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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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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김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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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렬 수필가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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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자 |
김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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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8-07-11 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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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선지 (2)
. (2)
추적추적 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오후가 되자 직장 여성들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몰려와 영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바빴다. 시골은 도시보다 일찍 인적이 끊기므로 영미의 가게도 아홉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그날따라 유난히 고객들이 많아서 영미는 파김치가 되었다. 일찍 문을 닫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미네 옷집입니다.”
“그동안 안녕 하셨습니까? 원주 승리부대 조민재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씩씩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구~”
“아, 네, 지난달 기차에서 만났던 군인 아저씨 조민재입니다”
영미는 화들짝 놀랐다. 그동안 바삐 지내느라 하얗게 잊고 있었던 군인이었다.
“어머나! 안녕 하셨어요? 깜짝 놀랐어요.”
그의 목소리를 듣는순간 영미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전화기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영미의 가슴에 꽃물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 안부를 물으며 가게는 잘 하고 있는지, 자상하게 물었다. 잠깐 짬을 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자주연락을 하겠다며 ‘깜짝쇼’ 마냥 전화를 끊었다. 영미는 예상치 못한 그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팔딱거리고 마음은 마치 구름을 타고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점차 그를 생각하는 날이 거듭되었다. 그가 떠오르면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공연히 혼자 미소를 짓곤 하였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그와 두 손을 맞잡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푸른 초원을 마구 달리며 깔깔대며 웃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날은 지나가는 군인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그를 생각하는 날들이 한달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부는 가을 한복판이 되었다.
저녁노을에 비친 단풍이 유난히 빨갛게 단장을 한 오후였다. 불현듯, 주말에 ‘특박 휴가’ 로 내려오겠다는 연락이 그에게서 왔다.
"영미씨! '특박 휴가'를 받았습니다. 영미씨 만나러 갑니다. 주말에 시간을 내 주실수 있습니까?"
영미는 '특박 휴가'는 공을 세우거나 좋은일에 주는 공로휴가라는것을 어렴프시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봐요. 그날 연락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영미의 어깨에 신바람이 났다. 아! 드디어 만날 수 있다. 흥분한 나머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가게 안을 맴돌았다. 마음은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둥실둥실 발걸음은 구름신을 신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진열대를 바라보며, 그와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을까, 이 옷 저 옷을 꺼내들고 걸쳐보았다. 진열대에 있던 끈이 긴 가방을 매 보기도 하고, 작은 가방을 들고 흔들어 보면서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하는 영미는 그를 만날 상상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른 새벽, 바지랑대 끝에서 까치 한 쌍이 총총거리며 지저귀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내려오기로 한 날이다. 종일 전화통만 바라보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영미를 비웃는 듯 전화통은 유난히 잠잠했다. 오후가 되자 손님마저 뜸해, 기다리는 시간이 더없이 지루했다. 혹시 사정이 생겨 못 오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 하고 있는 그 때,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영미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수화기를 잡는 영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근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영미네 옷집입니다.”
영미는 목소리마저 떨렸다.
“영미냐? 오늘은 몇 시에 들어 오냐?”
엄마의 목소리다. 영미는 실망한 나머지 짜증이 났다.
“엄마!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어요.”
엉겁결에 거짓말로 얼버무렸다. ‘역으로 나가볼까’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길바닥을 휩쓸고 있는 가을바람이 낙엽을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옷깃을 여미고 돌아서는데, 길 건너 가로수에 누군가 기대서서 영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영미는 어두워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불빛에 서있는 영미를 알아보고 하얗게 앞니를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영미는 그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치고, 얼굴은 불볕 속을 헤맨 듯 확확 달아올랐다. 때 마침 어둠속이라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드러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영미씨, 마음이 너무 급해서 전화할 시간도 아까웠습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처리하느라 정신없었어요.”
그 소리를 들은 영미의 얼굴이 박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민재는 ‘특명보고서’ 를 작성 하느라고 출발이 늦어졌다고 했다. 영미는 종일 애태우며 두 눈이 빠져라 기다렸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엉뚱한 말을 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정이 생겨서 못 오시나했어요.”
“제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는데요, 영미씨 만날 생각만 하면, 하루하루가 그렇게 더디고 느린지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영미는 대답대신 미소만 짓고 있다.
“아침 일찍 떠나려 했는데, 상관의 명령이라 꼼짝없이 일을 하면서 차를 놓치면 어떻하나 마음을 얼마나 조렸는지 모릅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민재는 얼마전에 영미를 만나러 가겠다는 일념으로 평소와는 달리 이를 악물고 어려운 극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힘든 순간마다 영미를 떠올리면 힘이 솟았다. 민재는 힘든 줄도 모르고 소대원들의 선봉에 서서 험준한 산도 순식간에 오르내리며 까맣게 높은 절벽에서 강으로 뛰어 내리는 위험한 낙하 훈련을 한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고 훈련으로 끝냈던 것이다. 그 결과 민재의 소대가 단체로 포상휴가를 받았다고 했다. 영미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제일 먼저 휴가를 신청했다. 더구나 힘든 훈련도 영미생각을 하면 힘든 줄 몰랐다는 민재의 말에 영미는 설레였고 한편 감동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유격 훈련은 두렵지만 한편 재미도 있습니다. 이끄는 선봉의 능력도 중요해서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영미씨 덕분에 성공하였습니다.”
믿음직스러웠다. 사내답고 씩씩한 그를 보면서 영미는 한껏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영미는 남자 친구가 처음이었다. 좁은 시골마을이라 소문이 날까, 부담스러웠지만, 그를 보는 순간 좀 전에 걱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영미는 그에게 군인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휴가동안, 관광은 영미가 책임지고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충성!”
민재는 얏호! 주먹을 불끈 쥐고 펄쩍펄쩍 뛰어 올랐다. 영미는 민재의 그런 모습이 천진스러워 깔깔대며 웃었다. 저녁식사를 하기위해 유명한 ‘황태요리 집’ 으로 민재를 안내했다. 그 식당의 대표 음식인 북어찜과 황태구이를 시켰다. 민재는 부대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라며 접시를 깨끗이 비우며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 북어요리는 정말 처음입니다. 영미씨와 함께여서 더 맛있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영미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깃든 모교를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먼저, 영월에서 ‘아름다운 학교’ 로 소문난, 숲속의 여자고등학교, 제 모교를 안내 하겠습니다. 그곳은 영미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보고랍니다.”
“영광입니다. 영미씨!”
영미는 민재와 나란히, 학교로 향하는 울창한 가로수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교정을 한 바퀴 돌며 영미는 신나게 조잘대기 시작했다.
“일학년 때 미술대상을 탔어요. 그때 미술 선생님은 미술대를 가라고 했답니다.”
“우와, 미래 화가님이시군요.”
“부모님 몰래 미술대를 지망하고 합격을 했어요. 집안이 어려워 포기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민재는 영미가 합격한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는 말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장녀의 도리를 다하는 영미가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영미는 달리기를 잘해서 체육대회 때는 릴레이 선수로 뛰었다는 이야기. 배구를 잘해서 배구 선수도 했었다는 이야기. 예술제에서는 연극도 했다는 이야기. 관내 한글날 백일장에서 금상을 탔다는 이야기. 민재는 영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재다능한 아가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였다.
제대하면 장가들라는 부모님 말씀이 귓가를 맴돌았다. 마음이 넓고 속이 깊은 영미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민재는 이렇게 예쁘고 똑똑한 영미를 만난 건 앞날이 꽃길로 열려있는 환상 그 자체였다. 영미가 다녔던 학교 교정엔 푸른 달빛이 교교히 비치며 늘어진 나무 가지가 그림자를 드리운 풍광이, 잘 만들어놓은 영화세트장 같았다. 민재는 영미의 손길이 하나하나 묻어 있는 것 같은 교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농구대 밑에는 아이들이 두고 간 농구공 하나가 졸고 있었다.
민재는 농구대 밑에 있던 공을 주어 들고 몇 번 튀기더니 펄쩍 점프를 했다. 공은 쉽사리 꼴대의 그물을 통과했다. 영미는 살금살금 달려가 공을 빼앗으려다 획 돌아서는 그와 부딪치는 바람에 그가 모래 바닥에 벌러덩 넘어졌다. 당황한 영미는 미안한 마음에 두 손을 내밀었다.
“어머나! 미안해요. 민재씨, 제가 일으켜 드릴께요”
“괜잖습니다. 저혼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 손을 잡으세요. 제가 도와 드릴께요.”
그 순간, 민재는 영미의 두 팔을 확 잡아당겼다. 영미는 그의 몸 위로 포개지고 말았다. 달빛에 비친 영미의 얼굴이, 화들짝 놀라 똥그래진 두 눈이 달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민재는 놀란 토끼처럼 굳어버린 영미를 보는 순간, 너무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와락 영미를 껴안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뿌리칠 겨를도, 싫다는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쩜 영미자신이 기다린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지가 축 늘어진 버드나무아래 벤치에 앉았다. 영미는 그의 어깨에 기대여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미로운 기운이 영미의 몸을 휘감았다. 휘영청 둥근달은 수줍어하는 영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서 민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민재는 달빛에 비친 영미의 모습이, 미의 여신 헤레나가 하강 한 듯 아름다웠다. 사랑에 빠지게 한다는 허리띠(케스토스)를 두른 것은 아닐까, 영미의 어깨를 감싸 주는 민재의 가슴은 영미를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민재는 말없이 영미를 바라보았다. 태양의 여신처럼 빛나는 영미의 볼에 살짝 입맞춤을 했다. 영미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이 황홀했다. 달님도 구름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영미는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냉정을 찾았다. 아침 일찍 만나자며 민재를 혼자 여관으로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미는 자리에 누워 밤새, 들뜬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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