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

오늘같이 열대야로 몸살을 앓는 밤이면 고향의 우물가에서 등목이라도 하면 더위가 가실 것 같다. 유난히도 무더운 여름이다. 30도가 넘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의 연속이다. 살인적인 더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밤에도 열대야 현상이 연일 되니, 가정마다 에어컨 가동이 전에 없이, 급격히 사용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전기세 누진제가 이슈로 떠올라 서민의 심적 더위를 한층 더 끓여놓는다. 폭탄 전기세 걱정으로 여느 집인들 마음 놓고 에어컨을 돌리겠는가? 폭탄 전기세 걱정에 간간이 더위를 잠시 잠깐 식힐 만큼만, 에어컨을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낮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은 콘크리트화 된 도심의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모르고 고단한 몸을 편히 식혀, 내일을 준비해야 하는 서민들은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고향의 풍경에 멱감는 단꿈을 꾼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외적인 더위보다, 내면에 쌓인 삶의 더위로 인해,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도심의 여름밤마저 현대의 굴레에 갇혀, 개인이 알아서 감당해야 할 몫인가! 내가 자라난, 고향 여름밤의 정겨운 풍경이 실로 반갑게 다가온다. 소쩍새 울음소리 따라 깊어지는 고향의 여름밤, 옥수수, 감자가 한가득 양푼에 담겨있던, 넉넉한 인심만으로도 시원해지는 것 같다. 십 대 또래들과 어울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 참외 서리, 수박 서리하러 콩밭을 지날 때, 가슴을 흥건히 적시는 코에 구린 듯이 풍겨오는 야릇한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사에 원두막을 오롯이 지키던, 잠귀 밝은 천둥 할아버지의 여름밤을 가르는 우레 같은 고함에 놀라, 자빠지고 구르고 하면서 신발을 잃고도 허겁지겁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뒤도 안 보고 달아날 때는 누구랄 거 없이 오십보백보이건만, 누구는 뒤도 안 보고 달아났다는 둥 하면서 깔깔거리며, 냇가에서 오물로 더럽혀진, 옷과 몸을 씻으며, 개선 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그 여름밤의 냇물이 뼛속까지 시원하게 스며든다.

한여름 밤의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았던 시골 출신이라면, 누구나 줄줄이 쏟아낼 것이다. 그 시절은 더위도 혼자가 아닌 여럿이 어울려 식혔던 것 같다. 산이 성처럼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고향의 한여름 밤의 이야기는 아직도 대롱대롱 별빛에 매달려 속삭이듯 아련한 추억의 빛을 유유히 뿌리고 있는 듯이 초롱초롱 빛난다.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하나둘 모여든  고향 분들의 이야기는, 마당 모깃불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처럼 한여름 밤을 하얗게 지워나갔다. 고향 어른들의 이야기는 밤이 이슥하도록 깊어가고, 이야기 주제 거리도 피부에 와 닿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가득하다. 건넛마을 누구누구네 이야기부터 누구네 자식 이야기까지 소소한 이야기 같지만, 좋은 일은 나의 일인 양, 함께 기뻐하고 나쁜 일에는 함께 걱정하는 이야기는, 여름 밤하늘 쏟아 내리는 별빛마저 귀담아듣는 것 같이 정겨워 보였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마당에 펼쳐 놓은 멍석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듣던, 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 속에 여름밤은 가물가물 꺼져갔다. 할머니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할머니 할머니가 손주 손녀에게 풀어놓던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뚝딱 나오게 하는 신기한 도깨비방망이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의 표정 하나하나에 손동작 하나하나에도 마음 졸이며 까무러지도록 오싹해, 에어컨도 없던 그 시절의 한여름 밤은 춥도록 으스스했다.

현재 우리가 몸담은 사회는 핵가족으로 맞벌이 가정이 주를 이루어, 가족 간 특히 아이들에게 친밀 관계 형성이 부족한 현실이 가슴을 저미도록 안타깝다. 한여름 밤에 듣던 할머니의 구수한 옛이야기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아이의 마음 밭에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심어주던 할머니의 따스한 품이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이 아프다. 지금은 내 삶의 시간에서 멀어져 가신, 그리운 얼굴이 불현듯 떠오를 때면 가슴이 아려온다. 지금의 풍요에 덤으로 주는 각박한 굴레보다는, 그 시절 가난의 굴레를 짊어졌었지만 사소한 것일지라도 함께 공유하고 서로서로를 위하며 살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시원하게 가슴에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져 남아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한여름 밤의 단꿈처럼 아늑하고 시원하게 나의 몸 곳곳에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