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겨울추위가 옹골찼다. 하지만 계절을 속일 수는 없어서 그 겨울 가운데에서라도 입춘이 지나니 아직도 수은주의 눈금은 빙점 아래에 있으나 그 차가운 기운 속에서 여린 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며칠 전 정말 매서운 날씨는 온 몸을 옹동그려지게 하였지만 그래도 ‘총각 때 냉방에서 밤을 지새우던 어느 겨울 홍천의 여관방 추위만 하겠는가?’ 하고 자위를 해본다.

밤이 늦어 빈방이 없다는 아저씨를 조르고 졸라서 비품창고로 쓰던 방을 겨우 얻어서 밤새 끙끙 거리며 잠 못 들던 그 혹독한 냉골방의 징그럽게 춥던 홍천의 겨울밤을.......

** 형!!!
오늘 나는 친구들과 강릉 바닷가에 왔어.
푸른 파도 너머로 돌을 던지듯
내 시름도 던져버렸어.
정말 우리네 시름도
이렇게 던져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럴 때 형이 내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형!!
나 많이 힘들어.
형!
정말 보고 싶어.
언제나 형을 볼 수 있을런지.
형!미안해!
괜히 넋두리 늘어놓은 것 같아.
이만 줄일게

19@@년 모월 모일 거시기가**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

그녀는 내가 전역을 몇 개월 앞둔 어느 날 신병을 강압적으로 다그쳐서 소개 받아 펜팔 하던 그 신병의 누나였다. 대구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홍천우체국에 근무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실 청춘은 이팔청춘이라지만 그 나이는 사춘기에 불과하고 이제 제대로 사랑을 갈구하는 20대 중반의 나이였으니 얼굴도 못 보고 글로서 만나는 인연이라도 정말 애틋하고 그리웠으니 그게 그저 펜팔이라고 하면 펜팔이고 사랑이라고 하면 그 또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글씨도 예쁘고 글도 정감이 묻어나고 때론 귀여움이나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문장력이라니.......

나도 머리와 가슴을 총동원하여 미려한 문체를 길어 내서 악필인 내 솜씨로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으로 채우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봉인하여 그녀에게 띄웠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리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녀를 그리다 보면 젊은 내 아랫도리의 근육은 불끈 쓸데없는 힘을 쓰곤 하였다. 물론 자기누나를 연결시켜준 신병은 내 보호 아래 수월하게 졸병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그는 이제 신병이 아니고 나의 예비처남이니 그 정도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렇게 3개월 간 그녀와 글로 정을 나누다 나는 전역을 하여 일주일도 안 되어 취업을 하고 출근하였다. 물론 내 일상을 적어 그녀와 서신은 계속 나누었는데,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일각이 여삼추였지만 사실 사회 초년병인 나로서는 서울에서 교통도 열악한 홍천을 가기는 버거워서 그저 글로나마 정을 이어 갔던 것이다. 그녀는 전역을 축하 한다고 취업을 축하 한다고 만날 수 있는 날이 점점 가까워져 마음은 한껏 들뜨고 기다려진다고 계속 편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취업해서 소정의 교육을 받고 실무에 투입 되니 여름도 어언 꼬리를 말고 퇴각을 준비하는 시기인 계절의 순환기에 접어들었다.

그때 내가 배정 받은 업무는 서울 시내 전화국에 파견되어 자동전화 교환기를 시설하는 일이었는데, 동기생들과 같이 처음 배정된 파견지가 신설동에 소재한 전화국이었다. 우리는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일 년 내내 한 전화국에 파견되어 근무하였었다. 군에서는 고참 이었으나 이제 사회에서는 신참인 나에게는 근무 현장도 낯설고 직장 선배들도 낯설어 그저 능력이 되는 데로 열심히 일에 몰두하였다. 모든 일이 처음 하면 힘이 들기 마련이지만 입사동기생 5명과 같이 일하고 퇴근하면 어김없이 돼지갈비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주위 환경에 익숙해질 즈음의 어느 날,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책임자가 나를 부른다. 일과 중에 나를 부를 일은 별로 없어 의아한 마음으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난히 키가 작고 나이도 많은 책임자는 얼굴 가득 웃음을 덧칠하고 나에게 “평균아. 여자한테서 전화 왔다. 바쁜 일 없으니 천천히 오래 오래 통화하고 나와라. 좋겠다.”하시고 전화기를 내게 내민다. ‘여자? 누구지?’하고 전화기를 건네 받아 내 오른쪽 볼에다 전화기를 같다 붙이니 수화기 너머에서 감미로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형! 나야! 거시기.” 아! 그녀였다. 꿈에도 그리던 그녀. 문체만 감미로운 줄 알았더니 음성 또한 꿈속에서 듣는 듯 몽환의 감미로운 그녀의 목소리....... 한마디로 환장할 것 같았다.

“잘 있었어? 제대 축하하고 취업 축하해!” 계속 쏟아지는 그녀의 음성에 나는 그저 “어? 어.” “그래” “그랬지”하고 연신 짧은 답만 내뱉었다. 얼마 전 편지에 근무지 연락처를 물어 와서 전화번호를 적어 보냈었는데, 이렇게 전화를 할 줄은 미처 생각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녀와의 첫 통화는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모르게 끝났지만 시계를 보니 족히 한 시간은 통화를 하였다. 그날은 내 기분이 극도로 고조되어 퇴근 후 동기생 5명이 전화국 옆 골목의 술집으로 몰려가서 술과 돼지갈비를 양껏 먹고 마셨는데, 물론 계산은 내가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의 전화는 계속되었는데, 매번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한 시간 가량 통화를 했었는데, 내가 눈총을 염려하는 것과는 달리 선배들과 동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끔은 농담반 진담반의 면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매일 꿈결 같은 전화 데이트를 하면서도 그녀는 우체국 교환수였었으니 통화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날이 계속 이어지니 어떤 날 꿈속에서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경포대 바닷가 모래사장을 달리기도 했고, 설악산 비룡폭포 밑에 나란히 서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필체도 매끄럽고 목소리도 황홀하였다.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여인과 편지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통신으로 데이트하다보니 그 해도 어언 저물어서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거쳐 연휴가 이어졌었는데, 우리 동기생 5명은 저녁에 골목 식당에서 역시 돼지갈비에 소주를 마시다 헤어졌다. 다들 보내고 나서 주량이 차지 않아 단짝 같은 K와 단 둘이서 근처 단골 맥주집으로 갔다. 둘이서 술을 마시며 지나간 한 해를 더듬다보니 이야기는 나와 그녀의 이야기로 흘러갔고, 아직까지 얼굴도 한 번 못 봤다는 내 말에 친구 녀석의 핀잔이 내 귓불을 때렸는데, 불현듯 오늘 밤에는 그녀가 무척이나 보고 싶어졌다. 비록 글과 목소리로만 사귀었어도 1년이 다되어가던 사이였으니까.

나는 기습적으로 단짝 K에게 말했다. “야! K야. 나 그 홍천 내 사랑 있잖아.” “그런데?” “나 오늘 그녀가 무척 보고 싶다. 오늘 꼭 봐야겠다.” “야! 미쳤냐? 지금이 몇 신데.” “야! 이놈아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오늘은 꼭 봐야겠다.”

녀석은 말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내가 너무 무모하고 한심해 보였나보다. 하지만 이미 질러 놓은 것. 계속 밀어붙일 수밖에.......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녀석은 내가 안됐던지 “그런데 홍천 갈 돈은 있니?” 이미 녀석은 나와의 동행을 어느 정도 결심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야 임마! 내가 돈이 어디 있니. 아까 주머니 톡 털어서 술값 냈잖아.” “그럼 어떻게 이 밤에 홍천 가려고 하냐?” “그러니까 너한테 부탁하지. 내가 돈 있으면 혼자라도 갔다. 임마.”

우리는 궁리 끝에 동기생 중에 부산에서 올라와서 동대문 이화여대부속병원 근처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으로 쳐들어갔다. 금방 헤어졌는데 다시 찾아온 우리를 보고 의아해 하던 친구는 그녀와의 사랑을 익히 잘 아는지라 나의 사정을 다 듣고 나서는 뱅그데데 웃으며 방구석 배게 속에 꽁꽁 숨겨 놓았던 비상금을 선뜻 내놓았다. 우리는 친구의 비상금을 낚아채서 곧바로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어 홍천 가는 기차는 이미 끊겼고, 강원도 쪽으로는 그저 남춘천 가는 막차만 남아있었다. 그때 그 열차마저 없었으면 아쉽지만 홍천행을 포기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기다려 그 막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창밖에 가득 찬 어둠을 가르며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에 곁들여 맥주를 즐기면서 그녀를 만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한참을 달려 남춘천에 도착하여 역 앞에 줄지어서있던 택시들 중에서 인상이 후덕하게 생긴 아저씨를 골라 요금을 흥정하여 홍천으로 달렸는데, 후에 승용차로 가 보니 도로가 무척 구불구불하여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 때는 부푼 가슴이라 그런지 금방 홍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긴 터라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내 바람은 그 밤을 그녀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나는 그때 혈기 왕성한 한 마리 늑대였었고 그건 어느 청춘이나 마찬가지로 그런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밤늦게 홍천에 내리고 보니 처음 온 도시라 그런 건지 겨울의 한 가운데라서 그런 건지 휑하니 찬바람만 불고 무척 낯설고 쌀쌀맞은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연휴의 첫날이라서 군사도시인 홍천에는 외박 나온 근처의 군부대 사병들과 혹은 면회를 온 가족들이 이미 시내의 여관방마다 모두 점거하고 있어서 빈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한겨울에 밖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지라 이미 불이 꺼져있는 여관들이지만 빼놓지 않고 문을 두드려 사정사정한 끝에 평소 비품실로 사용하여 난방도 안 되는 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는데, 냉기가 소름처럼 돋아나는 방 안에 이불은 씨름선수 박광덕 덩치만한 걸로 두 채나 주고 구석에 석유난로를 켜주면서 주인아저씨는 “계속 켜 놓으면 가스로 질식사 할 수 있으니 한 시간 켜고 한 시간 끄고 관리를 하면서 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래도 한 겨울에 홍천 냉방은 추워도 너무나 추웠다. 평소 듣기만 했던 저 혹한의 시베리아 날씨가 이만 한가 싶었다. 옆에서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자고 있는 친구 녀석은 연신 “끄응. 끄으응.”하고 앓는 소리를 해서 “야! 너 이 야밤에 이빨 뽑냐? 왜 그렇게 앓고 있어!”하며 자던 발로 걷어차고 면박을 줬는데, 그건 무리하게 여기 까지 녀석을 끌고 와서 고생을 시키는 게 정말로 미안해서 그랬던 것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부스스한 눈으로 근처 식당에서 따끈한 해장국으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 당연히 우체국으로 전화를 하여 그녀를 바꿔 달라고 했더니, 이런! 그녀는 오늘 비번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근처 모 다방에서 기다리면 그녀에게 연락을 해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알려준 다방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그녀가 친구들의 연락을 받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도통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녀의 숙소인 집의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해서 전화를 했는데, 도통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한 끝에 전화번호부를 뒤져 주소를 알아내서 직접 그녀의 숙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사실 그 당시의 홍천 시내라야 손바닥만 하여 전화번호로만 주소를 알아내기는 시장통의 순대국집 찾기보다 쉬웠다.

결국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지번을 확인하며 그녀를 찾아 갔는데, 마치 보물찾기 하는 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찾아간 끝에 어렵지 않게 그녀의 숙소에 당도하였다. 확인해 보니 그 집은 대부분 홍천이 객지인 우체국 교환수들이 단체로 자취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을 여우들 소굴이라고나 할까? 큰 소리로 부르니 안에서 예쁘장한 아가씨가 한 분 나오시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이곳 까지 찾아 온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나에 대해서 익히 들었음직한 아가씨는 놀란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휑하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기별 없이 갑자기 들이 닥친 우리를 보고 조금은 당황했던 것 같았다. 우린 다시 속절없이 기다리는데 개울가에 눈꽃은 참으로 수줍게 아름다웠다.

얼마 후 나온 그녀........ 그런데, 뜨악! 정말로....... 나는 말을 잃어 버렸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 집에서 추리닝 바람으로 살았었는데, 그녀는 그 바람으로 내게 다가온 것이었다. 아마도 근무 마치고 자다가 나온 듯.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우리의 첫 만남인데, 더군다나 추리닝 바짓가랑이에는 검불 같은 생활 찌꺼기를 여기 저기 붙인 채로....... 검불 같은 그 생활의 잔주름을 잔뜩 달고 나온 그녀. 아~아! 이 여인이 내가 그리도 그리워했던 여인이었나? 그리도 감성 좋고 품성 좋고 쾌활하고 애교가 넘치던 그녀였나?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도 않았다. 용모도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옆에 있는 친구 보기도 민망하였다. ‘이런 아가씨를 보려고 이 엄동에 그 생고생을 시켰냐?’하고 내 뒤통수에 계속 핀잔을 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 들어갔던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비번인 친구들 과 같이 나왔는데, 다른 아가씨들은 다들 예쁘기만 한데 하필이면 그녀만....... 내 몸은 할 수 없어 홍천시내를 걷지만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남도로 냅다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그제 사 나는 속으로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녀를 연결시켜준 잘나지 못한 그 신병을 보고 같은 핏줄의 누나를 추측하고 상상했었어야 했다. 세심히 따져보지도 않고 그녀의 글 솜씨와 옥 같은 목소리에 스스로 상상하고 선택한 모든 일들이었으니 모든 것이 다 내 불찰이었다. 특히, 교환수를 선발하는데 목소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시내의 컴퓨터게임방으로 갔다. 하지만 평소 게임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좋아했더라도 그 기분에는 어떤 게임도 도무지 흥이 날수 없었다. 눈치를 보던 그녀들은 게임방을 나와 홍천에서 유명하다는 닭갈비집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나에게 닭갈비라고 맛이 있었겠는가. 닭갈비에 젓가락도 별로 안가고 평소 혼자서도 소주 3,4병 거뜬히 치우던 우리도 둘이서 한 병도 채 비우지 못했다. 그녀는 괜히 미안해하며 애꿎은 식당 주인에게 “먼데서 손님이 왔는데 닭갈비를 이렇게 맛없는 걸로 주면 어떻게 해요.”하며 투정을 부렸다. 정말이지 그때는 소주도 안 땅기고 닭갈비도 골판지를 씹는 것처럼 맛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들 여섯 명은 그 멀리 서울에서 애인이 왔다고 내 얼굴한번보고 저희들끼리 수군수군 또 보고 수군수군하였다. 나는 속으로 ‘뭘 그리 수군대나. 그저 사랑 찾아 예까지 왔구만.’하였다. 나는 그저 마음도 불편하고 몸도 갑자기 피곤하여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녀들은 나와 그녀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고 결실을 맺기를 축원하고 계속 만날 거냐고 몇 번이고 물어오는데, 면전에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러겠노라고 거짓 답을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식어서 잰 걸음으로 홍천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올라가서 내일 다시 연락하겠다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약속하고 헤어져 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붕붕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던 버스가 출발하여 서울로 돌아오는데, 창밖에 보이는 풍광은 올 때의 어두컴컴했을 때와는 달리 온통 은백의 설국이었는데 내 마음은 왜 그리도 씁쓸하던지. 더군다나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차창 밖으로 내다본 홍천강은 내 마음처럼 꽁꽁 얼어 결박되어 있었고, 때마침 버스에서는 하필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하고 조용필의 ‘촛불’이 흘러나와 지나치는 벽돌집 슬레이트 지붕에서 흘러내리다 얼어붙은 그 시린 고드름창으로 허탈한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아이고!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조용필의 ‘촛불’은 듣지 않았다.

그 후로 그녀에게서 하루에 한 번씩 오던 장거리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나도 그녀들이 염려하던 대로 전화나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서 민들레 홀씨처럼 그렇게 훨훨 날아가 버렸다. 검불데기 내 사랑은 그렇게 추억의 먼 심연으로.......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생각하니 나도 별로 잘나지도 못했으면서 그토록 정성으로 그리움을 만들어 주고 멀리서나마 세심하게 나를 위해 주던 그녀를 외모만 보고 무정하게 마음을 접은 게 무척 미안하고 후회가 되었다. 외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공고를 졸업한 나보다 정규대학을 나온 그녀의 내면은 훨씬 훌륭하고 잘 생겼을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도 검불데기는 아니었었던가?’하고 나를 뒤돌아본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만 그녀에게 정중히 용서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나보다 더 멋진 남자 만나서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왔고 살고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이제 그 옛날을 추억하며 그녀에게 늦게나마 겸연쩍은 인사를 해본다.

“안녕~ 검불데기 내 사랑.”

2013년 2월 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