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복분자


                        글/시인/ 수필가/ 김락호






가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풍잎과 은행잎이 울긋불긋 산을 물들이고 눈송이처럼 떨어져 바닥에 뒹굴더니 어느새 앙상하게 마른 가지만 남은 나무들만이 거리에 늘어서 있다. 아침에 비가 오더니, 비가 오고 나면 늘 그렇듯이 몸도 마음도 세상도 깨끗하게 씻긴 느낌이다. 가을이 저만치 물러가고 겨울준비를 하는 듯이 세상은 말끔하고 정갈하게 늙어가는 노인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런 날은 잠깐 산책이나 하고 집에서 겨울옷을 꺼내 차곡차곡 손닿기 쉬운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이 알맞다.






주말이고 어제 과음을 한 탓에 나는 아침부터 집에서 뒹굴뒹굴 방글라데시를 여행하는 중이였다. 마침 김장철이라 아침부터 김장을 한다고 근처에 사는 여동생이 놀러 와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두 모녀가 이야기꽃을 피우곤 늦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빠 아침 먹어야지.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대.”


“야! 남자가 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해장국은 못 끓여 놓았을망정 넌 왜 아침부터 말이 많냐”


“누가 그렇게 많이 마시래. 이그......”


그렇지 않아도 속이 쓰려서 어제 과음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터에 아침부터 동생이 바가지를 긁어대니 쓰린 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간신히 아침을 먹고 또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속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배추를 사러 시장에 가고 집안은 한적하였다. 아니 고요하다고 말해야 하나. 가장 시끄러운 건 부들부들 부대끼고 있는 내 뱃속이었다. 시계의 초침소리와 내 숨소리가 귓가에 가장 크게 들리자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말로 내 뱉으면 편했을 것을 꾹 눌러 참으시고 그렇게 늘 술로 마음을 달래여 하셨던 것일까. 아버지의 인생은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늘 술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한번 술을 드셨다 하면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건지 아님 술이 아버지를 술독에 빠뜨리시는 건지 모를 정도로 폭주를 하셨다. 그 중에서 가장 즐겨 하셨던 것이 복분자였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적 가끔 어머니를 복분자여사라고 철없이 놀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술로 세월을 보내시고 임종을 앞두시기 전 집안에 장남인 나를 앞에 두고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 너는 절대로 나처럼 술 먹지 마라’ 말씀 하시곤 눈을 감으셨다.






그 후로 우리 집은 술 냄새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꼭 아버지의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술을 못하였다.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고 온 몸의 신경 세포들이 뾰족하게 흥분을 한다. 그런데 어제는 마음도 허하고 거래처 박 사장이 술을 마시자고 하기에 응했을 뿐인데 내 주량에서 너무 과하게 마셔 버렸다. 나는 목이 타서 거실로 나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텔레비젼의 전원을 켰다. 내친 김에 커피도 한 잔 할까 해서 주전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중 신발장 선반 위에 동그란 유리병에 가득 담겨져 있는 술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에 웬 술? 눈에 확 띄었다. 유리병이 고급스럽고 예쁘게 생긴 대다가 사람도 아닌 저 조그만 술병이 내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술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속에 뭐가 있나? 아무리 봐도 술 밖에 없었다.






“오빠 뭐해! 와서 좀 들어주지 않고.”


때마침 어머니와 동생이 배추를 사들고 와서 현관 앞에서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겨울준비를 위해 우리 집에 등장한 파릇한 잎사귀들을 집 안으로 열심히 가져다 놓았다.


“ 엄마, 선반 위에 웬 술이야?”


“ 응. 저번 주에 니 고모 댁에 예식이 있었잖아. 그때 고모가 귀한 술이라고 일부러 가져왔다고 주더라.”


“고모도 참. 우리 집에 누가 술을 먹는다고 주셨대!”


“ 오빠! 내가 가져 갈 거야!”


시집가면 친정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가져갈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라고 하더니 벌써부터 동생이 점찍어 놓고 있었던 터였다.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날씨였다. 바람에 느낌은 가을인데 체온은 겨울이었다. 우리는 배추를 집안에 들여다 놓고 잠시 허리를 펴고 있는 사이 ‘쾅쾅’ 하고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 졌다. 신발장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술병이 갑자기 깨져서 거실 바닥과 우리가 힘들게 집안으로 날라놓았던 배추들 위에 쏟아진 것이다. 유리파편들이 여기저기 날카롭게 널려있고, 빛깔이 고운 빨간색 복분자가 하얀 거실바닥과 배추를 붉게 물들여 놓았다.


“어머나! 이제 무슨 일이래. 갑자기 술병이 왜 넘어져!”


어머니와 동생은 유리를 치우고 걸레를 가지고 와서 바닥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뻘쭘 하게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오전 내내 쓰렸던 속이 무감각하게 경직이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에 나는 냉수를 한 사발 벌컥 마셨다.


“ 야! 귀신이 그랬는가 보다.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 엄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이 서방이 꼭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내가 못 살아.”


“ 니들 아버지 있잖아. 복분자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죽어서 까지 마시러 왔나 보다”


옛날 분들이야 다들 그렇겠지만 어머니도 사람이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다는 설과 미신을 믿는 양반이었다.


“ 엄마, 그런 게 어디 있어! 엄마가 잘못 올려놓았나 보지”


죄지은 놈이 성을 낸다고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조금 짠하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뭔가 꾹 하고 가시가 들어와 뒷목을 뻣뻣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구남매를 남겨두고 가신게 이 복분자 덕이였나봐”






나는 복분자가 남자들의 정력에 좋다는 말로 그저 이 사건을 재치 있게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또 정곡을 찌르셨다.


“그러기에 어제 술 좀 작작 마시지. 이놈아!”


“왜 그러세요. 복분자 여사~”


나는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엄마를 놀리곤 걸레를 가지고 와서 같이 바닥을 닦았다. 동생은 오랜만에 듣는 내 말이 재미있는지 한바탕 웃어 댔다. 걸레도 빨간 복분자로 물이 들고, 내 마음도 복분자에 취해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아버지도 지금 나처럼 그랬을까.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이 느낌. 내 마음이 내 마음같이 되지 않아 술로 이기고 풀어버리려 했었던 것일까!






우리는 유리파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추 10포기를 버려야만 했다. 그날에 김장은 복분자 냄새에 취해 어떻게 했는지 모르시겠다고 어머니는 말씀 하셨다.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혹은 여러 번 이런 일은 하면 안 된다. 이런 행동은 하지 마라. 저 사람은 너의 짝이 아니다. 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이런 말들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 하지 말라고 하고 왜 아니라는 거지? 이런 의문만 가지게 되고 청개구리처럼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어지고 호기심만 앞섯다. 가방끈의 길이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묻어나는 연륜에서 직접 경험해보고 당부하는 일들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직접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깨닫지 않는가. 그날에 사건은 나에게 “하지 마라” 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