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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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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렬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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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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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9-01-19 0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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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옹이
어머님의 옹이
김경렬
소리 없이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던 날! 책장 속에 잠자고 있는 앨범을 꺼내 들었다. 툭! 떨어지는 빛바랜 사진 한 장, 코트차림의 어머님이 단아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작은 체구에 맞는 옷이 없어서, 늘 소매를 잘라내고 품을 줄여 입으셨던 어머님에게 양장점에서 맞춰드렸던 코트였다. 어머님은 슬하에 팔남매를 두셨다. 위로 아들 다섯, 아래로 딸 셋 주르륵, 신기했다. 명절 때면 증손까지 모두모여 집안이 북적북적했다. 추울 때는 따뜻한 아랫목에 모여 칼잠을 자고, 더울 땐 시원한 대청에 난민처럼 누워 잠을 잤다.
불같은 성정에 우렁찬 목소리의 아버님은, 사근사근 참 배 같은 어머님과 소소한 의견 충돌이 잦았지만 집안은 늘 훈훈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삼 대째 외아들로 대를 이어오던 집안에, 자손이 번성했다고, 상 할머니는 며느리인 어머님을 공주처럼 받드셨다. 땅 부자 집이라 논밭에 일손이 모자랐지만, 어머님은 밭에 나가는 법이 없을 정도로 곱게 사셨다. 거꾸로 일찍 결혼한 맏동서가 머슴처럼 일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머님은 당신 며느리가 들일은 장정처럼 잘하는데 살림은 뒷전이라며 밥상에 설익은 가지나물과 고추졸임이 어석거린다고 불평을 하셨다. 집안 행사나 명절에 내려가면 맏동서는 기다렸다는 듯, 식재료만 챙겨주고 밭으로 나갔다. 음식장만은 자연스레 내 차지가 되었다. 주방일이 아무리 분주해도 어머님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동네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던 어머님, 이런 어머님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보트제작 기술자였던 막내삼촌이, 신제품 보트시승을 나갔다가 전복되어 익사한 비통한 사고였던 것이다. 뉴스를 보던 이웃이 달려와 전해준 비보에 어머님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온 가족이 숨 막히는 슬픔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버님과 시숙 두 분이 올라와 장례를 치루고 내려가셨다. 막내삼촌은 서울 우리 집에서 출퇴근을 했었다. 정이 들었던 나도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끝내, 남편 얼굴에 망인의 모습이 겹치는 환각으로 시달렸다. 걱정해주던 친구가 망자에게 위령제를 지내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망자에게 좋다면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었다. 날을 잡고 준비를 했다. 어머님도 참석하시도록 연락을 했으나 소식이 없어 우리부부만 사고현장으로 가서 위령제를 끝내고 돌아 왔다. 집에는 어머님이 오셔서 누워 계셨다. 날자가 잘못 전달되어 한발 늦으셨던 것이었다. 어머님은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으로, 기력마저 쇠진해 일어나지도 못하셨다.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어머님을 보자니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났다. 경동시장 약재골목엔 다양한 보약 재료가 수북했다. 상점 주인이 기력 회복에 최고라며 권하던 건 개구리, 몇 시간 푹 고았더니 우유 빛 국물이 잔득잔득하고 고소했다. 물처럼 수시로 마시고 끼니때엔 밥까지 말아 드셨다. 놀랍도록 하루하루 눈에 띄게 좋아지셨다. 보잘 것 없어 미심쩍었지만 진심으로 추천하던 아저씨를 믿은건 잘한 일이었다. 기력이 돌아오자 어머님은 ' 네 정성이 시에미를 살렸구나' 하시며 서둘러 시골로 내려 가셨다.
요절한 아들로 인해 비탄에 잠겨 가슴만 쓸어내리던 어머님은, 처녀 혼령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빈틈없는 어머님 성격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저승에 있는 자식이지만 배필을 정해 주려는 모성은 까로웠다. 우여곡절 끝에 양가 어머니들이 만나 합의하고, 드디어 절에서 혼령 결혼식을 올렸다. ‘그 녀석에게 그렇게라도 해주니 마음이 편안해 졌어’ 하시는 어머님은 그 일로 위안을 받으시고 평안을 찾으셨다. 다행이었다.
평소 약주를 좋아 하셨던 아버님에게 가벼운 뇌졸중이 찾아왔다. 의사의 경고로 술 담배도 끊으셨다. 온 가족이 노심초사 보살펴 드렸는데 얼마 후, 또 다시 쓰러지셨다. 서울병원으로 모시려고 급히 내려갔다. 바쁜 너희들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하시는 어머님은, 용한 한의원이 있으니 그곳에서 치료받겠다고 막무가내셨다. 어머님의 자식 사랑은, 오로지 당신 혼자 감내하는 헌신이었다. 삼년동안 누워 계시던 아버님은 결국 어머님을 홀로 남겨놓고 떠나셨다. 어머님은 그 작은 체구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버님의 소 대변을 받아내며 정성을 다해 온갖 수발을 다하셨다. 오히려 오래 고생하지 않고 떠나서 다행이라고 자위하시며 되레 우리들을 다독여 주셨다. 가슴 한쪽이 얼마나 시리고 아리셨을까. 편하게 살아오신 어머님에게는 모질고 힘겨운 시련이었지만 오뚜기 처럼 일어나시곤 했다.
아버님의 빈자리를 지키며 어머님을 모시던 큰 시숙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술 후 의식불명상태였다. 온 집안에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또다른 슬픔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수술한지 사흘 만에 첫 고비를 잘 넘겼다고 의료진이 좋아했다. 문병 간 그날은 두 번째 고비를 넘기면 안심할 수 있다는 날이었다. 혼자계신 어머님은 끼니도 거르고 집안의 큰 기둥이 어찌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셨다. 깜빡 잠이든 새벽녘 비몽사몽에 수화기 너머로 숨넘어가는 맏 동서의 목소리. 집안의 대들보가 와르르 무너졌다. 미망인 맏 동서는 물론, 졸지에 아빠를 잃은 조카들의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 남아있는 형제들도 비탄에 젖어 말을 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주무시는 어머님 바라보다가 조용히 아랫집 친구 분을 찾아가 사실을 고하고 도움을 청했다. “상태가 나빠져서 급히 갔다고만 전해주세요”.어머님 마음 준비가 필요해요. 친구 분들이 어머님곁에 함께 있어 주세요" 부탁을 드렸다. 그분도 놀라시며 걱정 말라고 하셨다.어머님은 정오가 되도록 소식이 없자 친구들에게 ‘큰애가 잘못 된 것 같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개탄을 하였다. 친구들은 조상님 뜻에 맡기자며 어머님을 위로했다고 했다. 저녁때 큰 고모가 어머님을 뵈러 갔다. 그제서 어머님은 통한의 가슴을 치시며 통곡을 했다. 종일 애간장을 끓이며 한줄기 희망을 놓지 않았던 눈물겨운 모성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어느 철학가의 저서에 ‘자식을 앞세운 슬픔은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고통이다’라고 했다. 어머님은 생전에 그 엄청난 고통을 두 번이나 겪으신 분이었다. 아니, 아버님까지 세 번이 아닌가. 그 작은 가슴에 시커멓게 타버린 옹이를 품고도, 의연하게 삭이며 늘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어머님. 태풍 속에도 큰 나무는 더 튼튼한 뿌리를 내리듯, 인생 격랑의 해일 속에서도 전사처럼 강인하셨다. 친구들과 관광도 다니고 막내딸이 살고 있는 프랑스에서 5개국을 돌아다니셨다고 자랑도 하시며 가슴속에, 한이 서린 옹이들과 더불어 씩씩하게 십 여 년을 더 사셨다. 88세에 평소 소원처럼 자는 듯이, 아버님과 사랑하는 두 아들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나셨다. 그렇게 떠나신지 어언 10년! 누렇게 바랜 사진속의 어머님은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짓고 계신다. 어느새 함박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삼라만상의 허물과 고통마저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님의 목화솜 융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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