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치과에 가서 상담을 하였었다. 오래전에 크라운치료를 해서 지내다가 작년에 발치한 위쪽 어금니 두 개의 공간에 보철치료를 하기 위한 상담이었는데, CT촬영한 결과 정작 그 곳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병원에 가서 임플란트치료를 하는 게 최선이고 그 이전에 비염이 심해 먼저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쪽 어금니도 두 개 모두 부분적으로 깨어져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조치를 미루어 왔었는데 그대로 방치하면 영영 되살릴 수 없으니 크라운치료를 하라는 설명을 듣고 마음에 근심만 가득 담고 와서 무척 낙담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누구들은 신체 외부가 문제가 되고 또 다른 누구들은 내장의 기능 때문에 병원을 찾는다고 하는데, 나는 얼굴의 장기들이 문제가 많은 것이다. 한쪽은 크라운 치료, 한쪽은 일반병원에서는 치료가 어려워서 대학병원에서 치료기간 1년이 소요될 예정이라는 임플란트치료, 코는 비염치료에 두 눈에서는 요즘 들어 부쩍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눈물이 고이고 넘쳐흐르고 질벅거리는 등 내 얼굴 대부분의 장기들이 탈이 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 모두를 치료하고 계속 살아야 하는가 하고 회의가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하긴 육십년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육신이다 보니 여기 저기 탈이 날 때도 됐다고 인정하지만 길고 짧은 생명에 맞춰 장기들의 기능도 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더군다나 십여 년 전 사업 실패로 인해 부득불 떠안아야했던 정부의 세금 부채로 해외여행을 포기하고 그나마 나라 안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기로 했었는데, 내 장기들의 여기 저기 보수를 필요로 하는 이 시점에 그 마저도 심드렁해졌다. ‘내가 무슨 좋은 꼴을 더 보려고 그런 아까운 돈을 들이고 치료에 인내와 노력을 하면서 아등바등 살아야 한단 말인가.’하고 회의를 느끼는 것이다.

한참 그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터미널로 들어서는 버스의 안내방송에 퍼뜩 상념을 털어버린다.

오늘은 새벽에 카메라가방 덜렁 메고 집을 나와 동서울버스터미널로 향했는데, 오늘의 여행지는 정선으로 잡았다. 하지만 전날 미리 버스시간표를 확인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터미널에 도착하니 딱 10분여가 늦어 7시 10분 정선행 버스를 놓쳐버렸다. 다음 버스편을 확인하니 2시간도 더 기다려야 하는 9시 30분대라서 영월로 가서 정선행을 탈까 원주로 가서 정선행을 탈까 망설이다 결국 바로바로 차편이 있는 원주를 경유하기로 했다. 아침으로 햄버거 하나 사들고 버스에 올라 새벽바람에 기상을 한터라 모자라는 잠을 잠깐 보충하였는데 어느새 9시가 되고 버스는 원주터미널로 들어선다. 그 후 40여분을 원주터미널 근처를 서성이다 정선행 버스를 탈 수 있었는데, 기사님에게 소요시간을 물으니 3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동서울에서 곧바로 정선으로 가면 3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 것과 비교하면 버스 승차 시간만 총 1시간 정도가 더 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없이 그 시간들을 감수 하여야만했다. 이 버스는 제천, 영월, 미탄을 경유한다고 하니 그만한 시간이 소요되는 게 맞겠다싶었다. 그런데 아침에 부천에서 출발하여 성남을 경유하여 운행 중이라는 이 버스는 그냥 경유가 아니라 터미널에서 출발 시간을 맞춰 20여분씩 정차했다 출발했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봄이 오는 강원도의 산과 들을 여유롭게 관조할 수 있었으니 나름 얻은 것도 많은 여정이었다. 사실 시골 오일장은 왠지 바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고 또한 그 구경도 서둘러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꾸물대는 버스를 타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는데, 처음에는 치아 치료 등으로 잔뜩 찡그려진 마음에 침울하고 울적한 생각이 가득하면서도 창밖으로 흐르는 봄의 풍광을 무심히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내 마음은 어느 정도 여유로워 지고 전처럼 긍정적 사고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도로를 따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시시각각으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무척 닮아있었다. 봄을 맞는 강원도 산골짝의 땅들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으며, 농부들은 농사준비를 하는데 바쁨은 보이지 않고 일요일 정오를 흐르는 지금의 시간처럼 한가롭게만 보였다. 창밖 산마을의 둥그런 동산들처럼 농심도 둥그렇고 여유로웠다. 이 시골길 버스도 내 인생과 같아서 허겁지겁 달리기도 하고 가파름을 만나서는 힘에 부쳐 빌빌 오르기도 하고 군데군데 쉬었다 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가끔 등산을 가면 정상에 서는 것만이 등산이 아니라 준비해서 집을 나서고 적당한 교통편으로 이동하여 산에 올랐다 집에 다시 돌아오는 모든 과정이 등산이고, 낚시도 고기를 잡는 것을 포함하여 미리 준비하고 미끼를 사고 차로 이동하여 물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전 과정이 낚시이듯이 오일장 구경도 이렇게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시간에 쫓겨 직행 고속버스나 KTX를 타고 쏜살같이 장터에 갔다가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 보다는 이렇게 쉬엄쉬엄 여유롭게 가는 시골길여행이 평소 길 떠나기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 즉 나만의 힐링인 것이다. 거기에 그 장터만의 특별한 먹거리와 탁배기 한 잔으로 힐링의 질을 한층 더 높일 수 있겠다.

산길을 굽이굽이 더듬어 가던 버스는 조금 지루해질 무렵 정선버스터미널에 닿는다. 저기 가까이에 정선 제칠안식일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저곳도 나와는 어느 정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기억에 한 오륙년 전 가을에 저 교회의 젊은 목사님의 소개로 정선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다섯 분께 회원들과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연탄과 밑반찬을 나눠드렸었는데, 감사의 마음으로 목사님이 우리들을 가이드해서 교회 옆길로 난 시멘트 포장길 따라 산 말랭이에 있는 전망대로 인도 하셨고 그 곳에서 동강이 휘돌아가고 있는 한반도 모양의 지형인 영월의 지도마을을 조망할 수 있었는데, 그 길은 이제 깨끗하고 넓은 포장도로로 바뀌었고 조망대도 지금은 시설투자를 많이 해서 ‘병방치’라로 불리는 정선의 명소로 관광객들에게 제 이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장터에 들어서니 이달 초에 갔던 해남의 오일장은 지역이 바닷가라서 어물전 패류전 등 비린 것들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었었는데, 매 2일과 7일 열리는 이곳 정선장은 지역이 산골인지라 취나물, 고사리, 곤드레나물 등속을 말려서 팔고 있는 나물전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먹거리도 장터 국밥집은 존재가 희미하고 메밀전병, 녹두전 등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적당히 시골집 마당 같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시장 가운데 어느 식당 앞 평상에 올라 수수부꾸미, 메밀전병, 날배추전, 녹두전 등에 곤드레막걸리 한 병에 추가로 아우라지막걸리 한 병을 청했는데, 전 값이 너무 저렴해서 내 지갑을 나서는 돈이 채 2만원도 안되니 ‘푸짐’이라는 단어에 다소 면목이 없어지는 지경이 되었다.

장터에 얽히고설키고 꼬여있는 많은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쉽게 나눌 수 있었는데, 현지인인 상인들과 장 구경을 즐기는 외지인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장터에는 외지인들이 고물고물 몰려서 각종 전에 막걸리를 즐기거나 작년에 뜯어서 말린 나물을 흥정하는 소리로 정선장터를 가득 메꾸고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장터를 기웃거리다 고사리 한 묶음과 곤드레나물 한 묶음을 사들고 양이 차지 않은 술배를 골목 깊숙이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식당을 찾아들어 소주 한 병에 더덕구이로 만족을 채웠다.

3시 어림이 되어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오니 약간의 시간이 공백으로 남아있어 둘러본 지난 인연의 교회에는 토요일이 안식일인지라 일요일 오후인 지금 쥔장과 식구들은 어디에도 없었고 봄바람만 무심하게 지나고 있었으며, 독거노인 도움행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지 못하고 단발성에 그친 아쉬운 내 마음만 빈 뜨락에서 허허로웠다. 시간이 되어 버스를 타고 여유로움을 떠나 다시 서두름을 향해 가는 내 귓가에 오륙년 전 젊은 목사님이 하던 말이 맴돈다.

“독거노인들은 물질적인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외로움이 더 크니 지속적인 방문과 말 상대가 더 절실하지요.”

2013년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