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날 풍경

가을이 오면 가을앓이가 시작됩니다. 가을은 변덕이 심한 여인네 마음 같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싸늘하다가도 한낮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뜨거운 온기를 뿜어댑니다. 물물이 갈바람이 살며시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 대곤 합니다. 갈 옷으로 곱게 치장한 여인이 유혹의 손짓을 하염없이 보내오는 듯합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못 이기는 척, 가을 여인의 손길에 이끌려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픈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가을을 고독의 계절이라 말하고, 혹자는 낭만의 계절이라 고도 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막연히 그리워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소슬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뭇사람의 가슴을 괜스레 울려놓곤 합니다.

가을날의 눈물

새초롬히 노닐던 해는

시름을 벗어 놓고
추억만을 챙겨서
산허리 구비 돌아 힘겨운 걸음 딛고
땅 그림자에 먹혀가는
저물녘 가을날은 숨을 고른 후
산등성에 걸린 달에 얹혀 떠날 즈음
가을밤을 갈라놓는
애끓는 풀벌레 울음소리
눈시울이 뜨겁도록
가슴을 마구 후벼 파며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린다.

가을 하늘은 푸르르고 높아서 사색에 잠기는 그리움을 모조리 밀어 넣으면, 물밀 듯이 살가운 얼굴이 하르르 피어납니다. 옛적에 영영 떠나가신 그리운 님이, 쪽빛 하늘 강물에 하얀 조각배를 띄워 타고, 유람을 왔다가, 옛정을 못 잊어 못 잊어서 눈물을 떨어뜨리면, 전신에 번져나는 미묘한 파장이 요동쳐,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듭니다. 가을 하늘은 그리운 사람의 얼굴까지도 곱게 담아 놓습니다. 가을 하늘은 사람의 마음까지도 시리도록 푸르게 물들여 놓습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사색에 잠겨 한량없이 즐기던
한 조각의 그리움마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외로움에 주린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디 맑아서
손닿으면 와자작 정적이 깨어져
얼룩진 눈물을 씻길 듯이
왈칵 흘러내릴 것만 같은
쪽빛을 띤 물결이 찰랑대누나.

발그레 터지기 시작한 가을 햇살은, 사람들의 가슴에도 갈꽃을 피우기 위해 부산을 떨며, 온몸을 사르고 있나 봅니다. 가을바람에 서걱대는 억새의 노래는 누구를 위한 전주곡인가요. 눈물을 흘릴 시간마저 없는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가슴에 차곡차곡 담아 놓은 눈물을 터뜨리려는 것은 아닐까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억새의 울음에 동요되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저마다의 가슴을 울려놓는 억새의 울음소리는 가을날을 흥건히 울려놓고 맙니다. 가을날을 울려놓은, 억새의 울음소리 따라 가을날은 울다가 잠들고, 울다 잠들다 하기를 반복합니다. 가을바람 따라 출렁이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억새의 몸부림치는 울음에서 오나 봅니다.

억새의 몸부림

살짝 스치는 바람결에도
바지런히 반응하는
억새의 몸부림은
누구를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하염없는 몸짓인가
갈 바람에 일렁이는 춤사위는
그립다고 외롭다고 보고 싶다고
자지러지는 억새의 울부짖음이런가
늦가을날을 은빛으로 흩어 뿌리며
뭇 님들의 가슴을 흔들며
갈색 추억에 젖게 하는구나.

모진 고초 홀로 삭혀가며 새벽이슬 눈물 내려받아 피어나는 들국화 뭇 꽃들이 향연에도 끼어들지도 못하고, 세상의 모퉁이에서 있는 듯이 없는 듯이, 머물러 있다가, 긴 기다림 끝에, 처연히 피어나 청초한 꽃을 피워, 가을날을 밝게 밝히는 들국화의 향기가 진하도록 향기롭습니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에게 들국화는 화사하게 다가섭니다. 한낱 잡초에 지나지 않는 잡풀인가 하였더니, 영글찬 가을 들판처럼, 넉넉한 품새를 내어주는 진정한 꽃이 들국화입니다. 서럽게 피어나 시린 날씨에 이울어가는 들꽃화의 눈물이 우리네 삶인듯하여 가슴이 아려옵니다.

들국화의 눈물

시름겨워 오시는 우리 님
고운 걸음걸음마다
그윽한 향기 피워 놓고
어서 님 오시라
공손히 마중하는 애절한 기다림을
질투라도 하듯
찬이슬과 매서운 서리가
애달픈 가슴에 침범하여
가녀린 몸을
조각조각 편편이 훑어 내리면
애처로운 모습으로
싸느랗게 식어가는 눈물
서러워서 어이하나
가여워서 어이하리.

창밖 갈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님이 오시는 기척으로 들립니다. 오래전에 떠나간 님이 가을 초입으로 걸음을 놓을 거 같아 마중하고픈 충동이 절로 드는 가을입니다. 가을날에 새로운 누군가 와도 만나 대화를 나누고픈 계절이기도 합니다. 가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가을 속을 거닐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오랜 지기였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가을에는 그 누군가가 오지 않을지라도, 막연한 기다림으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가을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머물기에 너무 짧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석별의 정을 나누느라 늦가을 날은 온통 눈물바다입니다.

낙엽 밟는 소리

인제 그만 떠나야 한다며 매달리는
추풍(秋風)을 잡고
지난 시절을 되새김질하다
붙잡고 있던 시간을 놓아주면
계절의 어귀로 종종걸음 뗄 때
서걱서걱 낙엽 밟는 소리는
떠나가는 가을을 불러 세우는
구슬픈 목소리 같아
가던 길을 뒤 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아쉬움에 애연히 눈물짓누나.

가을 햇살을 따먹으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번져나 단풍 든 눈물은 하나둘 떨어집니다. 가을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는 일 없이, 사랑하는 계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을 이별은 너무 가혹합니다. 살가운 사람의 숨결을 오래오래 느끼고픈 가을입니다. 함께하기에 너무 짧은 가을이기에 슬픕니다. 늦은 가을날은 모두가 훌훌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진 듯합니다. 텅 빈 가슴은 허허로운 들판이 됩니다. 가을이 들면 혹독하게 가을앓이를 치르곤 합니다.

홀로 남겨진 외로운 날

모두가 떠나가고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운 날에
뒤늦게 찾아 나서는
때 늦은 걸음은
떠나간 발자취를 따라잡을 길 없음에
목쉰, 메마른 울음으로
정처 없이 헛걸음치다
갈 곳을 잃어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다볼 때
흐리시 산기슭 굽이진 길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애달파라.

주) 주응규 2 시집 “삶이 흐르는 여울목”에 실린 연작시 “늦은 가을날의 풍경”을 삽입하여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