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날씨치고는 추운 오늘도 하루가 어언 다가고 어스름이 조금씩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일기예보에 오늘은 저녁에 비가 온단다. 이달도 10여일이 남아 아직 달력은 가을이나 날씨는 벌써 겨울이다.

그래도 비가 오면 노릿노릿 부쳐 나오는 파전에 막걸리가 당기는 날이다. 파전에는 싱싱하고 달큰한 쪽파를 잔뜩 넣고 파 사이사이 여백에 굴도 좋지만 오징어라도 잘게 썰어 공간을 채운다면 그 고소함을 더할 것이다.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원하고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쉼 없이 들이켜고 이 해물파전을 세로로 길게 쭈~욱 찢어서 입 안 가득 넣고 씹으면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낭만을 탄주하고 입안에서는 따끈한 파전의 고소한 희열이 밤하늘 은하수처럼 물큰 터지겠다.

하지만 비나 눈도 안 오고 춥기만 한 겨울 저녁에는 그저 뜨끈한 국물이 있는 생태탕이 제격이겠다. 생선의 애와 고니를 듬뿍 넣고 얼큰하게 끓인 생태탕에는 역시 서민의 애주인 소주가 적당한데, 얼큰한 생태탕을 떠올리니 문득 ‘무교동의 낙지복음도 괜찮겠다.’싶다. 어느새 내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인다.

오늘 까지는 비가 내리지만 언제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눈으로 바뀔지 모르겠다. 이미 이 도시에는 올해 첫눈이 내렸다고는 하나 한 밤에 나 몰래 찔끔 내렸으니 진정한 나의 첫눈은 아직 내리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이유로 어떤 계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신혼 초부터 첫눈이 내리면 꼭 가족들과 짜장면을 먹었었다. 출장으로 지방에 머무를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업무로 밤이 늦어도 24시간 영업을 하는 기사식당에라도 가서 꼭 짜장면을 먹었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은 첫눈 오는 날 짜장면 외식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기다리곤 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요 근래 몇 년은 짜장면 외식을 거른 것 같다. 이제 내가 살아가면서 날씨에 따라 동하는 먹거리를 찾는 것도 삶의 참 즐거움의 하나라 하겠다. 그래서 이번 첫눈 내리는 날에는 짜장면을 다시 즐겨야겠다.

내가 살아오면서 보니 첫눈은 대부분 함박눈이 아니다. 하늘은 계절이 어느 정도 익어야만 풍성한 은혜인양 함박눈을 내려준다. 함박눈이 올 때면 마음도 몸도 한껏 부풀어지게 마련인데, 그럴 때는 겨울의 한 가운데인데도 불구하고 날씨는 포근해진다. 이런 날씨에는 노릇노릇 구워내는 녹두빈대떡이 가장 강력하게 주객의 마음을 유혹한다. 펑펑 내리는 밤의 길가 주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녹두전....... 굳이 해물이나 육류를 넣지 않아도 좋겠다. 그런 녹두전 한 조각 입에 넣고 너와 내가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오물오물 맛을 음미한다면 이 겨울이 훨씬 낭만스럽겠다. 빈대떡에 어울리는 술은 역시 소주. 단지 내 취향이 그렀다는 것이다.

빈대떡을 떠올리면 옛날 군 시절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선임하사가 사준 빈대떡이 고소하게 떠오른다. 어둠이 잔뜩 물든 의정부 밤하늘을 바탕색 삼아 캔버스를 채색하듯 풍성한 여유로움으로 내려서 가로등 밑에 포근히 쌓이던 함박눈 가득한 밤에 내 동기 조병장, 후배 심상병, 윤중사와 같이 먹던 그 고소한 빈대떡. 그때 그 전우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들 있는지.......

지금은 그 시절로 돌아 갈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때를 추억하며 함박눈 내리는 날 광장시장에나 가서 녹두빈대떡에 소주 한잔 해야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함박눈이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함박눈 굳이 어깨로 흠뻑 맞으며 옛 전우들 생각에 담뿍 취해봐야지.

올 겨울엔 빈대떡에 소주 한잔하며 옛 추억에 소록 소록 잠길 수 있게 함박눈이 자주 내렸으면 좋겠다. 펑 펑 많이 많이 더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