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화요일인 오늘은 서울에도 장마전선이 묵직하게 드리워져서 하늘은 서두름 없이 비가 가득 찬 보따리를 슬금슬금 풀어댄다. 장마는 다음 주 초까지 지속된다 하니 이번 주말 야외활동은 곤란하겠다.

그저께는 아내와 함께 강촌에서 서울행 ITX를 타니 일요일 저녁이라 만석에 입석손님도 더러 있었는데 그래도 실내는 그리 붐비지 않고 쾌적하였었다. 승차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산 캔 맥주를 날름마시고, 열차에서 캔 맥주를 하나 더 사면서 이동판매원아주머니에게 보따리에 들고 오던 오이 몇 개를 꺼내 건네 드리며 “퇴근하셔서 반찬해서 드세요.”했더니 얼굴이 확 펴지며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었다.

용산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집으로 오는데, 옆자리의 꼬마 여자아이가 제 엄마에게 재롱을 부리는 양이 하도 귀여워서 “아이고 예뻐라!”하며 오이 세 개를 꺼내주니 아이가 또랑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하고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으로 결혼 이주한 것 같은 아이 엄마도 다소 덜 세련된 말솜씨로 감사의 인사를 거듭 건네 온다.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맙지.’ ‘그만큼 짐을 덜었으니.’

이십여 년 전에 우리 삼형제가 돈을 모아 춘천의 강촌에서 산을 넘어 행촌리에 부모님 유택으로 조그만 땅을 마련하였었다. 뿌리에 옹기종기 달린 하지감자 같은 마을을 지나 골짜기 깊숙이 야산에 접한 우리 땅은 지목이 전답으로 되어 있어 그저 옥수수나 고추 정도를 심었었는데, 그도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부터 어머님이 병상에 자리를 하게 되어 그 어설픈 농사에도 몸과 마음이 떠나 몇 해를 그냥 방치했더니 시에서 휴먼토지로 판정하여 헐값에 현지인에게 강매를 한다고 협박을 하여 부랴부랴 어머니 병원진단서 첨부한 서면해명과 담당자 면담 등으로 겨우 강매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킨 부모님 유택은 더 이상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가장 손쉬운 고추를 심고 있었는데, 정작 4년 전 부모님이 소천 하셔서는 6.25 참전용사 자격이 있는 아버지 덕에 호국원에 모시고 나니 행촌리의 토지는 유택으로서의 자격은 소멸되고 그저 주말농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거르지 않고 봄이면 100여 포기의 고추모종을 사다 심고 잡초를 뜯어 주며 소꿉놀이 같은 농사를 짓는다. 그런 나를 보고 올라가다 만나는 동네 아저씨는 “그냥 서울서 사먹지 비싼 기름 값들이고 힘들게 예까지 와요?”하고 나에게 농을 친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봄에는 주변 산등성이에 야생하고 있는 산취나물과 약간의 두릅, 그리고 씀바귀를 잔뜩 뜯어서 서울로 오곤 하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농사일에 지쳐 야산에 지천인 나물에는 손이 가지 못하고 종종 춘천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들어와 나물을 뜯어 가곤 한다. 요즘은 산나물 채취가 불법이라고 하지만 인근 야산이 사유지고 우리 땅과 이웃하고 있으며, 20여 년 출입하다보니 땅 주인도 동네 사람들도 모두 면식이 있어 다른 곳이 아닌 이 행촌리에서의 나물채취는 나에게 문제가 안 된다. 특히, 매년 이곳에서 산취를 뜯다보니 이제는 취나물이 무리지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 머리 속에 각인이 되어있어 쓸데없이 엉뚱한 곳을 해맬 필요 없이 단 시간에 최대 수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해에 2,3번 취를 뜯으러 가는데 올해는 첫 취나물 나들이에는 가까운 산우회 회원과 아내 포함 5명이 가서 나는 그저 취 있는 곳을 알려주고 취와 유사한 잡초를 구별해 줬다. 나 혼자서 산등성이를 더듬을 때는 그저 독사를 경계하며 조심히 나물을 뜯으면 그만이지만 같이 간 산우들에게 눈 산행 할 때 차는 스패츠를 착용시키고 미리 백반을 헝겊에 싸서 발목에 차게 하여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었다. 하지만 나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6월이면 독사를 미리 발견하여 피하기 어렵고 취도 억세져서 더 이상 취나물 산행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계절이 여물어 여름이 되면 우리 밭에 잘 열린 고추도 수확하고, 동네 분들이 인근 밭에서 길러 수확하였는데 상품으로 출하하긴 모양이 빠지고 버리긴 아까운 가지를 듬뿍 얻어 오기도 하는데, 올해는 동생이 마음먹고 글을 쓴다고 한 달 전부터 이웃 관철리의 홍천강 어귀에 콩끄트머리 만한 방을 얻어 들어앉아 있으면서 종종 집주인의 오이농사를 돕다 보니 모양이 빠지는 오이를 내가 박스로 얻어 올수 있었다. 사실 가지나 오이는 수확하고 적어도 3일이 지나야 우리네 밥상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 일단 수확을 하면 박스에 포장을 하고 한 차를 채울 수 있는 양이 되도록 기다리다 보면 적어도 하루 밤을 묵고 다음날 농수산물시장에 보내면 그 다음날 새벽에야 경매를 거쳐 도, 소매를 지나 소비자의 시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으니 빨라야 3일이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얻어가는 가지와 오이는 모양은 조금 빠지나 시장의 물건보다는 훨씬 싱싱한 것이다. 메고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판매원 아주머니도 주고 꼬마아이도 주고 전철에서 내려 지인과 막내아우에게 들려 고추도 주고 오이도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행하였던 아내는 평소와는 달리 아무나 막 퍼준다고 잔소리를 안했었는데, 그렇게 인심을 써도 우리 식구가 며칠은 풍족히 먹을 수 있는 가지, 고추, 오이와 씀바귀가 등에 멘 배낭 속에 가득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아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주 남에게 푸는 건 아무래도 내 아버지를 닮은 듯하다. 생전에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고 과일을 사오시다가 만나는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에게 반갑다고 봉지에 들어 있는 과일을 한 개 두 개씩 주시다 보면 정작 집에 도착한 아버지 손에는 거의 비어버린 과일봉지가 들려 있었고, 식구가 많은데도 내 식구 생각안하고 남에게 다 퍼줬다며 커진 어머니의 볼멘 목소리가 담을 넘곤 하였었다. 때론 주머니가 두둑하시면 주점에 앉아 약주를 드시다 면식이 있는 아저씨들이 지나가면 굳이 불러 세워 탁배기 한 잔씩 마시고가시게 하였었다.

그런 아버지의 욕심 없는 심성을 상속받았는지 가지고 있는 걸 남에게 주길 좋아 하고, 술도 ‘세상에 최고 맛있는 술은 공짜 술’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나는 얻어먹는 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술값을 내야 마음이 편하고 한 번 얻어먹으면 빨리 갚을 생각으로 머리가 불편해진다.

봄에 뜯어오는 야생나물들도 양이 넉넉하여 동생들과 이웃들과 나누어 먹는다. 그러면 받는 사람들은 귀한 것이라고 무척 행복해 한다. 나는 ‘남에게 주는 것은 내가 가진 것 중 최고로 좋은 것을 줘야 한다.’고 배웠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내가 싱싱한 취나물로 골라서 건네면 받는 순간 그들의 머리는 이미 향이 좋은 취나물에 싼 잘 익은 삼겹살을 떠올릴 것이다.

나에게는 학창시절 때부터 무척 좋아하는 글귀가 하나있었다. 언제 어떤 책에서 읽었던 글인지 정체는 모르지만 너무 가슴에 와 닿아 그 일부를 종종 되 뇌이곤 하였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정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글이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의 구절(句節)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결국 그의 자취를 찾아 통영에 있는 청마문학관에 가보기까지 하였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 유치환의 ‘행복’ 일부>

ITX열차의 이동판매원아주머니도, 전철에서의 모녀도, 동생도, 지인도 모두 내가 나누어 준 작은 정성에 고마워하고 행복해하였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청마의 시구(詩句)대로 나누어 준 내가 더 커다란 행복을 누렸었던 지난 일요일이었다.

  2013년 7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