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탄 지하철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 아저씨가 찬송가, 그 중에서도 유독 처량한 창법으로 부르는 노래가 승객들의 가장 슬펐던 기억을 쥐어 짜내는 듯 흘러나오는 녹음기를 메고 내 앞을 지나가신다. 한손에는 방향과 장애물을 가늠하는 하얀 접이식 지팡이와 다른 한손에는 작은 플라스틱바구니. 그 바구니에는 백동전 몇 개만이 초라하게 들어있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 가벼운 바구니에 담아 주었다. 아저씨는 용케도 가벼운 기척을 알아채시고 건조한 음성으로 감사를 말씀하시며 덤덤한 걸음으로 다음 칸을 향해 걸어가셨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요즘 나는 내 지갑에 천 원짜리 몇 장을 항상 준비하고 다닌다. 그것은 오늘 같이 이렇게 예고 없이 마주치는 장애나 삶의 혹독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는 이들, 또는 산행길에 간간이 만날 수 있는 스님들의 시주함에 보탬을 주기 위하여 준비하는 나의 작은 정성이다.

가훈(家訓)의 사전적 설명은 ‘한 집안의 조상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주는 가르침. 한 집안의 전통적 도덕관으로 삼기도 한다.’이다. 가훈은 주로 경애, 성실, 정직, 근면 등 생활예절과 인간교육에 집약되어있다고 하는데, 한국의 오래된 대표적 가훈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金庾信)집안의 ‘충효(忠孝)’와 고려시대 말의 명장 최영(崔瑩)장군 집안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가 있고 조선시대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신의. 지조. 청백. 성실. 우애’가 있다.

또한 ‘3대 부자가 없고 3대 가난이 없다.’고 하는데 300여년에 걸쳐 12대를 만석꾼 부자로 이어질 수 있게 한 경주시 교동의 최부자집 가훈은 너무도 유명하다. 널리 알려지고 누구나 알고 있는 그 가훈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당쟁에 얽히지 말라는 뜻)

2. 재산은 만석이상 지니지 마라(욕심 부리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

3.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는 뜻)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마라(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는 뜻)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검소, 절약하라는 뜻)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상부상조하라는 뜻)

의 육훈(六訓)으로 그 후손들은 이것을 잘 지키고 임진왜란이나 일제 침탈 등의 국난을 당하면 솔선하여 지원하고 적극 극복에 앞장선 결과로 탐관오리나 부자들을 타도하던 성난 농민의 봉기인 동학혁명이나 6.25전후 빨치산들의 습격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호를 해줘서 안전할 수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선견이 있는 조상의 가훈과 성실히 지켜온 후손의 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가정들이 가훈을 중요시 하여 복원하거나 새로 정하게 된 건 1970년대 초반 초. 중.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가훈 찾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부터인데, 우리 집도 사회적으로 덕망도 없고 전통도 얕았으며, 가운이 번창한 집안이 아니었으므로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시절에 학교에서 써오라는 과제물로 가훈이 탄생을 하였고, 이제 아들들의 나이가 20대 후반에 있으니 우리 집 가훈도 한 20여년은 된 것 같다.

‘베풀며 즐기며 살자’

아이들이 가훈을 물어 봤을 때 내가 주저 없이 정하고 주지시킨 우리 집 가훈이다. 따로 가훈이 없었으니 조금은 즉흥적으로 정한 가훈인데 학교에서 발표했더니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이 “무슨 가훈이 그래? 하하하”하며 웃었다고 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가훈이다. 사실 남보다 더하지 못하면 덜한 가훈으로 차별화한 삶을 살고 싶었고 아이들에게도 천편일률적이고 보편화한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살아오면서 우리 집 가훈에 비추어볼 때 내 가족들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살며, 내 영향을 받아서 인지 여행도 많이 다녔고 공연관람이나 경기를 보기위해 야구장도 종종 찾는 등 문화생활도 간간이 즐기며 살아왔으니 어느 정도 즐기며 살아온 건 맞다. 하지만 살아온 20여 년 동안 베풀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신은 없다.

물론 베푼다는 것은 꼭 금전이나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따뜻한 말 한마디나 풍족한 마음 씀씀이, 또는 노인을 공경하고 부녀자의 무거운 짐을 들어다 준다거나 산길에서 만나는 산객들에게 밝은 인사와 덕담 등 참으로 베풀 수 있는 것은 많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생각하기는 누가 뭐래도 베푼다는 것은 경제적인 것이 베풂을 바라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겠고 베푼 표도 명확히 나고 생색도 나는 것이리라. 누구라도 여유가 있어 배고픈 자에게 베푼다면 마음이 뿌듯하고 자신의 베풂을 자랑스러워할 것이 금전적 베풂일 것이다. 내가 요즘 들어 곰곰이 되짚어 보니 작은 금전이라도 베풀어 본 게 몇 년 전 회원들과 함께 작은 정성을 모아 강원도 정선의 독거노인 몇 분에게 겨울을 맞아 연탄과 밑반찬을 나누어 드리고 온 것 외에는 그저 기분이나 분위기상 베풂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몇 푼을 건넨 게 다 인 것 같아 부끄럽다.

내가 그렇게 금전 베풂에 인색했던 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되짚어 보면 30여 년 전 내가 의정부에서 군 생활하던 때이다. 병장을 달고 내무반장을 하던 어느 날 사병들을 거느리고 인사계님과 함께 부대 외벽을 보수하고 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가장 피곤한 몸짓과 가장 불쌍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 “집이 경기도 송탄인데 일이 있어 의정부에 왔다가 지갑을 도둑맞아 차비가 없다.”고 하며 도와달라고 하셨다. 나는 인사계와 상의하여 할머니를 위해 얼마간씩의 돈을 병사들과 함께 각출하여 할머니에게 건네주었다. 몇 천 원을 받아든 할머니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 우리들은 적은 사병 월급을 축냈지만 좋은 일을 한 것으로 기분이 유쾌해져 즐겁게 그날의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몇 주 후에 다시 부대 외벽진지의 보수를 위해 그날은 다른 선임하사와 같이 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의정부 시내 중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한 부대의 여건상 많지는 않지만 제법 여러분의 주민들이 여름볕에 고생하는 우리들을 격려하고 지나갔다. 그날 오후. 몇 주 전에 보았던 할머니가 그때와 똑 같은 불쌍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똑같은 사연을 늘어놓으며 똑같이 도움을 요청하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군 사병 월급이 얼마라고 그걸 덜어서 드린 지가 얼마 전인데, 그리고 좋은 일 했다고 가슴 뿌듯했었는데, 이럴 수가....... 정말 화가 치밀었다. “할머니! 몇 주 전에도 차비 드렸잖아요!” 했더니 할머니는 눈을 들어 내 얼굴을 잠시 응시하더니 황망히 발길을 돌려 그때 갔던 그 길로 내려가셨다. 아마도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오랜만에 보면 그놈이 그놈 같으니 몇 주 전의 나를 기억 못하셨나 보다.

하지만 결과로 보면 할머니의 집은 경기도 송탄도 아니고 지갑을 도난도 안 당했으며 불쌍하지도 않고 집은 이 의정부 어디에 있으며 결코 극빈은 아닐 것이었다. 다만 내가 할머니의 불쌍한척한 행색과 기만의 표정에 속은 것이었다. 내무반에 돌아와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병사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할머니는 의정부역 앞에서 같은 래퍼토리로 종종 차비를 구걸 하신단다.

그 밖에도 어린 아이들을 잡아다가 전철이나 버스에서 껌을 팔게 하고 착취하는 앵벌이 포주, 술집에 껌이나 과자부스러기를 들고 와서 팔아달라는 미군부대 주변의 한때 잘 나가던 집장촌의 포주 출신 할머니, 억대의 재산가 이면서 양복입고 출근하여 누더기근무복으로 갈아입고 정해진 코스의 상점을 돌며 구걸을 하는 부자걸인, 이상야릇한 염불을 하며 목탁 두드리는 가짜 스님 이야기 등등....... 이런 부정적인 뉴스들이 그만 나의 지갑을 꽁꽁 닫아걸게 하였고, 더군다나 근자에는 양의 탈을 쓴 대표적 정부단체를 포함한 자선단체장이나 조직들의 관계자들이 사욕을 채운 못된 이야기들이 얇은 내 지갑의 빗장을 더욱 견고히 채우게 하였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은 흘러 내 주머니가 다소 여유가 있었던 시절은 어느새 지나고 정말 힘들었던 한때는 내가 불우이웃이 된 것도 같았었다. 이제 이런 저런 시절을 지나고 곰곰이 돌아보니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지갑을 닫은 것은 앞서 열거한 부정적인 사실들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중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가만히 있는 주위 사람들 속에서 작은 금전이나마 베푸는 게 아깝거나 쑥스럽거나 번거로움을 주저한 점도 없지 않다. 한마디로 용기가 없었던 점도 있었다.

다시금 생각하면 비겁한 이유로 우리 집 가훈의 ‘베풀며’는 지키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해서 이제는 지갑에 항상 천 원짜리 지폐를 몇 장씩은 준비하고 다니다가 마주치는 피 도움자에게 무조건 한 장씩 베풀기로 하였다. 그가 스님이던 구세군이던 앵벌이던 장애자던 걸인이던 노숙인이던, 피 도움자를 가리지 않고 만나거나 요청하면 무조건 작은 정성으로 베풀기로 했다. 그 작은 돈을 가져다 좋게 쓰던 나쁘게 쓰던 어떻게 쓰던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내가 속고 안 속고에는 관심 없고 그저 작은 돈이나마 베풀며 내 가훈에 늦게나마 충실하려 애쓰는 것이다. 단지 그이유고 나머지는 그들 몫이다.

날씨가 좋아 새벽에 관악산을 오르던 어제 개천절 아침에도 산 이쪽에서는 미처 염불준비가 안 된 스님의 불전함에 천원을 시주하고 산 이쪽으로 넘어와 고등학생들이 봉사하는 백혈병어린이 돕기 모금함에 천원을 넣어주었다.

요즘 사회적으로 공지영 작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도가니가 큰 이슈가 되어있다. 하지만 사회복지시설 운영진 가운데는 인화학교 경영진 같은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훌륭한 사회복지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우리 사회에는 더 많아 힘든 경제여건 속에서도 약한 백성들의 엔도르핀 수치를 높이고 있다.

그런 훌륭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내 형편에는 이만도 참 다행인 삶인 것 같아 마음의 여유를 넓힐 수 있다.

그러므로 ‘베풀며 즐기며 살자.’는 우리 집 가훈으로 가장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