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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3-11-27 12:03
ㆍIP: 124.xxx.149
슈킹 (88회)

 "지금 저는 피아노 학원에서 오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안일을 돌보며 학원 일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마침 집 근방에 제가 원하던 조건의 가게가 나왔는데 조금씩

모은 돈으로는 많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대출을 받아 가게가 딸린 그 집을

피아노 교습소로 운영하려고요. 피아노 학원에서의 경험과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학부모님들을 많이 알아서 원생모집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다소곳한 자세로 또렷이 대출의 용도와 필요성을 간략하게 말했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뭔데요?"

 실례되는 질문이라는 말에 호기심 반 불안 반의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말씀하신 개인적인 사정이란 걸 알 수 있을까요?"

 대출과 관계없는 물음이라는 걸 그도 알지만 그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만약 그 사정이라는 것이 그녀의 아픈 상처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꼭 말을 해야 하나요? 대출과 관계 있는 건가요?"

 그녀가 또박또박 물어 왔다.

 "아, 아닙니다.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예상치 않은 그녀의 도발적인 물음에 그가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끍적거렸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설명한 그가 마지막으로 통장 발급은행 3개를

지정해 주었다.

 그녀는 평소의 다른 손님들과 다르게 대출이자, 상환 기간 등을 꼼꼼히 물어와

현우는 급히 둘러대느라 당황했고 등에 식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비록 짧은

대화시간이었지만 그녀의 당돌한 질문과 조리 있는 말투로 미루어 건성으로

대했다가는 의심은 물론이거니와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가 3개의 은행을 말했을 때 갑자기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침울해졌다.

 "말씀하신 3개의 은행 중 한곳은 힘들 거예요. 전에 그 은행에 대출보증을

선 적이 있는데 아직 그 대출금을 갚지 못했거든요."

 그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조금 전 괜한 물음에 본전도 찾지

못한 것이 떠올라 말을 꾹 삼켰다.

 "식사하셨어요?"

 말을 뱉고 나서야 그는 자기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4시가 조금 넘은

이 시간은 점심도 저녁도 먹기가 애매한 시간이었다.

 "예."

 그녀는 현우의 물음이 아마 점심을 말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가볍게 대답하고는

살짝 목례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 화요일 안으로 찾아뵐게요."

 '무슨 말인가 해서라도 그녀와의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의 생각은

생각에서 끝나버렸다.

 "예, 수혜 씨! 다음 주에 뵙는 것으로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녀는 현우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하얀

반코트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서는 날씬한 허리의 뒷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등본에서 아버지는 안 계신 것 같고 어머니와 남동생만 있음을 수혜의

돌림자인 수빈이라는 이름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떠난 후 라일락

향기가 나던 그녀의 음성도 함께 사라졌다. 오직 탁자 위에 놓인 엷은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찍힌 빈 종이컵만이 그녀의 흔적을 말해 주었다.

 마지막 한 개 남은 선불폰에 그녀가 직접 쓴 대출자 신상확인서에 적힌 휴대폰

번호를 입력했다. 그는 그녀의 등본을 접어 가방에 넣고 신상확인서 용지를 몇

번 접어 지갑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적사항이 적힌 어제 날짜의 일일

캘린더 메모지를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에 버렸다.

 이로써 그녀는 아니 최수혜는 이 사무실을 방문한 적도 상담한 적도 없다. 오로지

그의 머리속과 지갑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희현 씨, 나야 강 실장 오빠. 그동안 잘 지냈어요. 아직 가게 가려면 시간 좀

있지요. 가끔 통화만 하는게 미안해서 오늘 저녁이나 대접하려고요."

 희현에게 통화한 선불폰을 내려놓은 그가 다른 선불폰을 들었다.

 "시영 씨, 나야 강 실장 오빠. 컨디션은 괜찮아요. 아침에 인사도 못하고 나와서

미안해요. 내일 점심이나 저녁 때 편한 시간에 연락해요. 내가 식사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이 번호로 전화해요."

 이제부터 그에게도 아군이 필요한다. 누구의 도움없이는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희현과 시영, 수혜는 오늘부터 그와 끊을 수 없는 동지가 될 것이다. 그녀들은

현우와 한편이 된 것을 작업이 끝난 후에도 결코 모를 것이다. 아니 알아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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