억으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누님의 고통은 아마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누님이 사춘기가 되고, 나 또한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 이야기는 추억 속으로 묻혀 버렸었다. 그런데 불현듯 그때의 이야기가 떠올라 입가에 미소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 또한 이제 서서히 나이라는 것을 실감할 때가 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얼굴이 약간 상기된 듯 했다. 사실은 동생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머쓱해했다. 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을 법도 하다. 피죽도 어려웠을 만큼 가난했던 시절. 몸에는 지방기가 하나도 없는데 거기에 떫은 감을 먹으면 떫은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그나마 수분을 모두 흡수해 버리는 모양이다. 지금 세대야 고기는 싫어서 먹지 않는 세대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난한 시절에는 보리밥도 배부르게만 먹으면 소원이 없었던 시절이고, 굶지 않은 것은 복이라 했으니 말이다. 그런 시절에 먹을거리라고 해봐야 열매와 과일, 풀뿌리가 전부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섬유질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섬유질의 찌꺼기가 수분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어머니와 제수씨가 감 깎는 것을 마무리했다. 나와 동생도 줄에 감을 꿰는 것을 마무리 하고, 손을 씻고 마루에 걸터앉으니 동생이 빨간 홍시 하나를 건넸다. 금방이라도 툭 터질 것 같은 맑고 투명한 껍질이 빛이 나는 듯하다. 나는 빨간 홍시를 입안에 넣고 깨물었다.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감의 속살이 추억을 한 아름 안고 입안으로 감겨 들어왔다. 아무리 군것질거리가 많아도 쌀쌀한 가을날 툇마루에 앉아먹는 감보다 더 좋은 군것질거리는 아직 없는 듯하다. 추억이라는 행복한 마음을 가득 담은 군것질거리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기에 최고의 주전부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올 가을은 또 누군가의 삶의 바탕이 되는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으련만, 추억만으로 살아가기엔 아직은 그래도 젊은 나이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