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은 가을햇볕이 좋은 수확의 계절이다. 하늘과 대지가 준 결실을 얻고 그 고마움에 자연과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추석이 주로 자리 잡는 달이다. 하지만 올해는 달의 바로 문 앞에서 추수 감사의 예를 올렸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추석 같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라고 하고 그 이웃의 캐나다는 10월 둘째 주 월요일이라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 인간에게 내리는 선물인 자연스런 결실은 대부분 이즈음에 수확을 하게 된다. 들판의 나락이 그렇고 산야의 대부분 과일이 그렇지만 화초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씨앗을 맺고 떨어트리기도 한다. 옛 사람들은 이 시기에 농사의 절차를 결정짓는 24절기 중에 한로(寒露)라고 정해 놓았는데, 이 무렵에는 찬이슬이 맺히는 때여서 기온이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고, 또 제비 같은 여름새와 기러기 같은 겨울새가 교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 사람들은 한로 15일간을 5일씩 끊어서 3후(候)로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초대를 받은 듯 모여들고, 중후(中候)에는 참새가 줄고 조개가 나오며, 말후(末候)에는 국화가 노랗게 핀다고 하였는데, 우리의 옛 문헌을 찾아 봐도 고려사에 기록된 글에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 가을의 절기인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민간에서는 서민들이 양기를 돋우는데 좋다는 미꾸라지로 추어탕(鰍漁湯)을 즐겼다는데,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 가을 고기라하여 미꾸라지를 추어(鰍漁)라고 불렀을 거란 추측도 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는 매일로 오는 서울시 뉴스를 보니 올해의 한로인 지난 8일에 광화문 광장에서 상자에 심은 벼를 수확하는 ‘광화문 농사로(農事路) 상자 벼 수확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이는 서울시가 올 6월초 도시농업을 활성화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광화문 광장에 1200여개의 상자에 나누어 심었던 벼를 수확하는 것이다. 이 벼들은 도정을 거쳐 사회단체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난 추석 전 일요일에 아내와 함께 명절 제수축제를 하던 서울광장을 거쳐 광화문의 차 없는 거리 축제에 갔을 때 도심 한 복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을 보고 가을 들판에 들어선 것 같아 인상 깊었던 것들을 수확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때도 ‘이렇게 상자에 담아 이 정도로 키우려면 꽤 많은 정성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서울시는 ‘올해 찾아 온 태풍으로 안전지대로 두 번이나 옮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벼 이삭이 주렁주렁 달리는 농사의 기쁨을 만끽했다.’라고 소개하였으니 그 정성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여름 내내 상자에 물이 마르지 않게 채워주고 질병을 방제하고 비료를 줬을 것이며 몰지각한 행인이나 무심코 훼손하는 어린 아이들의 손길을 방비하는 등 관리, 재배에 보통 정성이 안 들어갔을 수 없으니 뜰에서 자연으로 농사를 짓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과 관리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따로 농사짓고 관리하는 사람을 채용했거나 담당 공무원을 배치하였을 것이지만, 그런 결과는 과정의 어려움에 비례해서 더 큰 기쁨의 소득이 있었을 것이고, 과정에서도 천만 서울시민들의 감성을 살찌게 하는데 적잖이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 힘들고 기쁜 사정은 나도 겪고 있으니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다. 내가 관리하는 건물의 넓은 화단에는 각종 화초와 야생초도 기르고 있지만 조금의 벼도 상자 논을 마련하여 농사 같지 않은 작은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다. 지난봄에 강원도 강촌의 한 논에서 모내기하고 남아서 방치한 묘판을 귀하게 가져다 화단 한 모퉁이에 스티로폼박스를 묻고 적당한 높이로 흙을 채운 후 가져온 모를 심고 물을 채워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모든 농작물과 화초가 심어 놓으면 저절로 키가 자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건 아니어서 항상 물이 마르지 않게 관리하며 정성을 들였는데, 워낙 작은 상자논인지라 며칠 물을 안주면 가뭄이 심한 논으로 바뀌니 연휴나 휴가로 여러 날 관리를 못해주고 나면 잎이 또르르 말리며 벌써 누렇게 말라 들어갔었다.

그렇게 나의 모자란 정성을 원망하며 키를 키운 벼는 지금도 일부는 잎의 끝이 누렇게 말랐는데, 벼의 질병이 키다리병, 도열병, 흰잎마름병, 줄무늬잎마름병 및 충해가 있으나 최근에는 애멸구가 매개하여 발생하는 ‘줄무늬잎마름병’ 발생이 많아지는 추세이고 이 병에 걸리면 치료가 불가하다고 하지만 이 도심에서 무슨 애멸구가 있었겠는가? 그저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렇게 누렇게 말랐을 것이다. 그런 연유와 작은 상자에서는 땅심도 약하고 농약도 못 치고 비료도 못 줬으니 이삭은 패더라도 알갱이가 차지 않는 쭉정이 벼가 열릴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구러 여름을 나고 가을이 목전에 차오면서 나의 미니 논에는 이삭이 패기 시작하였다. 그만도 고마운 일이라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둘러보고 마음이 뿌듯했었는데, 10월에 들어서면서 고맙게도 볍씨에는 알곡이 차츰 차면서 살이 탱탱하게 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열매들은 그 식물들이 자손의 번식을 위해 만들어 낸 씨앗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모든 결실을 수확하는 것은 결국 씨받이하는 셈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식물의 종족번식 욕구를 최대한 부추기고 자극하여 식량으로 거두는 인간이야 말로 잔인한 씨받이꾼이 아닌가?’하고 반문해본다.

그렇다면, 요즘 나의 일과 중에 하나가 ‘씨받이’이다. 봉선화, 나팔꽃, 피마자, 코스모스, 백일홍 등의 씨앗을 수확하고 있는데, 특히 어린아이 키만큼 큰 분꽃은 새앙쥐 눈알처럼 까만 씨앗을 처음엔 종이컵에 조금씩 얻을 수 있었지만 근자에는 거의 한 컵씩 씨를 거두고 있다. 그 밖에도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동네 어귀의 화분에서나 여행을 가서도 귀한 씨를 얻어서 보관하다보니 그 종류가 10여 가지가 훨씬 넘었다. 또한 양에서도 화단에 있는 여러 가지 꽃의 씨앗은 내년에 화단에 뿌리고도 한참 남을 만큼 거두어 들였다. 그런 나를 보고 “아니! 그렇게 많이 모아서 뭐하려고 계속 씨를 받아요?”하고 가끔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어온다. 그럼 나는 머쓱한 얼굴로 “글쎄요? 내년 봄에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공짜로 맘껏 나눠줄 생각인데.......”라고 대답한다.

나도 지난봄에 이 화단에 어릴 적 추억이 있는 코스모스, 채송화, 맨드라미 등을 주로 심기위해 씨앗을 구하려했으나 인근의 꽃집에는 흔하고 귀하지도 않은 꽃이라서 그런지 판매하는 곳이 없었다. 그저 상추나 쑥갓 등 푸성귀 씨앗들만 팔고 있었다. 결국 여기 저기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구입을 했으나 중국산이라 그런지 발아율도 50프로에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 몇 종은 전혀 발아를 못하고 흙속에서 썩어버렸었다. 그런 곡절을 겪은 터라 진짜로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그 양이 되는 한 무상으로 보내줄 생각이다.

과실과 곡식과 여타 여러 수확 중에도 농경생활을 하는 인간은 주 곡물 재배가 중요할건데, 그 중에 동인도가 원산지인 벼는 전세계인구의 40%이상이 주식으로 하고 있다니 벼의 재배와 그 씨앗의 수확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일일 것이다.

이달 말경에는 내 상자논의 나락도 씨받이해서 잘 보관하였다가 겨울을 나고 내년에 봄이 다시오면 볕이 좋은 날을 골라 직접 모판에 나락을 뿌리고 잘 발아시켜 적당한 크기로 자라면 다시 상자논에 모내기를 해야겠다. 그렇게라도 몇 해 그 꼴 같지 않은 농사를 짓다보면 후일 혹시 귀농하더라도 내 농사짓기에 얼마간의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10월은 풍성한 씨받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