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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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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렬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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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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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8-09-01 1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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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지 ( 6 )
(6)
수북이 쌓였던 먼 산봉우리의 눈이 녹아내리고, 실개천 얼음장 밑으로, 수정같이 맑은 물이 졸졸 흘러 내렸다. 수양버들개지가 솜털 같은 눈을 뜨는 봄이 찾아왔다.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낸 새순이 기지개를 켜듯 영미의 가슴에도 훈훈한 봄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가까이 지내던 지인의 소개로 마음씨 착하고 성실한 청년을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인해 치유된다는 말처럼 가슴 한쪽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민재를, 추억의 단지 속으로 곱게 봉해 버렸다.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청년을 만났기 때문이다. 부모를 일찍 여윈 그 청년은 비록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스승의 농장에서 과학 농법과 친환경농법을 전수받은 장래가 밝고 믿음직한 청년 이었다. 영미네 논밭을 맡아 과학영농으로 성공하고 싶다면서, 동네를 친환경 마을로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가 무엇보다 믿음직했다. 영미는 당당한 그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논밭 일을 할 수 없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이 청년과 혼인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영미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영농기술을 안고 장가를 오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을 모시고 사위가 아닌 아들로 살고 싶다는 말이 영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영미씨, 부모도 없는 고아를 선택해 주어서 고맙소. 이제부터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과 함께, 가장으로 큰 아들로 열심히 꿈을 이루워 나가겠습니다. 영미씨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분골쇄신 용기충천 하리다. 영미씨! 반드시 성공을 하겠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했다. 민재는 여러 면에서 영미에게는 부담스러웠으나, 이 청년과는 동병상련의 동지로 생각되어 마음이 편했다. 변명 같지만 한편, 민재를 잊기 위한 또 다른 선택이기도 했다. 그동안 민재가 그리울 때마다 영미는 화선지를 펼쳐놓고, 쭉쭉 뻗어가는 난을 치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평정을 찾곤 했었다. 영미는 그렇게, 수도 없이 난을 치고 또 쳤었다. 혼인식을 앞두고 붓과 화선지 꾸러미를 상자에 넣어 서랍 깊숙히 밀어 넣었다. 영미는 옷가게를 정리하고 차근차근 청년과의 결혼식 준비를 했다.
드디어 영미의 새 출발이 시작 되었다. 영미는 농장을 제대로 일구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관련서적을 열심히 탐독하고 친환경농장을 찾아다니며 현장답사를 하였다. 농촌지도소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친환경농사 현장실습을 하면서 무공해 농약과 무공해 비료를 만들어 밭 작물에 직접 사용하고 관찰하며 농사 일지도 꼼꼼하게 기록해 나갔다. 그런 노력들이 헛되지 않아, 얼마 후, 영미는 친환경 지도자가 되었다.
민재는 겨우내 회사 정상화에 온 정력을 쏟으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지냈다. 봄이 되자 민재는 아버님 산소에 성묘를 하고 영월을 다녀오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민재는 영미가게의 전화가 낯선 사람으로 바뀌고, 가게를 접었다는 것을 알고 무슨 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민재의 편지마저 되돌아오고 있었다. 서둘러 영미를 만나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길을 떠났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기를 빌었지만 어쩐지 불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차창 밖을 스치는 나무들이 안간힘을 쓰며 새순을 틔우느라 노란 움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열차가 영월역에 도착하자, 영미가 운영했던 가게로 달려가 영미의 집을 수소문했다. 택시를 타고 달려간 영미네 농장에는 젊은 남녀가 밭일을 하고 있었다. 영미였다. 반가운 나머지 달려가려다 민재는 그 자리에 얼음이 되었다.
“여보 여기 좀 와 봐요.”
남자가 영미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네, 갈께요.”
영미가 농기구를 팽개치고 달려갔다. 그리고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있었다. 민재는 순간 눈앞이 노래졌다. 민재는 눈시울을 붉히며 두 주먹으로 벽을 치고 말았다.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참을 멀건히 바라보다가 떨어지지 않는 천근같은 발길을 돌렸다. 민재는 영미가 야속했지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며 서울행 기차에 올라야 했다.
혼인 문제로 더 이상 버틸 이유가 없자, 어머니의 뜻에 따라 민재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영아와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민재는, 혼인을 하고도 영미를 가슴 속에 품고 내려놓지를 못했다. 그는 회사 일에 더욱 파묻혀 지내기 일쑤였고 겨우 잠자러 집에 가는 하숙생이 되었다. 귀엽고 나무랄 데 없는 아내였지만 살갑게 대해주지 못해 아내를 목마르게 하는 민재였다. 예쁜 딸이 태어나면서 민재도 여느 아빠와 같이 딸 사랑에 푹 빠졌다. 회사도 장인 도움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영미네 농장도 점차 유명세를 타면서 무공해 농산물 주문이 폭주하기에 이르렀다. 우렁이 농법으로 수확한 쌀이, 비싼 가격임에도 입소문을 통해 예약주문이 밀려 들었다. 즐거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영미부부는 친환경 농촌 계몽에도 앞장섰다. 그로인해 인근 동네 농업인들도 하나둘 모두 친환경 농사를 따라하게 되었다.
드디어 관청에서 인증 받은 ‘친환경 마을’ 이란 팻말이 동네 입구에 세워졌다. 영미는 몇 번의 실패와 고비가 있었지만 성실한 남편의 도움으로, 그 때마다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동안 아들 형제를두었고 벌써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방학이면 내려와 부모님 사업을 열심히 배우며 도와주었다. 든든한 효자였다.
어느새 영미의 나이 오십이 되었다. 영미 남편은 친환경 농법으로 성공한 유명인사가 되어 전국으로 불려 다녔다. 영미도 농장에서 나오는 무공해농산물로 가내공업을 하는 창업주가 되었다. 영미는 매일 종업원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베풀고 사랑하면, 자손까지 복을 받습니다!”
종업원들은 아침마다 이 말을 복창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 마음이 어우러져 가족처럼 화목한 일터가 되었다. 동료 직원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긍지와 보람으로 똘똘 뭉쳤다. 배달 팀은 아침마다 무공해 녹즙을 짜내어, 일회용 봉지에 밀봉한 뒤 읍내로 배달을 나간다. 저녁이면 모두 모여 남아있는 녹즙을 모아, 노인들의 반찬용 야채상자와 함께 양로원으로 보내면 하루일과가 끝난다. 어버이날이 오면 떡과 과일을 준비하고 농장에 닭을 잡아 해마다 경로잔치를 했다.
영미네 농장은 친환경 사업이 괘도에 오르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 했다. 모 식품 회사직원이 찾아 왔다. 그 식품회사에 친환경 파트가 발족하면서 사업파트너를 선정하기위해 여러 친환경농장을 사실조사 중이라고 했다. 그동안 친환경 농법과 작황 실태, 수차례의 지질검사, 그리고 마침내 그 회사의 실사 팀이 다녀가면서 전속농장 제의가 왔다. 내일이면 영미네 농장이 국내 굴지의 모 식품회사와 전속 농장 계약을 하는 날이다. 영미의 농산물 가내공장도 현대시설로 확충하고 생산품도 전량 그 회사에 납품을 하기로 했다. 모두들, 영미 내외가 베풀며 살았고, 성실하게 노력 하였기에, 좋은 일이 생긴 것이라며 입을 모아 축하해 주었다.
그날 저녁, 영미 부부는 찻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어렵고 힘들었던 지난 날을 회고하며 감회가 남달랐다. 처음엔 친환경 농법을 이론대로 해보았지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마음고생하며 애태웠던 일, 갈아엎고 또다시 씨를 뿌리며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던 일. 실패를 거울삼아 힘이 들어도 확신이 있었기에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 살다보니 이렇게 좋은날이 오는구려!’ 밤낮으로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면서 손톱이 닳도록 고달팠던 날들, 내일이면 그 보람이 활짝 꽃피는 날이다. 영미 남편은 영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새삼 지난날들이 꿈만 같았다. 영미 남편은 행운을 안겨준 그 식품 회사의 사주가 ‘신화를 일궈낸’ 업계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사업가’ 라고 했다. 영미남편은 농장의 무공해 농작물납품 건으로 그 회사를 찾아 갔을 때, 처음 사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인품 좋은 점잖은 분이라고 했다.
이튿날, 영미는 서둘러 남편과 나란히 새마을 열차를 타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달리는 차창 밖의 황금 들녘은 마치 맛난 음식을 푸짐하게 잘 차려놓은 잔치 상처럼 풍성했다. 풍년을 노래하듯 들판가득 알곡들의 풍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열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화들짝 놀란 영미는 고개를 돌려가며 차창 밖을 보고 또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환영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간간히 생각은 났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바삐 사느라고 가슴속 깊이 묻었던 사람이 아니던가. 어느덧 기차는 종점인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영미가 옷가게를 할 때는, 동대문시장 도매상에 자주 왔었지만, 시간에 쫓겨 한가하게 시내 구경 한 번 하지 못했다. 영미의 눈에는 서울 문 안의 풍경이 마치 다른세상을 보는 듯 신비로웠다.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개미 군단처럼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들도 신기했다. 종로통엔 멋쟁이 아가씨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삐 오고갔다. 시골의 한가한 모습과는 달리 생동감이 넘치는 시내의 모습에 영미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광화문에 위치한 회사빌딩으로 들어섰다. 말로만 들었던 유리알 같은 대리석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벽면 가득히 걸려있는 대형명화는 영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회의실에는 해당간부와 실무자들이 모여 있었다. 영미는 바짝 긴장을 했다. 그중 여러 번 농장을 방문하여 필요한 자료를 챙기며 서류보완을 요청했던 낯익은 이대리의 얼굴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서 마음이 편안해 졌다. 영미부부는 이대리의 소개로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담당자의 자세한 브리핑이 있은 다음 미리 작성해 놓은 서류에 양측이 서명을 했다. 이번에는 영미와의 계약이 남았다고 한다. 영미는 담당자로부터 가공공장 시설확충 내용과 생산품은 전량 모회사로 납품된다는 설명을 자세히 들었다. 영미는 남편과 계약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 했다. 담당자는 가내공업책임자가 영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창업주와 계약을 해야 하는 것 이라고 했다.
농장과 가공업은 분리되어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졸지에 영미가 친환경 건강식품공장의 사장이 되었다. 영미는 마지막 서명을 하기위해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였다. 서명을 마친 영미는 갑자기 ‘안영미사장님!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났습니다’ 하는 소리에 흥분이 되어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을 쳤다. 모든 절차를 끝낸 담당자는 인터폰으로 ‘지금 계약이 끝났다’ 고 어디론가 보고를 했다.
“사장님께서 사장실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사장실로 향하는 영미는 드디어 구세주 같은 사장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었다.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였다.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다. 영미는 입안이 바짝 바짝 말랐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사장이 들어섰다. 실무자가 소개를 했다. ‘조민재 사장님이 십니다’ 누구? 순간, 영미는 귀를 의심했다. 사장은 영미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안녕 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한 식구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동업자가 되어 기쁩니다. 안영미 사장님!”
영미는 얼결에 민재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지만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렇게 꽁꽁 묶어 가슴속에 밀쳐버렸던 민재가 중후한 신사로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이십오 년 전, 그 옛날 달빛에 넘어져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영미가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 했던 그 눈빛! 영미의 가슴 한쪽에 무겁게 매달려 있던 추, 그 추가 툭 하고 떨어졌다.
영미부부를 전송하고 방으로 돌아온 민재는 의자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민재를 위해 희생한 영미는, 민재에게 버팀목이고 성공을 위한 양분이 되어 주었다. 민재는 영미의 희생을 마음속에 무겁게 품고 있었다. 어떻게 영미를 잘 살게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친환경 파트를 구상하고 추진하였다. 농장과 계약을 하기위해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해 여러 면에서 도와주기도 했었다.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며 밀어내던 영미의 모습은 언제나 민재 가슴에는 은인으로 살아있었다. 영미를 생각하면 항상 아리던 가슴이었기에, 민재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오늘은 밖에서 와인 한잔 하면서 함께 식사 합시다.”
아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정말이예요? 당신 좋은 일 있나봐요.”
돌아오는 기차에서 영미는 잠들어 있는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혼란 스러운 머리를 잠재우며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나날 민재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농장으로 돌아온 영미는 사무실 탁자서랍 깊이 간직한 화선지를 꺼냈다. 그리고 허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허브 차의 향기가 영미의 머릿속을 휘돌아 나갔다. 창문을 열었다. 서녘 하늘에 불타는 노을이 여울처럼 일렁거렸다. 영미는 커다란 붓으로 먹을 듬뿍 찍었다. 한 폭의 난이 시원스레 화선지를 적셔 나갔다.
*끝까지 졸작을 일독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미진한부분이 많아 틈틈히 교정을 할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당분간 수필방을 간간히 들릴 것 같습니다.
양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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