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

며칠 전 고향 후배가 간단한 사연과 함께 SNS상에 올려놓은 황금물결 출렁이는 서숙 밭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이 포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서숙 밭 사진을 보며, 어린 시절 눈에 담았던 서숙에 대한 여러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을이면 서숙 이삭에 황금빛으로 알알이 맺은 모양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풍요롭게 했었다. 서숙이란 낱말을 오랜만에 접하니,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오뉴월 볕에 삼베적삼 흥건히 적시며, 서숙 밭매던 고향 어르신들의 힘겨운 삶이 뇌리에 찰나로 스쳐 지나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서숙의 원어는 한자로 서속(黍粟)이라 한다. 내가 자라던 고향에서는 서숙이라 했다. 서숙은 경기, 경상, 전라, 충남 지방의 방언이다. 표준어로 조를 일컫는다. 서숙은 옛날 삼한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재배해 온 작물로서 보리 다음으로 많이 재배했던 밭작물이었다. 예로부터 조는 벼(쌀), 보리, 콩, 기장으로 우리가 말하는 우리나라 오곡(五穀)이다. 우리가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을 지어 먹을 때 꼭 조밥이 들어갔었다. 요즘은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어느 때부턴가 서숙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정확히 말하면 식생활도 식생활이지만, 서숙 밭에서 김을 매기가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니라는 말을 어릴 때부터 익히 들었다. 밭의 김매기 중에 조 밭매기만큼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없다고 한다. 어느 것이 풀이고, 어느 것이 조인 것인지, 구별도 어렵지만, 일일이 뽑아 줘야 하니, 진척도도 느리고 일손도 모자라서, 근래에는 서숙 심기를 꺼린다.

서숙은 쌀이 귀하던 시절 밭에 많이 심던 농작물이다. 서숙은 가뭄에도 강해서 메마른 밭작물로 심어졌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가꾼 곡식이 서숙이라는 학설이 있다. 삼한시대 이전부터 주식으로 먹었다 한다. 서숙의 큰 이삭 하나에 노란 작은 알갱이가 수천 개나 달린다. 서숙을 타작하여 서숙에서 정미 된 알곡이 좁쌀이다. 좁쌀은 참깨보다 알갱이가 작다. 우리가 흔히 듣던 “좁쌀영감”이란 말이 있다. 좁쌀 크기를 빗대어 작고 좀스러운 사람이나 물건을 알갱이가 작은 좁쌀에 비유하는 말이다. 서숙은 알갱이가 작을 뿐 아니라, 심고 가꾸어서 수확해서 타작하기까지 어지간히 손이 많이 가는 곡물이다. 오죽했으면 조바심이란 어원이 “조”에서 나왔을까? 조바심이란 “조마조마하여 마음을 졸임, 또는 그렇게 졸이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조바심에서 “조”는 오곡 중의 하나인 “조”이다. “바심”은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 즉 타작의 순우리말이다. 조는 잎이 어긋나 좁고 길게 생겨서 귀가 질겨 떨어내기가 힘이 들어 타작하기가 쉽지 않다. 조를 떨 때는 문지르고, 비비고, 두드리고 하면서 낟알을 모은다. 알갱이가 작고 가벼워서 한곳에 모으기가 쉽지 않다. 마음먹은 대로 떨어내지 못하니, 마음을 졸이고 초조해한다고 해서, 조바심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나도 후배가 SNS에 올린 글을 보고 처음으로 ‘조바심’의 어원을 알았다.

 옛말에 “조 한 섬 가진 놈이 시게끔 올린다.”라는 말이 있다. 좁쌀을 불과 한 섬밖에 가지지 못한 자가 쌀의 시세를 올려놓고 말았다는 뜻으로, 대단치도 않은 인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됨을 비난조로 이르는 말이었다. 좁쌀이 상대적으로 쌀값에 크게 못 미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반대로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쌀 한 섬 가진 놈이 시게끔 올린다”는 말로 말이다.” 조가 쌀에 비해서 귀해진 요즘이니 말이다. 조밥을 먹어 본 지가 몇 년이나 된듯하다. 좁쌀이 요즘은 쌀보다도 훨씬 귀해졌다. 조밥 하면 흰 쌀밥에 노란 조밥이 섞여 있는 모습이 얼른 떠오른다. 조밥을 먹어본 지도 아득하기만 하다. 조는 차조와 메조로 나누는데, 메조보다는 차조가 밥을 해 놓으면 차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차조 메조를 통틀어 서숙이라 부른다.

요즘에 와서 예전에 배고프던 시절에 먹던 곡식이나 음식이 웰빙 음식으로 주목받는다. 그중 차조의 효능을 알아봤더니, 최고의 웰빙 곡물 중의 으뜸 곡물이다. 조는 고지혈증 예방과 혈압 수치를 안정시켜 주는 데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 외, 심혈관 질환 예방, 빈혈 예방, 기억력 향상으로 치매 예방에도 특효가 있다고 한다. 항산화 작용을 통해 피부 노화 방지와 피부 미용에도 좋단다. 이밖에 소화도 잘되게 촉진하는 효능이 있고 위경련 장염, 이뇨 작용에도 탁월한 곡물이란다. 간 기능을 활성화해 간의 해독작용에도 좋다고 한다. 좁쌀에는 칼슘, 철분, 비타민B 등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원기 회복에도 매우 좋단다. 그리고 단백질 무기질 식이섬유가 풍부해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어렵게 살던 시절 먹던 좁쌀이 이렇게 좋은 효능이 있는 곡물이라니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차조는 현대의 불로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은 좁쌀을 차세대 주요 먹거리로도 손색이 없는 곡식이다. 우연히 후배가 올린 서숙 밭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지금은 시야에서 멀어진 추억이 새삼 아련히 떠오르고 어린 시절, 서숙밭 풍경이 아늑한 고향 산천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