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겨울도 이제는 음력으로 동짓달과 섣달, 딱 두 달이 남았다. 오늘이 그 두 달 중 동짓달이 시작하는 초하루이니 말이다. 오늘 아침신문을 보니 예로부터 매년 양력 12월 22일인 동짓날이 음력 동짓달(11월) 초입에 들면 ‘애동지’ 또는 ‘애기동지’요, 말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하고 ‘애동지’에는 팥죽을 끓이지 않고 시루팥떡을 해먹는다고 하는데, 올해는 음력 17일에 동지가 들어 ‘젊은동지’로 팥죽을 끓여먹을 수 있다고 한다. 어쨌건 며칠 온난했던 겨울날씨가 동짓달에 접어들면서 바깥에는 쨍한 바람이 잎이 다 떨어진 겨울 나목의 잔가지마다 매달려 있으면서 길가는 행인들의 방한의 옷차림을 매서운 눈초리로 다그치고 있다.

이제 우리는 2010년 한해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못하고 분주한 저녁의 행사들로 남은 하루하루들을 탕진하고 있다. 마치 몇 건의 송년회를 치루지 않으면 이 한해가 서운해서 도저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염려를 하는 듯 주점과 노래방을 전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족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가무를 좋아하는데, 술을 한 잔하고 나면 흥이 더 나서 노래와 춤을 추게 되므로 ‘음주’와 ‘가무’는 실과 바늘같이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요불가결한 관계인 것 같다. 다른 민족에 비해 더욱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 대한의 국민들은 이달에도 송년의 술자리에 이어지는 가무를 위한 샐러리맨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노래방은 대목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리 멀지않은 예전에는, 그러니까 내 기억으로는 적어도 딱 20여 년 전에는 지금과 같이 자막이 나오고 멋들어지게 반주가 나오며 음의 높, 낮이와 템포의 빠르고 느림을 조절하는 문명의 이기가 없었다. 물론 노래방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냥 식사와 술을 마신 음식점 그 자리의 방이나 홀에서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목청을 높여서 각자가 자신 있고 잘 부르는 노래를 순서대로 뽑아대곤 했었다. 옆의 다른 팀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그에 질세라 더욱 목젖을 고음으로 떨곤 했었던 그 시절이었다. 술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은 박수로 열심히 박자를 맞추어 주고 이런 술자리를 주도하는 진행자가 대중의 흥을 돋우며 노래의 순번을 정하여 주었고, 이 시절에는 술자리를 위해 각자 몇 곡의 노래를 부단한 연습으로 준비를 하고 다녔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부서의 사회자로 거의 모든 회식자리에서 분위를 띄우기 위해 범상치 않은 추임새를 남발하고 있었으며 남다른 애환도 나의 몫으로 거두고 감수하였었다.

특히 지금은 CEO라고 호칭하는 사장님이나 부서장들은 적어도 세곡정도의 노래를 2절까지 멋들어지게 완창을 할 줄 알았어야 했었는데, 사원들에게 혹은 부서원들에게 훈시를 하는 시간에도 종종 신청을 받아 즉석 라이브로 멋들어진 솜씨를 보여주어야 정말 낭만 있고 잰틀한 윗분으로 평가를 받았었다.

우리들도 그때는 세곡 정도의 애창곡을 준비하고 술자리에 임했었는데, 그 시절 애창곡이라야 지금처럼 트롯트나 발라드 R&B 같은 다소 장르가 다양하고 젊은 노래가 없었고 거의 대부분이 ‘울고 넘는 박달재’, ‘번지 없는 주막’, ‘굳세어라 금순아’, ‘두만강’, ‘목포는 항구다’ 등등 오래된 노래들이 대부분이어서 각자의 애창곡이 가로나 세로로 겹치는 경우가 많았었기 때문에 내가 준비한 노래를 앞사람이 먼저 부르면 그와는 다른 곡을 부르기 위해, 또 혹시 앵콜을 받으면 부르려고 비장의 한곡포함 적어도 세곡을 준비하였었다.

하지만 술자리의 진행을 주로 보았던 나는 부서원들의 애창곡을 대충 꿰고 있었기 때문에 두곡 정도를 준비하면 그만이었었다. 노래하는 순서를 내가 정하였으니 나의 애창곡과 같은 노래를 주로 부르는 동료들은 순서를 뒤로 미루고 적당한 기회에 사회자의 노래순서를 먼저 끼워 넣으면 무난히 하루의 행사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에 두곡 정도로도 무난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노래문화를 즐기던 내가 90년대 초에 10여 개월 부산으로 장기출장을 갔었는데, 그곳 출장소 직원들과 술을 한잔하고 나의 출장을 환영한다고 간 2차 술집이 가라오께 주점이라는 곳이었었다. 한 코너의 의자들에 복수의 팀들이 앉아 맥주를 마시며 곡을 신청하면 점주가 팀별 적당한 순서로 음악 반주를 틀어주고 손님은 가사집을 펼쳐보면서 노래를 하는 방식의 술집으로 그 당시 서울내기인 내게는 무척 생소한 가라오께 노래문화가 부산에서는 성업 중이었었는데, 그것이 일본의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부산에 먼저 상륙해서 뿌리를 내린 노래문화였었다.

직원들과 처음 간 가라오께 주점에서는 끈질긴 동료들의 강청에도 쑥스럽고 자신도 없어서 생소한 가라오께반주 노래를 안 하고 끝까지 버티며 술만 마시고 나왔었다. 더군다나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옆자리에 앉아 내 노래를 들을 걸 생각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의 가라오께 주점 출입을 하다 보니 나도 서서히 익숙해져 가라오께반주로 노래를 불렀었는데, 그 첫 노래가 전에 부르던 늙은 애창곡에서 많이 탈피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였었다.

그리고 그곳 생활 두 달여가 지나서 역시 거의 처음으로 부산 구포동에 최신식 ‘비디오께’가 들어왔다고 하여 나는 출장비를 아껴서 퇴근 후에는 종종 달려가 지금의 노래방시스템의 전신인 비디오께에서 화면 밑에 가사가 자막으로 나오고 반주가 나오는 그 당시 최신시스템으로 느긋하게 맥주를 즐기며 ‘내 사랑 내 곁에’를 무던히도 불렀었다.(그 당시 돈을 많이도 투자 했었다. 노래연습을 위하여)

그렇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주말에 아내가 부산에 내려왔다 올라가는 일요일 저녁 어스름에는 구포역 플랫폼에서 그 갈고 닦았던 애창곡 ‘내 사랑 내 곁에’를 많이도 흥얼거리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곤 하였었다.

그러고 보니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른 가객 김현식이 올해로 유명을 달리한지 20년이라고 하니 어언 그때가 20년을 거의 채우고 있다.

그 이후 주대가 싸고 노래방 시설이 잘된 천호동 술집과 서울시내 여러 곳의 노래방 기기의 도움을 받던 나는 잔칫집에서 부르면 흥을 돋우기 좋은 조승구의 ‘꽃바람 여인’이나 요즘 다소 신곡인 박상철의 ‘황진이’등으로 애창곡의 개수를 늘이고 이제는 멋진 가곡도 준비를 하고 있지만 원래가 음치의 영역에 속해 있는 나는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에는 시골 어머니(나는 장모님을 이렇게 부른다.)의 팔순을 맞아 전북 부안군에 위치한 격포해수욕장 인근의 펜션에 처가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식사와 음주를 즐겼었다. 요트경기장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펜션에서 넓은 창으로 스며드는 낙조에 취하고 맑은 술과 붉은 술에 적당 충분히 취할 즈음 큰처남의 요청으로 팔십을 훌쩍 뛰어 넘어 거동이 다소 불편하고 어눌하게 변하신 시골아버지가 창을 하셨는데, 과연 창의 고장 춘향골에서 평생을 사신 시골아버지는 멋들어지게 창을 하셨고 뒤이어 앵콜곡으로 흘러간 옛 노래를 두어 곡 구성지게 뽑아내셨다.

감동이 잠시 흐르고 시간이 한 땀을 지나서 둘러앉은 식구들이 나에게 노래를 한 곡하라고 하는데, 갑작스런 순서에 준비도 없던 나에게 내 십팔번이 무엇이었던지 과연 노래방 기기의 도움 없이 가사를 완벽히 외우고 있는 노래가 무엇인지 감감 아득하였다. 이것저것 노래제목을 생각하다 그냥 주저앉아 술만 마셔댔다. 옛날에 그나마 구성지게 불렀던 ‘물항라 저고리가~♬ 굳은 비에 젖는 구려~♪’ 마저도 생각이 나질 않았으니 그 동안 문명의 이기인 노래방기기는 늙은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주는 대신 영혼을 가져간 메피스토 펠레스처럼 편리함을 담보로 나에게서 가사를 기억하고 무반주로 노래하던 낭만을 가져간 것이다. 역시나 다른 형제, 식구들도 그저 부르는 노래가 예전에 불렀던 그렇고 그런 노래들로 흥을 돋우고 말았으니 노래방 기기가 얼마나 우리의 기억력을 갉아 먹었는가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노래방기기의 도움을 못 받으신 시골아버지는 오히려 기억력에 의존하여 멋지고 멋진 노래를 구성지게 부를 수 있었다.

우리가 노래방기기 없이 기억력과 연습으로 즐겨 부르던 옛 노래를 그때는 흔히 ‘십팔번’ 혹은 ‘십팔번지’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왜 그때는 우리들의 애창곡을 십팔번 등으로 불렀을까?’ 궁금하였다. 그래서 찾아보니 국어사전적으로는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일본의 유명한 가부키 집안에 전하여 오던 18번의 인기연주목록에서 온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오픈 사전에는 ‘일본의 전통 가무극인 가부키에서 유래하며, 여러 장(場)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부키에서 장이 바뀔 때마다 막간극을 공연했는데, 17세기 무렵 이치가와 단주로 라는 가부키 배우가 단막극 중에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技藝)를 정리했고, 그것을 가부키 십팔번이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십팔번이 가장 재미있고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생겨난 말’이라고 설명을 하며 부연으로 일제의 잔재이니 애창곡 정도로 정리를 해야 한다고 하나 요즘의 젊은 세대는 십팔번을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십팔번을 이야기 하던 구세대도 이미 기억에서 삭제된 것이 ‘십팔번’이니 그리 염려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노래문화는 노래방기기뿐만이 아니라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성업하던(지금은 많이 사그라졌지만) 노래교실 등으로 우리의 실력과 편이를 향상시켰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가 그렇듯 앞으로 또 어떤 노래문화가 우리들의 음주가무를 이끌어갈지 모를 일이다. 분명히 멀지 않은 세월 앞에는 또 다른 형태의 노래문화가 우리들 음주후의 시간을 리드해나가겠지만 아무런 반주나 가사 도움 없이 트롯트나 발라드, 혹은 가곡이나 팝송 서너 곡은 장소 불문으로 멋들어지게 부를 수 있는 준비는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지배하였던 지난 토요일이었다.

그런 것들이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에게 통제되지 않고 스스로 낭만을 만들어 사는 이시대의 모던적인 삶일 것이다.

사실 어제가 결혼 28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시골 어머니 팔순에 묻혀버렸었다. 이제 오늘은 이만 글을 마치고 아내와의 외식을 위해 외출준비를 서둘러야하겠다.

2010년 12월 6일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