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장춘희
ㆍ작성일	2015-11-22 14:58

ㆍIP: 121.xxx.149

아를르의 여인
‘아를르의 여인’ 장 춘 희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다.
억마구리 끓듯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드높은 소리가 창문을 타고 사정없이 복도로 쏟아져 나온다. 건강한 남자 아이들이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복도를 지나 교무실 문을 여는데 마주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하마터먼 부딪칠 뻔하였다.
“안녕하세요”
수업이 많은 날이라 피곤했다.
어지러운 머리에 맑고 밝은 음성이 음악처럼 들렸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운 얼굴이 웃고 있었다.
순간, ‘목관 악기’ 울림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가 않았다.
“오늘 마치고 만납시다”
교무실 문을 잡고 선체로 급하게 퇴근 후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직원회의는 없는 날이고 퇴근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박선생 바둑 한 판 둡시다”
옆자리의 오선생이었다. 영어담당인 오선생과 국어담당인 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소설은 발표 못했지만 우리는 명색이 작가였다. 오선생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지만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 자주 어울렸다.
잘 그어진 네모난 선 위에 검은 돌을 한 알 올려놓는 순간이면, 나는 언제나 전투적인 투지력을 세우고 온 몸을 바치는 전사가 되어 치열한 전쟁을 치루는데만 정신을 뺏기고 만다.
밀고 당기는 팽팽한 신경줄의 재미를 놓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그제서야 약속이 생각났다.
아차!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찻집으로 달려갔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우리학교 교생 실습을 나왔었고 그 날이 마지막 실습 날이었다.
실수를 한 것이다. ‘김현경’ 이름도 멋진 그녀에게 사과 엽서를 띄웠다. 답은 오지 않았고 그리고 그 일은 잊어버렸다.
육 개월쯤 지난 퇴근 무렵 그녀에게서 교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에 대해 가물 하던 기억이 눈앞에 확 닥아 왔다. ‘만납시다’ 했더니 ‘또 잊으시려구요’하며 웃는다.
“아니요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지난번 일은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또다시 들려온 ‘비제’의 음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실체도 없이 기계로 전해져 오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은 허황한 느낌이 나를 다급하게 했다.
그동안 잊고 지냈으면서 전화를 받고 보니 묘하게도 꼭 만나야 할 사람과 헤어져 있었던 듯 느껴졌다.
지난번 만나기로 했던 찻집으로 약속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곧바로 찻집으로 갔다. 약속시간은 일렀고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천천히 둘러본 찻집 풍경은 조금 엉뚱했다. 도무지 도시하고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웠다. 군데군데 글을 넣은 액자들도 걸려있었다.
그 중에 메밀밭이 찍힌 사진과 함께 이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었다.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 글을 읽으며 잠깐 작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작가는 흰 메밀꽃 밭에 숨이 막힌 게 아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첩첩한 산골이 젊은 지식인을 숨막히게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작품의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 자신의 심정을 표현 했던 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보는데 그녀가 들어섰다.
내가 보낸 엽서를 어머니가 받아서 잊어버리고 있다가 그 때서야 전해 받았다고 한다.
“거 참 내가 운이 좋은가 봅니다, 엽서가 버려지지 않고 김선생손에 들어가다니요”
그리고 막상 마주 앉아 말하는 걸 들으니 그녀는 정말로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목관 악기’ 울림 같은 좋은 목소리라 느꼈는데 내 귀를 칭찬해 주고 싶게도 그녀는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고 한다.
나는 음악 좋아하는 사람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친구 집은 그 지방유지여서 집이 부자였다. 그 날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 형은 여름 방학이라서 집에 내려와 있었다.
친구 집에는 시골에서 드물게도 잘 갖추어진 오디오 시스템과 클라식 LP판들이 있었다. 친구 형은 우리에게 세계적인 음악가를 소개해주며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 때 처음 알게 된 음악가가 ‘조르주 비제’였다.
1830년 10월 25일에 출생해서 37세에 요절한 프랑스의 천재 작곡가 조르주 비제, 본명 (알렉상드르 세자르 레오폴 Alexanre Cesar Leopold)의 진주 조개잡이, 카르멘, 아를르의 여인,등 난생 처음 오페라 음악을 들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천재 작곡가의 음악은 나를 날마다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 완전 빠져들 게 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끝날 때 까지 나는 친구 집에서 살다싶이 했다. 낮에는 친구 집에서 음악을 듣고 밤에는 비제가 영감을 얻었다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을 읽었다. 그러면서 별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스테파네트’를 아를르의 여인과 겹처 생각하면서 ‘스테파네트’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스테파네트를 느꼈던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은 매우 섬세하고 또 서정적이 여서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돌이켜 보면 아마 내 문학의 시작도 그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발표한 작품도 많지 않았고 또 유명한 작가도 아니어서 내 책을 서점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변두리 서점과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서 몇 안 되는 내 작품을 거의 읽었다고 한다.
‘산문집은 색체도 강렬하고 문체도 빼어난데 내용이 어둡고 조금 쓸쓸하다’고 했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중편정도의 분량인 ‘바람과 . . .’라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쓰는 동안 견디기 힘든 구속감 때문에 서둘러 마친 글이다. 언젠가 마음과 시간을 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써야지 하고 벼르고 있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미완성인체로 중편을 가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구성도 탄탄하고 등장인물도 주연, 조연 구별 없이 모두 생동감 있게 그려졌고 선생님 특유의 문체도 아름다웠는데 왜 서둘러 끝냈는 것 같은지 혹시 작가가 게으른 탓으로 중편으로 마친 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웠다’고 하며 웃는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 작품과 함께 나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나는 오만하고 성질도 사나워서 그동안 누가 내 글을 가지고 이러고저러고 입에 올리는 것을 싫어했다.
이렇게 내 앞에서 내 책을 가지고 자세하게 얘기하는 걸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내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쑥스러움이란 놈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서른도 한참을 넘은 나이인데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다. 어린 여자와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 갈수록 어색해지기 시작하면서 진지한 내 모습에 자꾸 멋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긴 시간을 음악이 있어 재미있게 보냈다.

당장 무슨 일을 낼 것처럼 다급하게 만나자고 해놓고는 헤어질 때 다음 만나자는 약속도 할 수 없는 것에 난감했다. 그러나 다시 만나서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난처함과 또 가끔씩 대책 없이 불쑥불쑥 말을 쏟아버리는 버릇까지 보태져서 헤어지며,
“김선생한테 청혼을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대 나이가 어려서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대도 아직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안하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이 다음에 청혼하러 갈테니 마음에 준비나 해두시오”
나는 이렇게 엉뚱스러운 말로 무안스러운 마음을 얼버무렸다. 그런데 뜻밖이었을 텐데 ‘그러세요’ 생글거리며 말을 받는다.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또다시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의식도 못하고 살았다. 그리고 그즈음의 세상은 시끄웠다. 패기 넘치고 시대를 사랑한 아름다운 청춘들은 무지한 권력의 힘에 눌려 많은 피를 흘렸다.
세상의 불행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지도 못하고 글쓰는 사람으로서 글로도 형상화 시키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숨을 곳이 있었다. 술이 였다.
개인적인 내 삶도 왜 그리 지루하고 허탈한지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선 듯한 절망감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도 날 술 먹게 했고, 파지만 뜯겨 나가는 글에도 술이었다. 이래저래 날이면 날마다 핑계를 대며 마셔치워도 핑계는 여전히 산처럼쌓여 나는 좀처럼 술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않되겠다, 너 같은 놈은 결혼이라는 무덤에다가 파묻어야만 인간 되겠다”
젊음이 무색하리만큼 피폐해져가는 내 꼴을 보다 못한 친구가 중매를 하겠다고 나섰다.
알맞게 차갑고 적당히 쓸쓸한 늦가을의 어느 토요일, 친구와 남산에 있는 어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맞선을 보기로 한 것이다. 썩 내켜하는 마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싫다하는 마음도 없이 약속 장소로 갔다.
그저 쉬는 날 친구와 차나 한 잔 하자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친구와 커피를 시켜서 마-악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머리꼭지 위에서 또다시 비제의 음악이 들렸다.
“우린 서로 배신을 한 건가요?”
찻잔을 손에 든체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현경은 배신자 같은 음흉한 웃음이 아닌 밝고 건강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순간, 어떤 예감과 함께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현경은 친구와 같은 학교 음악 선생이었다.
그날 이 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못보면 죽을 것처럼 서로에게 열중했다. 그동안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큰 힘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처럼 뒤늦은 만남을 억울해하기까지 했다.
나는 내 나이도 잊고 현경이 또래의 연인들이 하는 온갖 유치한 행동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다녔다.
그러나 결혼 승낙은 순탄치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조건이 사윗감으로는 현경이 부모님 기대치에 어림없이 못미치는 조건이었다.
거기에 더 보태서 현경이 어머니는 소설 쓰는 사람에 대해서 나쁜 인식을 하고 있었다. 글 쓴다는 핑계로 술이나 먹고 제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어디서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넘첬을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외치며 그녀 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내 평생 그런 열정 넘치는 나를 본 게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만난지 삼 개월도 안되서 장모님의 굳센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이라는 무덤을 서슴없이 팠다.

백낙은 2015-11-22 20:30	장춘희 작가님. 맛갈진 글솜씨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네요. 결혼이라는 무덤을 서슴없이 팠다고 하셨는데 무덤도 무덤 나름이겠죠. 산골자기 조그마한 흙무덤도 있지만 이집트 피라밋 같은 무덤도 있지요. 그 속을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비밀의 공간, 사랑의 향기 가득한 밀실의 아름다운 공간일 줄 믿습니다. 좋은 글 자주 뵙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경렬 2015-11-23 02:00	장고중에 이 멋진 작품이 탄생 하였네요. 잘생긴 옥동자! 순산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극적인 상황이 결혼으로 꼴인하는 멋진 한쌍이 될것 같습니다. 차가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서재에 묵향 가득한 향필하시기바랍니다.

시래기

첫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