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양복 빌려 입고 왔니?” “아니? 오랜만에 꺼내서 입었는데.......”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하여 시집과 수필집을 내고 평소 고마웠던 분들과 앞으로 고마울 분들을 모시고 조촐하게 기념식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 녀석의 느닷없는 질문에 우물쭈물 궁색하게 답을 하였다. 예전에는 주로 양복을 입다가 한동안 입을 일이 드물어 장롱에 걸어 두었던 양복을 꺼내 입었는데, 그게 어언 십년 가까이 되었나보다. 아주 안 입었던 것은 아니라도 그 세월 동안 양복의 치수야 그대로겠지만 내 풍채가 많이 줄었나보다. 그러니 마치 아버지양복을 입고 온 것 같다고 친구 녀석이 농을 친 것이다. 그나마 몇 벌의 양복 중에서 가장 덜 큰 것으로 아내가 골라준 양복인데 이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내 풍채가 당당하였다는 반증이 된 셈이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닐 때와 조그마한 회사를 경영할 때에는 양복쟁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휴일을 빼고는 항상 양복을 입고 다녔었다. 그렇게 주야장창 양복을 입게 된 계기는 전역을 하자마자 곧바로 입사한 회사에서 2년여 쯤 되었을 때인가 보다. 나는 동료들과 서울 시내의 전화국에 파견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때는 매주 월요일 아침에 회의가 있어 본사로 출근하였던 계절이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이었다. 회의를 끝내고 각자 맡은 파견지로 돌아가려고 서류를 챙기고 있는데 부서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부장님이 나와 한 선배님을 부르셨다. 선배와 같이 영문도 모르고 부장님 책상 앞으로 갔더니 “여기는 자네들 회사라서 고객들이 찾아 올 수도 있는데 그렇게 점퍼를 입고 있으면 고객들에게 예의가 아니지.”하고 부장님이 지적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 선배와 나만 엄동에 따스한 가죽점퍼를 입었을 뿐 다른 직원들은 모두 양복차림이었다.

그 후로 아무리 춥더라도 양복을 입게 되었는데 너무 추우면 외투를 걸쳤다가 회사에 들어서면 옷걸이에 벗어놓곤 하였었는데, 그 세월이 4반세기쯤 된 것 같다. 하긴 그 시절의 풍토도 관공서나 거래처 심지어 식당을 가도 점퍼 입은 사람과 양복 입은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나 일처리가 달랐었다. 그래서도 줄 곳 양복을 입고 다녔던 것이었다. 이제는 굳이 양복이 아니라도 그 사람의 의복이나 겉모습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가벼이 대하는 풍조는 그 많고 적음이 있으나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건물에서도 직함은 소장이나 혼자서 근무를 하니 정비기사와 경비, 심지어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청소까지 하고 있으니 1인 다 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 이곳으로 옮기고 한 일 년여를 먼저 다니던 아파트경비원 제복을 입고 근무를 하였는데, 그 제복 덕분에 깔끔하게는 보였지만 우리 건물에 온 사람들은 나를 격하하여 말을 함부로 하곤 하였다. 특히 업무로 가끔 오는 경찰들은 더욱 낮춰서 대하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어느 순간부터 평상복을 입고 근무를 하고 있는데, 그 차이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춘향전에서도 암행어사인 이몽룡이 남루한 행색으로 변 사또 앞에 섰다고도 하는데, 왜 요즘 사람들이 외모나 갖춘 행색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고 대하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한때는 개화복이라고도 불렸다는 양복을 처음 입은 사람은 1881년을 전후하여 정부의 수신사 또는 신사유람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된 개혁파 정객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 양복을 사 입고 돌아와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서유견문록, 또는 고종 시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 후 8.15광복 후 한복은 노년층이나 일부 농촌지역 복장으로 후퇴하고 양복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한국인의 복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때는 양복감이 홍콩과 마카오에서 대부분 수입이 되어서 양복을 입은 사람을 ‘마카오신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지금은 옷을 맞춰주는 양복점이 많이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고 유수한 메이커의 기성양복이 있어 치수를 맞춰 곧바로 사 입으면 되지만 내가 처음 양복을 입었던 때는 무조건 양복점에서 맞춰서 입어야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3년 후인가 어머님이 연년생인 동생과 같이 사회에 나간 아들들의 양복을 맞춰주러 양복점에 갔었는데, 어머님의 예산과는 달리 준비한 돈이 턱없이 모자라 두 벌을 맞출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 벌만 먼저 맞춰주려고 하였으나 우리 형제는 서로 강력하게 양보를 하다가 결국 다음에 하기로 하고 양복점을 나섰다가 몇 개월 후에 동생과 같이 양복을 맞춰 입었었다. 그때 양복점 사장은 서로 먼저 하라고 실랑이를 하는 우리들을 보면서 우애가 깊은 형제라고 하면서 껄껄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른다.

남자들의 서양식 정장이 양복(洋服)이라면 여성들의 서양식 정장은 양장(洋裝)이다. 그 양장을 처음으로 입은 사람의 기록을 살펴보니 1899년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 온 윤치오(尹致旿)의 부인이 양장을 입은 것이 효시라고 하며,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와 진명여학교 여교사 에밀레 황이 그 뒤를 잇는다고 한다.

패션도 세월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전쟁 후의 군복을 물들여 입던 때 이후 나팔바지, 디스코바지, 승마바지, 당꼬바지, 심지어 블루진까지 많은 유행이 있었다. 나와 큰아들은 패션에 무딘 편이지만 아내와 작은아들은 나름 유행에 맞춰 잘 갖춰 입는다. 그리 비싼 옷이 아니라도 밸런스가 맞고 유행에 걸 맞는 옷을 잘도 골라서 입는다. 큰아들과 나에 비해서 작은아들과 아내는 패셔니스트이고 패션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핀잔을 주거나 충고를 해준다. 기념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우리부부는 아이들과 맥주를 한 잔 더했는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 행사에 맞춰 양복을 해드렸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쳐서 잘 맞지도 않는 양복을 입고 계신걸 보고 안타까웠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몸보다 더 커진 대여섯 벌의 내 양복들을 과감히 버릴 때가 되었나보다. 내게 좋았고 소중한 것들도 인연이 다하면 그때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잡고 있다는 것은 쓸데없는 집착일 것이다. 의복도 집기도 하다못해 사랑하던 사람도 인연이 다하면 보내야하는 것, 모든 사람살이가 그런 걸 어쩌랴. 내 양복들도 재활용 수거함에 들어갔다가 또 다른 인연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2013년 11월 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