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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1-20 09:54
ㆍIP: 121.xxx.166
슈킹 (82회)

       
           - 독자노선 선언 -


 12월 15일 (토)

 현우는 생각보다 일찍 눈을 떴다. 어제처럼 술을 섞어 마신 다음날은 여지없이

머리가 아팠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가까스로 지난밤의 일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어젯밤 각자의 파트너를 대동하고 술집 앞에서 헤어졌다. 시영의 가벼운

부축을 받은 그는 근처의 포장마차로 가서 그녀와 한잔 더 했다. 그가 따뜻한

어묵에 소주를 하고 싶다고 우겼던 것이다. 소주를 앞에 두고 내일 할 일을

하나하나 정리했었다. 시영은 그의 침묵의 의미를 몰라 현우의 기분을 맞추려

연신 조잘거렸다. 포장마차를 나온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가까운 모텔로 갔다.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가만히 일어났다. 그녀는 세상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샤워를 하였다. 온몸이 얼어 붙는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나자 머리속이 좀 맑아졌다.

 '시영 씨, 어제 위로해 줘서 고마워.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니 이해해 줘. 내가

먼저 꼭 연락할게.'

 먼저라는 단어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메모지를 남기고 모텔을 나오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은

한바탕 눈이라도 내릴 듯 짙게 흐려 있었다. 사무실까지는 택시로 10여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도착한 사무실 안은 냉기로 을씨년스러웠다.

 토요일에 출근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이 작업은 은행 업무하고 연관되기에

토요일에는 나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뚜렷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오늘

할 일이 태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겨야 하는 이 모든 일들을 혼자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용량의 386컴퓨터가 고성능 펜티엄을 능가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적군과도 싸우고 아군과도 전투를 해야 한다.

 그는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선불폰과 대포폰을 넣고 엔터를 쳤다. 선불폰 3개와

대포폰 2개를 번거롭더라도 각기 다른 판매업자에게 주문했다. 저번에 산 2개의

선불폰 중 하나는 희현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한 개 남은 선불폰과 지금 주문한 3개를 더하면 4개가 된다. 하나는 시영과

통화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대포폰으로 그녀와 통화를 해도 되지만

이 대포폰에 그녀와의 통화내역이 많아서 나중에라도 좋을 것은 없다. 특히

오늘서부터는 더욱 그러하므로 이제 구입하는 선불폰으로 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한 대의 선불폰은 정보지 회사와 통화할 폰이다. 나머지 두 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여분으로 두었다. 앞으로 폰을 주문할 시간도 부족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주문한 대포폰 중 한 대는 명의대여자 구함이라는 광고에 실을 전화번호이다.

선불폰 가지고는 일일이 상담해야 하는 요금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대포폰이

필요하다. 나머지 한 대는 동지에서 적으로 바뀐 그들에게 사용할 폰이다.

 그는 대포폰을 만지작거리며 월요일 오전에 해야 할 일이 머리속에서 서서히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전 9시가 지나면 그들은 출근해 있을 것이다. 이때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실명폰을 잃어버려 다시 폰을 구입하려고 매장에 있으니 조금 늦을

거라 한다. 사무실에 도착한 다음에는 그들의 휴대폰을 달라고 하여 새로운

번호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이 대포폰의 번호를 입력하는 것이다.

 그는 쓴미소를 띤 채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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