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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2-07 14:15
ㆍIP: 124.xxx.149
슈킹 (97회)

                     
                      - 슬픈 사슴과의 첫사랑 -


 12월 19일 (수)

 아직 시간이 일러 현우 외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오늘 고려금융에서 내려오는

서류는 누구보다 현우가 기다렸다. 동인이 자포자기 하려던 것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내자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11시가 조금 지나 고려에서 보낸 서류봉투가 도착했다. 긴장된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인이 통장을 꺼내 앞면을 넘겼다. 그 순간 그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아이디는 S428067, 비번은 1218이었다. 현우가 이미 화이트보드에 적어둔

송영철 주민번호인 670824-1842920을 향해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동인은 그의 추측이 들어맞은 것에 적이 놀라며 자못 기분이 들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머리속은 잃었던 10억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쁨으로 흥분한 듯했다. 그리고

화이트보드의 아이디를 번갈아 쳐다보며 신기해했다.

 조금 후 고려에 개인손님으로 보낸 서류를 동수가 밖에서 갖고 들어왔다. 이

통장에 쓰인 아이디도 주민번호 앞자리 번호를 뒤에서부터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

결국 고려에서 만든 아이디는 나름대로 정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월요일은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 화요일은 그 번호를 뒤에서부터, 수요일은

뒷자리 숫자를 6개까지만, 목요일은 다시 그 번호를 반대로, 금요일은 전화번호로

해서 규칙적으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고려는 그 규칙에 의해 아이디를 만듦으로써 쉽고도 분실을 방지하면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라 현우는

생각했다.

 "그러면 이것으로 잔고업체의 정보파악은 다 끝난 거네. 이제 돈 챙길 일만 남은

거야."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동수가 주먹으로 책상을 탁 쳤다. 동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을 입에 갖다 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중년부부가 들어왔다. 남편 되는 사람은 쭈빗대며

거의 말이 없고 아내가 주로 이야기했다.

 아내는 청소가 힘들고 더러운 3D업종으로 분류되지만 웰빙바람은 소비자들의

주거환경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고 건강한 주택에 대한 소비자들의 욕구가 날로

늘어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기네 부부는 선진국형 시스템과 장비,

기술력을 도입한 청소대행 프랜차이즈에 가입하여 청소업을 하고 싶은데 창업비용이

부족해 이 사무실을 방문했다고 했다.

 창업비용은 가맹비, 청소장비 구입비, 차량 등 3천만원 정도이며 소자본으로

청소관련 장비를 싣고 이동하며 일하기 때문에 사무실을 둘 필요가 없는 무점포가

가능하다고 했다.

 옆에서 한동안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이 아내를 힐끗 쳐다보더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까지 일밖에 모르며 중소자동차 부품업체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납품하는 거래처가 부도나는 바람에 거기서 받은 어음들이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납품업체에서 받은 어음을 제가 이서하여 하청업체에 주었던 것입니다. 부도난

사장은 행방불명되어 연락이 안 되고 하청업자들은 저만 원망하고 책임을 물어

왔습니다. 저의 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영세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까지 일하면서 마련한 집과 자동차까지 팔아 빚잔치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남편은 아내의 손을 슬그머니 잡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아직까지 건강한 팔다리가 있으니 감사하지요. 아내가 먼저 이 일을

하자고 했지요. 한때 모든 걸 포기한 저를 이제껏 곁에서 묵묵히 참아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볼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해야지요."

 현우는 비록 그가 작은 키에 쭈글쭈글한 이마의 주름살로 나이보다 늙어 보였지만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다. 통장을 만들기 위해 나가며 어깨를 나란히 맞댄 중년 부부의 뒷모습을

보고는 언뜻 밀레의 만종 그림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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