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장춘희
ㆍ작성일	2019-02-28 13:59

ㆍIP: 119.xxx.181

아를의 여인
아를의 여인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섰다. 악마구리 끓듯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드높은 소리가 열려 있는 창문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나왔다. 중학생 남자아이들의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복도를 지나 교무실 문을 여는데 마주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하마터면 부딪칠 뻔하였다.
“안녕하세요.”
오전부터 쉬지 않고 6교시까지 수업이 있는 날이라서 몹시 피곤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가 목관악기를 연상하게 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게 되었다. 싱그러운 빛이 도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동안 자주 마주치던 얼굴이었지만, 그냥 지나치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교생실습을 나온 실습생이었다. ‘오보에’ 울림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교무실 문을 잡고 선채로 급하게 퇴근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직원회의는 없는 날이고 퇴근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박 선생 바둑 한 판 둡시다.”
옆자리의 오 선생이었다. 영어담당인 오 선생과, 국어담당인 나 또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소설은 발표 못했지만, 우리는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었다. 오 선생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지만, 학교 내에서 친구처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잘 그어진 바둑판 위에 동그랗고 매끄러운 돌을 한 알 올려놓는 순간부터 나는 사람이 무섭게 변하고 만다. 그 시간부터는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른다. 오로지, 어느 돌을 어디로 옮겨서 무슨 수를 둬야 하는지 돌하고의 치열한 전쟁을 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끌시끌하던 교무실이 조용해진 것을 느꼈다. 그때서야 밀고 당기는 팽팽한 승부의 끈을 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아차, 하며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허둥지둥 찻집으로 달려갔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날이 그녀의 마지막 실습 날이었다. 그녀에게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김현경, 이름도 멋진 그녀에게 사과 엽서를 띄웠다. 답은 오지 않았고, 그리고 그 일은 잊어버렸다.

삼 개월쯤 지났을 무렵,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교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였다. 그녀에 대해 희미하던 기억이 눈앞에 선명하게 닥아 왔다. 만나자고 했더니 또 잊으시려고요, 하며 웃는다.
“아니요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지난번 일은 사과하지 않았습니까.”
또다시 들려온 ‘비제’의 음악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은 생각조차도 안하고 지냈으면서 막상 전화를 받고 보니 묘하게도 꼭 만나야 할 사람과 헤어져 있었던 듯 느껴졌다. 그러나 눈앞에 실체도 없이 기계로 전해져 오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은 허황한 느낌이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지난번에 만나기로 했던 찻집으로 약속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곧바로 찻집으로 갔다. 약속시간은 아직 일렀고, 그녀는 오지 않았다. 커피를 시켜놓고 천천히 둘러본 찻집 풍경은 조금 엉뚱했다. 찻집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군데군데 글을 넣은 액자들도 걸려있었다. 그 중에서 메밀밭이 찍힌 사진과 함께, 이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한 부분이 소개되어 있었다.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였다.
그 글을 읽으며 잠깐 작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효석작가는 흰 메밀꽃 밭에 숨이 막힌 게 아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첩첩한 산골이 젊은 지식인을 숨 막히게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작품의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 자신의 심정을 표현 했던 게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보는데 그녀가 도착했다.
내가 보낸 엽서를 어머니가 받아서 딸에게 전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했다. 최근에야 발견하고는 딸에게 전해 주었다고 했다.
“거 참, 내가 운이 좋은가 봅니다. 엽서가 없어지지 않고 김 선생 손에 들어가다니요.”
그리고 막상 마주 앉아 말하는 걸 들으니 그녀는 정말로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악기 중에서 오보에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오보에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역시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음악 하는 사람과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중학교시절, 여름방학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간적이 있었다. 친구네 집은 아버지가 의사여서 그 지방에서는 부자였다.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 형은 여름 방학이라서 집에 내려와 있었다. 그 친구네 집에는, 시골에서는 드물게도 잘 갖추어진 오디오 시스템과 클래식 LP판들이 있었다. 친구 형은 우리에게 오페라음악도 들려주었고 세계적인 음악가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 때 처음 알게 된 음악가가 ‘조르주 비제’였다.
37세에 요절한 프랑스의 천재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진주 조개잡이, 카르멘, 아를의 여인, 등을 만든 음악가였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 천재 작곡가의 음악은 나를 날마다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음악에 완전 빠져들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방학이 끝날 때 까지 나는 친구네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낮에는 친구네 집에서 음악을 듣고, 밤에는 비제가 영감을 얻었다는 알퐁스 도데, 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스테파네트’를 아를의 여인과 겹쳐 생각하면서 스테파네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김현경,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스테파네트를 느꼈던 것이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은 매우 섬세하고 또, 서정적 이여서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돌이켜 보면 내 문학의 시작도 아마 그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내 엽서가 뒤늦게 그녀 손에 들어간 우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웃었다. 웃음 덕분에 갑자기 우리사이의 어색한 기운이 사라졌다. 그녀는 성격이 밝고 활달한 편인 듯 했다. 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도 눈치를 보지 않고 담담하게 펼쳐나갔다.
그 당시 발표한 작품도 많지 않았고 또. 유명한 작가도 아니어서 내 소설을 서점에서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변두리 서점과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서 몇 안 되는 내 작품을 거의 읽었다고 한다.
산문집은 색체도 강렬하고 문체도 빼어난데 내용이 어둡고 조금 쓸쓸하다 고 했다.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중편정도의 분량인 ‘바람에 지다.’ 라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쓰는 동안 견디기 힘든 구속감 때문에 서둘러 마친 글이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다시 한 번 제대로 써 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는 작품이었다. 말하자면 미완성인체로 중편을 가장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구성도 탄탄하고 등장인물들 모두 생동감 있게 그려졌고, 선생님 특유의 문체도 아름다웠는데 왜 서둘러 끝냈는지, 혹시 작가가 게으른 탓으로 중편으로 마친 건 아닌가 싶어서 안타까웠다고 하며 웃는다.
놀랍게도 그녀는 작품과 함께 나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그 때까지 어느 누구도 내 앞에서 내 작품을 가지고 평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성격도 오만하고 괴팍하기도 하지만, 내 글을 가지고 면전에서 칭찬을 한다거나, 비평을 하면 듣기 민망함 또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을 남을 통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들어보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는 음악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음악뿐만이 아니라 문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저녁을 먹고, 다시 찻집으로 옮겨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쑥스러움이라는 놈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는 생동감이 내 나이를 돌아보게 했다. 나는 서른도 한참을 넘은 나이이고,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진지한 내 모습이 자꾸 멋쩍어 졌다.
음악도, 문학도, 그녀의 앳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나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당장 무슨 일을 낼 것처럼 다급하게 만나자고 해놓고는 헤어질 때 다음 만나자는 약속도 할 수 없는 것에 난감했다. 그러나 어린 여자와 다시 만나서 어색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끔씩 대책 없이 불쑥불쑥 말을 쏟아버리는 버릇이 있기도 했지만, 그 순간은 난처한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임기웅변으로 한다는 말이, ‘김 선생에게 청혼을 하고 싶은데 지금은 그대 나이가 어려서 나 자신이 부끄럽고, 그대도 아직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안하고 있었을 테고, 그래서 이다음에 청혼하러 갈 테니 마음에 준비나 해두시오.’ 하는. 엉뚱스러운 말로 무안스러운 마음을 얼버무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그러세요, 하며, 웃음으로 그 말을 받는다.

그녀와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냥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버려 두고 있었다. 게으르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즈음의 세상은 시끄러웠다. 80년 봄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데모는 그 열기가 점점 치열해져갔다. 그러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외면한 군부는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하는 선거를 치렀다.
결과는 80년 8월 27일 제 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두환 시대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속에서 이어졌다. 학생들과 민주 인사의 탄압이 끝 간 데를 몰랐다. 그럴수록 애국하는 시민과 학생들은 점점 정권에 항거하여 패기 넘치고 시대를 사랑한 아름다운 청춘들은 무지한 권력의 힘에 눌려 많은 피를 흘렸다.
나는 직접 데모대에 가담하지도 못하고 젊은 학생들과 피 흘리는 시민들 뒤에 숨어 있다는 부끄러움과,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글로도 형상화 시키지 못한다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숨을 곳이 있었다. 술이었다.
아까운 젊은이들의 희생에도,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도, 제자리에 멈춰선 듯 한 개인적인 내 삶에도, 파지만 뜯겨 나가는 글에도 술이었다. 이래저래 날이면 날마다 핑계를 대며 마셔치워도 핑계는 여전히 산처럼 쌓여서, 나는 좀처럼 술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같은 놈은 결혼이라는 무덤에다가 파묻어야만 인간 되겠다.”
젊음이 무색하리만큼 피폐해져가는 내 꼴을 보다 못한 친구가 중매를 하겠다고 나섰다.
알맞게 차갑고 적당히 쓸쓸한 늦가을의 어느 토요일, 친구와 남산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맞선을 보기로 한 것이다. 썩 내키는 마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싫다, 하는 마음도 없이 어정쩡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나 갔다. 그저 쉬는 날 친구하고 차나 한 잔 하자, 하는 마음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친구와 커피를 시켜서 마-악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데 머리꼭지 위에서 또다시 비제의 음악이 들렸다.
“우린 서로 배신을 한 건가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손에 든 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현경은 배신자 같은 음흉한 웃음이 아닌 밝고 건강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녀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어떤 예감과 함께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현경은 친구와 같은 학교 음악 선생이었다. 친구가 나를 중매를 하겠다고 해서 현경은 반가웠다고 했다. 그녀의 솔직함에 나는 나이를 잊어버렸다.
그날 이 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못 보면 죽을 것처럼 서로에게 열중했다. 그동안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큰 힘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던 것처럼 뒤늦은 만남을 억울해하기까지 했다.
나는, 내 나이도 잊은 채, 그녀 또래들이 하고 다니는 온갖 유치한 행동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고 다녔다. 커플 반지는 물론 커플 옷을 함께 입고, 외국의 유명한 가수의 내한 공연장에 가서 관중들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승낙은 순탄치가 못했다. 내가 가진 모든 조건이 사윗감으로는 현경이 부모님 기대치에 어림없이 못 미치는 조건이었다. 우선, 나이 차이가 많은 사윗감은 무조건 거절이었다. 거기에 더 보태서 현경이 어머니는 소설 쓰는 사람에 대해서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글 쓴다는 핑계로 술이나 먹고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넘쳤을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외쳐대면서 그녀 집 문턱을 넘어 다녔다. 내 평생 그런 열정 넘치는 나를 본 게,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서 장모님의 굳센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이라는 무덤을 서슴없이 팠다.

김상훈 2019-03-01 05:34	알퐁소 도테의 소설 아를의 여인이 희곡으로 각색되는 순간 비제라는 인물에게 넘겨지고 넘겨진 희곡을 바탕으로 연극과 음악이 탄생되었으니 그야말로 김현경이라는 분과 참 절묘하게 연결해 놓은 것처럼 짜릿한 느낌입니다. 알퐁소 도테의 소설을 들고 나는 지금 청보리밭을 걷네 오래 전 제가 쓴 시 한 귀절인데 제목이 안 떠오릅니다. 바둑과 1인칭 때문에 사실 조금 헷갈렸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장춘희 2019-03-04 21:25	87년에 어떤이의 애기를 듣고 써본 글입니다. 많은 힘을 들여 다듬고 또 다듬어야 하거늘 그냥 덜렁 올렸습니다. 요 몇년간 고전 명작 공부에 빠져서 글쓰기에 소홀합니다. 고심하고 또 고심해도 모자랄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릴적에 읽었던 고전 명작을 새로이 대하니 신세계가 따로 없습니다. 선생님의 시 제목이 궁금합니다.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 봐도 선생님이 남자라고 안 믿어집니다. 잘 생긴 여자인줄만 알았습니다. 편안하십시요.

빈뜰

멀리 있는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