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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권영심 수필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권영심
ㆍ작성일 2022-07-08 16:44
ㆍIP: 223.xxx.233
아버지와 고량주
26  아버지와 고량주   (2)
     
"술은 사람이 마시는 거이디. 짐승새끼 래 마시는 거이 아니야.  술을 마시고 사람이래, 짐승새끼로 변하믄 그거이 술을 마실 자격이 없는 거이야 ."

아버지의 술 마실 자격이 있는 사람의 자격론이다.  술을 마시고 흉폭한 짐승 으로 변하는 사람은, 술을 마실 자격이 없다면서 그런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대 작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술을 가르 친 사람도 아버지였다.   엄마는 아버지 와 함께 다니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는 데, 거의 연모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깊고 넓게 울렸으며 ,젊었을 때의 배우 김무송씨 와  흡사했다.  거기에 한학이며 역사에 이르기까지,아버지처럼 유식한 사람이 시장에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 들은 아버지를 찾았고 서류 대필이며,
경조사와 제사의 글쓰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마리야아부지 글씨래야 귀신이 응감하
제,암만! 소지할 때 보믄 알수있다카이."

사람들이 글씨를 부탁하며 하던 말이 지
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에 비해 엄마는 무학이었고 너무 어렸으며, 이상한 자존심으로 시장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왕비마마 였을까...

반면 아버지는 누구라도 잘 어울렸고,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엄마는 그 옆에 있고 싶어 했으나, 그럴 용기도 주변도 없었다.  아버지는 엄마 와 데이트를 즐겼는데, 그 시대에 그런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부부의 데이 트라니... 한 달에 두어번, 토요일 저녁 이면 일찍 가게 문을 닫고 곱게 차려 입 은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나갔는데,시장 아줌마들이 정말 엄청나게 부러워 했었 다.  몇 십 년 후 엄마는 소주를 마시면 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회상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안 부러웠다.
너거 아부지 팔짱을 끼고 남포동,광복동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너거 아부지는 내게 꽃도 사 주고,브롯 지도 사 주고, 머리핀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먹고...몸이 아프기 전까지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나가서 그랬었다 ."

엄마는 그 행복한 추억으로, 47세에 홀 로 되어, 그 후 몇 번의 청혼을 받았으나 오로지 아버지만의 여인으로 살다가
돌아갔다.

자존심과 수줍음이 함께 많은 엄마에게 아버지는 술을 가르쳤는데,내가 국민학 교 이삼학년 때였다.  모주를 끓여 마시 는 것으로 술을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술잔을 나누며 사람들에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서 술을 배웠고 ,막걸리에 흑설탕을 넣어 끓여 식힌 모주는 의외로 우리집의 손님들이 즐겨 찾는 술이 되어 버렸다.  모주도 술은 술이니 엄마도 당당하게 술자리에 낄 자격이 생겼고, 한 잔 마시 고 볼이 발그레해서 아버지 옆에서 웃는 엄마는 참 예뻤다.  그렇게 배운 술이 동생이 죽었을 때 엄마를 살렸고 아버지 의 소천 후, 엄마를 살게 했다.  아버지의 충실한 학생이었던 엄마는 단 한 번도 술을 마시고 짐승이 되지않았고, 그렇게 배운 술은 힘들고 슬픈 삶의 아버지 대신이 되어 주었다.

"질투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이북에 있는,이름도 모르는 너거 아부지 첫 부인을 정말 이가 갈리도록 질투했었 다.  그래서 니가 미웠어.  그 첫부인이 낳은 딸과 똑같이 생겼다고, 니만 물고 빠는데 어찌 안 미웠겠냐?  그런데... 인자는 가고 싶다.  너거 아버지 옆에 그 여자가 있으면 낼로, 그 옆에 있으면 안 되것나.  설마 나를 쫒아 내것나..."

아... 가엾은 내 어머니.  온전한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두려웠기에,그토록 힘들고 외로웠을 엄마를 이 못난 딸은 이해하지도 알아주지도 못했었다.
우리 엄마가 글자를 알았으면 그 겹겹이 피떡진 가슴의 이야기를,서리서리 풀어 내어 글로 썼을 것이다.  술 이야기에서 엄마 이야기로 흘러 버렸는데, 우리 식구와 술은 이처럼 오랜 친구처럼 깊은 인연이 있다.  아버지는 화교 친구가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주로 고량주를 마 셨는데, 나이 차이는 있으나 화교 식구 들은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그 아저씨가 만들어주던 음식처럼 맛있는 중국요리를 그 후 먹어 본 적이 없다.  산둥 사람이라고했고 일가 친척 들은 타이완에 대부분 있다고 했다.
무슨 날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오기도 했고,가게 문을 한 두달 닫고 다녀올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가보았던 타이완에 화교 아저씨와 가려고 했으나 가지 못했 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출신 과 관련이 있었고,굉장히 낙심한 모습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타이완과 중국의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역사와 인문의 비밀스 런 문을 열게 했다.  내가 무병을 앓지 않았더라면...내가 제대로 학문의 길을 갔었더라면,후회하고 또 후회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엉뚱한 길을 달리기를 좋아했고,교과서의 것보다 감춰진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이야기들을 말하면서, 나는 이제 아버지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이루어 줄수 있을까?  그래서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와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함께 하면서, 고량주와 그 술에 얽힌 사람들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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