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지난 9월 중순은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이제 전국의 뜰과 야산에서 수확한 결실들을 거둬들여서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 놓고 겨울을 준비하는 그야말로 풍요의 계절인 것이다. 곡식이 가득 찬 창고에는 튼실한 자물통을 걸고 신뢰의 상징인 열쇠로 딸각 잠가놓아야 하겠지.

지금의 창고(倉庫)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기록,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옛 중국 북위(北魏) 효문제 때 수레를 보관하는 곳집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이 있었다. 그 벼슬을 창 씨와 고 씨가 자손 대대로 맡아보며 곳집 지키는 일을 잘 수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물건을 간직해 두는 곳을 뜻하는 곳간(庫間)도 고 씨의 성에서 유래한 것이고, 창고도 두 성씨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 지방에서는 광이라고도 부르는 작은 곳간의 열쇠는 안주인의 상징 같은 것이라서 며느리가 시집와서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살다가 믿음과 신뢰를 얻어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으면 진정으로 그 집의 안주인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의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추석 전 지난 토요일에는 남대문시장의 명절 맞이 분위기도 느껴볼 겸 그곳 주변에서 장사하는 친구를 찾아갔다. 손님을 간간이 맞이하며 캔맥주 한 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친구는 한 뭉치의 열쇠 꾸러미를 꺼내놓고 기억을 더듬으며 불필요한 열쇠를 하나하나 골라내기 시작했다. 내가 대충 보기에도 십여 개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이게 어디 열쇠지?” 하며 주억거리다 “아하! 4층 창고 열쇠네!” 하며 어렵사리 용도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리를 하다 보니 결국엔 대부분 열쇠가 제각기 공간을 지키는 수문지기인지라 버릴 것이 없이 다시 열쇠꾸러미에 꿰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꽤 많은 열쇠를 지니고 사는 것이다. 집 대문 열쇠를 필두로 출입문 열쇠, 서재 열쇠, 창고 열쇠, 자동차 열쇠와 직장의 사무실 열쇠, 회의실 열쇠, 지하실 열쇠, 환기구 열쇠에 열쇠 함에 보관하고 사용 중인 각 층의 열쇠를 비롯하여 각종 업무용 열쇠. 그것뿐이랴! 번호로 여닫는 각종 비밀번호도 사실 열쇠에 해당하리라. 그에 더해서 각종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나 심지어 모든 SNS나 각종 홈페이지와 메일의 패스워드 등, 모든 것이 진정한 열쇠의 범주에 들어 있다.

그중 패스워드는 그냥 기억으로 간직하고 사용하여야 하는데, 가끔 메일이나 홈페이지의 비밀번호가 사용한 지 오래되었으니 변경하기를 권하는 안내문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그 많은 비밀번호를 변경하면 헷갈리고 도무지 기억할 수 없어 섣불리 바꾸길 주저한다. 혹자는 각종 비밀번호를 따로 정리하여 수첩에 적어 놓고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도 분실하면 열쇠꾸러미를 몽땅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어 난감할 것이다.

열쇠의 역사는 BC 2000년 무렵 이집트의 사원 벽화에서 칫솔 모양의 목제 열쇠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지금까지는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열쇠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열쇠들이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이 열쇠는 근세에 들어와서 기본 잠금의 기능 외에 여러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 때는 장식용이나 부적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때는 근속이나 영전, 또는 포상이나 퇴직 등 각종 시상의 부상이나 선물로 커다란 황금으로 만든 행운의 열쇠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웬만큼 직장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장식장에는 노란 황금의 열쇠가 몇 개씩은 진열되어 있었는데, IMF 시대를 겪어내기 위한 온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과 이제는 진짜 금값이 되어 버린 금의 가격 때문에 슬며시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버렸다.

요즘 광화문 광장에서는 세월호 사건의 특별법을 놓고 진보와 보수의 대립 속에 무리수가 두어지고 있다는데, 일부 단체가 단식과 농성으로 정부와 대치 중이던 유가족과 진보단체들 앞에서 폭식행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일부 종교단체 지도자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하고 점입가경으로 꼬여만 가고 있다. 대체 고집과 경멸로 이어지는 이 난국은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여의도 모래섬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입법부를 비롯한 삼권과 나라 전체가 세월호 문제에 발목을 잡혀 헤어날 줄 모르는데, 가난한 국민인 나로서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형편도 안 되고 따지고 싶지도 않지만, 그로 말미암아 시급한 민생현안들이 답보상태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열쇠’를 국어사전에는 ‘자물쇠를 여는 쇠붙이’라고 적어놓고 있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카드나 각종 합금, 또는 목제의 열쇠가 있을 뿐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모든 일을 해결하는데 요긴한 방법을 뜻하기도 한단다. 이제는 정말 조용히 일하고 조용히 살고 싶은데, 난해한 미로에 깊숙이 갇힌 것 같은 이 암울한 묘명(杳冥)의 정국을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는 지혜롭고 획기적인 솔로몬의 열쇠는 없는 건지.

2014년 9월 중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