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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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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렬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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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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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8-05-23 13: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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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날개 갓
매미날개 갓
김경렬
삼십 중반에 부모님 두 분을 지병으로 보내드렸다. 아이들도 취학 전이었다. 주위에서들 모두, 고매한 분이라고 존경을 받던 양친이셨기에 자녀들을 위해서도 오래 사셨어야 했다. 어머니는 선비의 아내로, 대 소가를 아우르는 종부로 너그럽고 대범하셨다. 뛰어난 요리 솜씨에 올바른 예의범절이며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다.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비암으로 먼저 떠나신 어머니 뒤를 이어 이태 후에 아버지마저 간경화로 어머니를 따라 가셨다. 이년에 걸쳐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의지할때 없는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 하물며 부모님을 모셨던 미혼인 동생 남매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겨우, 부모님의 노고를 헤아릴 수 있었거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보내드렸기에 그 허탈함이 극에 달해 많이 힘들었었다.
산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부모님을 보살펴 드렸던 막내 동생 남매를 혼인시키고, 우리 육 남매는 모두 서울에 모여서 살았다. 고향 집은 세를 주고, 마침 시댁이 같은 도시였기에 년 중 서너 번 명절과 생신 그리고 어버이날에는 시어른들을 뵈러 고향을 내려가곤 하였어도, 내가 자란 그 동네는 그리움만 안고 지나쳐야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온 식구가 다함께 다닐 수 있는 종교 생활을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번, 가족이 함께 성당엘 나가면 자녀들 정서에도 좋을 것 같았다. 종교 생활이라고는 일 년에 한두 번 정초와 초파일에만 절에 다녀오는 것이 고작 이었다. 지금은 시내에 포교원 불당이 곳곳에 있지만 그 때는 시내에서 떨어져 산속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아이들하고 함께하기는 어려웠다. 남편과 상의 끝에 성당에 다니기로 의견을 모았다.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은 교리 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는 절차가 있었다. 맞벌이였기에 교리 공부를 하는 날은 성당으로 퇴근을 하였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자리를 잡아놓았고 피곤해서 졸면 서로 살짝 건드려 잠을 깨우며, 육 개월의 교리를 무난히 끝냈다. 드디어 영세 받을 날이 가까워졌다. 시댁 어른들도 일 년에 한두 번, 절에 다시시기에, 영세를 받기 전에 시어른께 말씀을 드리고 재가를 받고 싶었다. 당일치기를 하기위해 혼자서 중앙선 열차에 올랐다. 선로가 울타리에 넝쿨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살랑 거리며 인사를 한다.
열차의 앞자리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매미날개 같은 갓을 쓰신 노인이 한분 앉아 계셨다. 왠지 예도를 중시하는 분 같아 조심스러웠다. 열차 안은 초여름 더위로 후덥지근했다. 열차 내를 오가는 홍익수레에서 음료수 두 병을 사서 한 병을 노인에게 드렸다. 매미날개 갓을 쓴 그 노인은 처음엔 사양을 했지만 촌로를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다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까지 가느냐? 뉘 집 따님이 이렇게 참하시냐면서 당신은 평생을 제천에서 살고 있다고 하셨다. 부친의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재차 물었다. 마지못해 제 아버지는 김자0자0자를 쓰시는데 십여 년 전에 작고하셨습니다. 했더니 아이구!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루마기 섶을 여미시며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지 않는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나는 그 분의 두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스승님의 따님을 이렇게 뵈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하며‘선친께 가르침의 은혜를 입은 보잘 것 없는 늙은이올시다’하였다. 스승님은 생전에 덕을 많이 쌓으시고 복을 지으신 훌륭한 분이셨다면서, 존경하는 스승님을 뵌 것이나 진배없다고 감격스러워 하는 그 어른은,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 있었다. 졸지에 당한 놀라움으로 그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 분은 당신이 젊었을 때 아버지를 찾아가 공부하던 회고담을 들려 주셨다. 듣노라니 생전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내 기분도 숙연해 졌다.
제천역에서 아쉬워하는 그분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시댁으로 가기위해 버스에 올랐다. 시댁에 들어서니 갑자기 무슨 일로 내려 왔느냐고 몹시 궁금해 하셨다. 어머님이 절에 다니시는 줄 알기에 미리 말씀 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되어 왔노라고, 자초지종 말씀을 드렸다. 아이들과 성당에 다니기로 결정한 이야기를 들으신 시부모님은 그 일로 굳이 내려왔냐고 하셨지만, 속으로는 흐믓해 하시는 표정이셨다. 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영세 잘 받고 건강하게들 잘 지내라’고 덕담까지 해주셨다. 곧장 올라가야 했기에 어머님은 이것저것 밑반찬거리를 부지런히 한 보따리 챙겨주셨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량리행 열차에 올랐다. 피곤한 몸을 가누며 눈을 감았다. 어릴 때 고향집이 펼쳐졌다. 담배 한 갑을 사들고 아버지를 찾아오던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가 문득 떠올랐다. 가끔씩 찾아와 반나절이나 사랑방에 머물다 가곤 했다. 어머니도 그 아저씨를 다정하게 대해 주셨기에 누군지 물어 보았다.‘어릴 때 조실부모로 배우지 못해 남의 집 일을 해주며 살아가는 착한아저씨’라고 했다. 그 아저씨는 주인댁 심부름으로 아버지를 자주 찾아왔었다. 항상 누구에게나 인자하게 대해주셨던 아버지를 그 분은 존경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주인장의 허락을 받아 가끔씩 공부를 하러 오게 되었다고 했다.
대체 그 아저씨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궁금했다. 사랑방 문 앞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글을 모르는 그분에게 명심보감을 읽어주시며 사람의 도리와 지켜야할 예를 설명하고 계셨다. ‘듣고 깨달아 행할 수 있음도 큰 공부’라고 마음공부를 시켜주는 것 같았다. 가을이 되자 세경 받은 곡식자루를 어깨에 메고 왔다. 아버지께서 아저씨가 돌아갈 때 한사코 돌려보내던 기억도 났다. 어릴 때 그 아저씨가, 열차 안에서 까만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여미며 인사하던 그 할아버지였다.
고향 집엔, 항상 사람들 발길이 이어졌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버지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오래도록 담소를 하기도 하였다.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인을 통해 도와 주셨고 당신의 능력이 닿는 한 손수 해결해 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생전의 아버지덕성이 후대에 이렇게 환대를 받을 줄이야! 뜻밖의 일이었다. 그날의 감동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새삼 저세상에 계시는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가 발달하여 이기적으로 변하고,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황금만능시대가 되었다. 예를 지키며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작은 실천이 아쉬운 현실 속에서 은혜를 알고 아버지를 대하듯, 예를 다했던 그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모두가 친절한 이웃이 되고 덕스런 언행으로 교류 한다면 이보다 값지고 보람된 삶이 또 어디 있으랴. 창문을 열었다. 아카시아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열차는 어느 새 청량리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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