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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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2009-02-28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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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 묻은 사랑/ 김락호
시간 속에 묻은 사랑
시인/수필가/김락호

메마른 낙엽들이 차디찬 아스팔트위에 쓸쓸하게 뒹굴던 가을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하며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아쉬움과, 그래도 조금은 뿌듯함이 남아 있기도 하다.

지난 계절을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명사에 대한 생각에서 멈췄다. 과연 사랑이란 인간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의 사랑. 누군가가 그랬다. 문학에서 사랑이 끊임없는 명작이 되고 있음은 실존하지 않는 이상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난 그 말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 사랑은 실존하는 감정이며, 그 위대한 사랑은 어디서든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혼자만의 생각과 사색에 빠져 친구와의 약속을 잊어버릴 뻔 했다. 난 조금은 서두르며 친구와 만나기로 한 진주로 출발했다. 진주로 가는 길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마치 하늘색 크레파스로 이제 막 그려 놓은 듯 산뜻하고 맑았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이젠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차가운 바람이 엄습해 왔다.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한 탓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라디오를 틀었다. 김광석의 노래 ‘사랑이라는 이유로’ 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진주에 도착하면 네 시쯤 될 것이고, 친구 놈을 여섯시에 만나 오랜만에 저녁을 먹기로 했으니 그렇다면 두 시간 동안 뭘 할까. 오랜만에 시간을 쪼개어 잠시 여유를 가지고 바람 좀 쏘여볼까 해서 출발했는데, 난감했다. 진주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참 생각하다 촉석루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오래전 연인을 만나러가듯 그녀가 있는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촉석루에 도착한 시간은 내 예상대로 네시였다. 진주를 대표하는 남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진주 남강 유등축제가 끝나고 남강에는 유등이 햇살에 반짝이며 둥둥 떠 있었다. 행사 진행 요원들이 그동안의 일정에 불을 밝히던 유등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일찍 왔더라면 환하게 빛나던 유등들과 남강이 멋지게 어우러진 모습을 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야만 했다.

입장권을 끊고 진주 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촉석루였다. 왜적들에게 진주 산성까지 빼앗기고, 일본장수들이 이곳 촉석루에서 기생들을 불러 축제를 열었던 역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했다. 이 나라 이민족이라면 함께 나눌 수 있는 아픔일 것이다. 왜장들에게 술과 웃음과 몸을 팔아야 했던 기생들의 그 아픈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다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이련가.

이제 촉석루는 그 모든 아픔과 흔적들을 뒤로 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과 함께 한 여인의 지극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고 있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촉석루를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몇 달 전 김별아 소설가가 쓴 논개를 읽어 본 적이 있다. 흔히 논개를 진주 기생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인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논개는 원래 기생이 아니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장군의 후실이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신혼의 단꿈을 잠시 접어두고 최경회는 전쟁터로 뛰어든다. 이에 논개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여인네들을 모아 의병들이 전투를 하는데 불편한 점이 없도록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진주성마저 함락되자 최경회를 비롯하여 전쟁을 이끈 장군들이 비통하고 분한 마음에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을 했다고 한다. 역사의 아픈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논개의 사당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논개의 영정은 일본인이 보수원을 짓고 적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와 논개의 영정을 봉안했던 것을 되찾아 온 것을 봉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영정 안에 논개는 가녀린 몸으로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으로 힘없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우리의 손으로 논개의 모습을 상상하여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이전의 논개 영정은 국립진주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화백이 그린 영정이 사당에 봉안되었다고 친절하게 사당 앞에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논개의 모습은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사랑 앞에 강한 여인이었다. 열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열정과 지금이라도 왜장이 눈앞에 있으면 또 다시 끌어안고 투신이라도 할 것만 같은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논개 영정을 다시 그리면서 논개를 강한 여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나는 이제 서야 논개가 단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여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를 한 여인으로 우리 곁에 찾아온 것 같아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나는 의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암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 23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깎아지른 듯 한 바위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원래 이 바위는 임진왜란 전에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危巖)이라 불렸었는데 논개가 이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후 의리를 세운 바위라 하여 의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죽은 후 논개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쟁에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리 던 날, 기생으로 변장을 한다. 열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왜장을 유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몸을 던진 남강으로 그녀도 같이 따라갔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이던가. 아마도 논개가 아직까지도 우리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이유는 좋으면 쉽게 만나고 싫으면 금방 뒤돌아서서 헤어지는 요즘 시대에 한 사람을 향한 절개와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지혜롭게 그 사랑을 영원히 자신만의 사랑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논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노여워 마셔요, 나는 당신 없이도 남은 삶을 견딜 만큼 강합니다. 하지만 삶의 미련을 떨치고 당신을 쫓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나는 사랑으로 더욱 강합니다. 슬퍼 마셔요. 사랑은 내 부박한 생에 누린 최고의 호사였습니다…….”

진주시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남강에 매년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성 밖의 의병들이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전술을 사용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유등축제를 하는 날이면 전국에서 축제를 찾은 사람들이 소망 등 달기, 유등 달기 등으로 밤이면 남강에 각종 모양의 유등으로 그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하니 내년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축제를 찾으리라 마음먹었다. 아마도 논개와 최경회의 애뜻하고 가슴 아픈 사랑이 유등축제를 통해 환하게 다시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록 역사 속의 인물들 이지만 남강에 남긴 그 영혼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진실한 사랑은 문학작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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