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2-01 11:45

ㆍIP: 124.xxx.149

슈킹 (92회)

동인이 낸 명의대여자 광고의 휴대폰이 울렸다. 통화를 끝낸 그가 손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나갔다.

서류봉투를 사온 동수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짜증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였다.

그의 기분을 달래주려 두 잔의 커피를 탄 현우가 한 잔을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김이 오르는 커피를 마시며 오늘 오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포커게임에 빠져 탄성을 지르는 그의 단순함이 현우는 부러웠다. 게임에

몰두해 있는 그에게 점심을 먹자고 물어 보려는 찰나 금요일에 전화로 상담한 손님이

찾아왔다.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한 서류를 내놓으며 자기는 3천 5백만 원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딸은 지금 여중 3학년인데 학교에 갈 수가 없어 집에서 인터넷 수업을 들으며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게 그녀의 첫마디였다.

공부도 잘하고 밝았던 딸이 무릎 통증을 호소한 것은 1년 전으로 안색이 창백해지고

잘 먹지 못한 것은 그보다 전이었지만 병원비가 없어서 계속 미루기만 했다고...

그러다 잘 걷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야 병원에 데려갔다고 했다.

병명은 만성 신부전증! 체내 독소를 걸러 주어야 할 신장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서

독소가 다리를 침범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제 때에 병원만 찾았어도...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정말

잘 키우고 싶었는데..."

그녀는 소리 없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10년 전 남편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그녀는 약해질 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양품점을 운영했고 딸과 다섯 살 위인 아들를 키웠냈다고 한다.

새벽 장을 보며 부지런히 일한 결과 가게가 딸린 조그만 집까지 마련했으나

어느 날부터 손님의 발길이 뜸해졌다고 했다. 생활비조차 벌기 어려운 상황을

바꿔보고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와 새 물건을 들이고 홍보도 했지만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다.

은행 빚에 사채이자까지 불어나는 바람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평생을 바쳐

마련한 집을 팔아 급한 빚을 갚고 새 출발을 꿈꿀 무렵 딸이 자리에 누웠버렸다고

했다. 병원을 오가느라 가게를 닫는 날이 많아졌고 차상위계층으로 등록되어

공제 받는 어느 정도의 약값과 병원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대로 빚이 되는

상황이라 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 없는 그녀는 딸을 살릴 방도를 찾느라 신장이식을 위한

조직 적합성 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완전한 일치.'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1,000분의 1확률도 안 될 정도의 극히 드문 경우로 조직이

일치한다는 판정을 받았고 딸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큰 수술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술비 3천 5백만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기적이란 거 믿지 않았는데 검사를 받고 정말 기적 같은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가닥 희망이 돈이 없는 제 탓으로 절망으로 바뀌려 하고 있어요."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글썽이며 그에게 소리 없는 절규를 하고 있었다. 현우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눈물을 참으려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는 벽에 머리를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난감해진 그는 어쩔 줄 몰랐다.

"대출이 잘 되지 않겠어요."

이 말만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라고 생각한 그는 무척 안타까왔다.

"식사 하셨어요?"

방금 자신이 뱉은 말에 마음이 답답해진 그가 그나마 그녀를 위해 당장 해줄 수 있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점심을 안 했냐고 깜짝 놀라며 못난 자기의 가족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어 고맙다고 했다. 빨리 식사를 하라며 일어난 그녀는 은행을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명의대여자 손님을 만나러 갔던 동인이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돈 찾을 여자와 이야기가

잘 되었고 이제 한 명만 더 구하면 된다고 했다. 여자 4명이 각각 10억씩을 찾으면 될

거라는 것이 그의 계획인 것 같았다.

현우는 이 점에서도 그와 생각이 달랐다. 하지만 저번에 그가 먼저 의견을 제시하였을 때

동인의 무뚝뚝한 반응을 떠올리고는 얼른 입을 막아 버렸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선 것은 저녁 7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사무실 앞에서 그들과 헤어진

현우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오늘 서류 준비하셨다면서요. 마침 볼일이 생겨 이 근처를 지나다 수혜 씨 집과

가깝더라고요. 바쁘신데 내일 사무실로 오실 필요 없이 제가 받아가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대신 다음에 커피 사셔야 합니다."

그는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 놀랐다. 그녀는 그래 주면 더욱 고맙다고 했다.

그는 미리 그녀에게 전화하여 오늘 사무실에 올 수 있냐고 물어 보았고. 그녀가 내일

들르겠다고 했었다.

지금 현우가 전화한 것은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도 어느 한켠에 있었지만 그녀가 사무실을

방문하여 그들과 대면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하고 중요한 사건이다. 그들은

수혜의 존재를 모른다. 그녀는 선우의 머리속과 지갑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아군을 적에게

노출시켜서는 작전에 치명적이지 않겠는가!

내일부터는 그가 낸 명의대여자 광고를 보고 문의전화가 온다. 퇴근 후에도 독자적인

업무로 하루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열흘도 안 남았다.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표와

운명이 바뀔 것이다.

맞은편 고층 빌딩 옥상에 설치된 광고 조명판에 '디데이 9일'이라는 반짝이는 문구가 그의

눈에만 보였다.

슈킹 (93회)

슈킹 (9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