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언 달력을 두 장 남기고 있는 11월의 초. 상실한 가을을 체험시켜 주는 듯 밖에는 새벽바람이 한겨울 얼음낚시터의 빙판 위에 흐르던 매콤한 알갱이로 불고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두툼한 외투를 보니, 또다시 없는 사람들이 더욱 힘든 계절이 도래하였음을 경고하는듯하다.

하지만 이 11월에는 본격적인 동절기로 가기 전에 연인들이 서로 사랑의 정을 나누는 '뻬뻬로데이'가 있어서 다소 훈훈함을 나눌 수 있으리라.

나도 이미 많이 낡은 감정이지만 매년 이날은 두 아들과 같이 집안의 하나뿐인 여인인 아내에게 다소 저렴한 뻬뻬로를 선물하며 그나마 젊은 감각을 잃지 않으려하고 있다.

어느 제과업계에서는 이날의 매출신장을 위하여 이미 10월 말부터 TV나 라디오를 통하여 광고를 하며 노비의 이마에 불도장을 찍듯 세인들의 머리에 '뻬뻬로데이'를 각인시키고 있다.

이시대의 기념일, 특히 무슨무슨 데이는 대부분 경제인들의 상술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겨서 상징적인 날로 만들고 특정 상품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그냥 넘어가서는 연인 간에 불화의 불씨로도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올해도 수없는 날들이 지나갔지만 크리스마스를 지나 새해가 되면 2월에 돌아오는 '밸런타인데이'를 시작으로 10여개의 '데이(Day)'들을 우리는 또다시 만날 것이다.

‘밸런타인데이(Valentine Day)’는 성 발렌티누스 사제가 순교한 2월14일에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으로 유독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이날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해도 좋다는 속설 위에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는 상술이 얹혀있다.

한 달 뒤의 3월 14일 ‘화이트데이(White Day)’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지내는 일종의 기념일로 밸런타인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한 달 뒤인 화이트데이에는 반대로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이 화이트데이의 기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근접한 정설은 1965년 일본의 마시멜로제조업자가 만들었다는 설로, 그때는 ‘마시멜로데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화이트데이’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블랙데이(Black Day)’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에서 4월 14일에 해당하는 날로, 주로 아직 연인을 못 구한 사람들이 자장면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도 장미의 계절 한가운데인 5월 14일 ‘로즈데이(Rose Day)’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증표로 장미를 선물하는 날로, 크리스마스 D-100일의 ‘고백데이’와 일부 백화점에서 내세운 속옷을 선물하는 날이라는 ‘브래지어데이’는 11월 8일로, ‘8’을 가로로 눕히고 양쪽에 각각 ‘1’을 붙이면 브래지어 모양이 완성된다는데 착안을 하였다는 기막힌 상술의 기념일이 있다.

그 후 11월 11일이 뻬뻬로의 그 기다란 막대 같은 숫자 1이 4개 겹쳤다고 하여 ‘뻬뻬로데이’라 명명하고 연인끼리 뻬뻬로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 외에도 3월 3일은 3이 겹쳤다고 하여 삼겹살을 즐기라는 삼겹살데이가 있고, 얼마 전 지나 간 9월 9일은 닭을 부르는 ‘구구’라는 음과 같다하여 치킨을 즐기는 치킨데이라고 하는데, 다림을 한다는 삼복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날들을 따라서 선물하고 즐기며 살고 있는 나도 어쩌면 건조한 일상을 이런 상술에 의지하여 다소나마 의미를 찾으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 같다.

이래저래 이날들은 대부분 연인들이 특별히 만나는 사유를 주는데, 이 밖에도 각자의 생일을 비롯해 만난 지 백일 또는 천일 등으로 가난한 연인들의 주머니는 더욱 가벼워지기 일쑤다.

하지만 기혼자들에게는 다른 어떤 날들보다 결혼기념일이 무척 중요한 날로 인식을 하고 있는데, 남녀가 한 날 한시에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을 하거나 경비를 지출하는 것으로 거의 명문화 된 것은 남자인 나로서도 다소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우리 부부는 겨울 초입인 12월 5일 결혼을 했으니 이제 결혼기념일도 한 달여를 남기고 있다. 이제부터 슬슬 그날 어떤 이벤트로 아내를 즐겁게 해줘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아이들이 장성해서 아르바이트로라도 수입을 올리면서부터는 두 아이들이 우리들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줘서 고맙게도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SG워너비의 콘서트 관람이나 정성스러운 선물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아이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올해와 내년의 결혼기념일을 지나고 나면 그 다음해에는 진주혼식(眞珠婚式)이라는 30주년이 되는데, 다른 기념일에 비해 더욱 커다란 의미가 있으니 통속적으로 그 값비싼 진주를 선물하기보다는 더욱 커다란, 혹은 더욱 뜻 깊은 이벤트를 준비하여야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과연 아이들과 내가 경제적 부담 없이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이벤트를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혼자 있는 밤이면 간간이 생각에 잠겨보았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디어가 얼마 전에 나에게 우연히 포착되었다.

두 달 여전 밤에 야근을 하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한 음악 신청자의 사연이 내 계획에 마침 맞게 들어선 것이다. 사연인즉 ‘종이학을 천 마리 접어서 연인에게 선물하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그 사랑에 행운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학을 접을 줄도 모르니 동전에 새겨 있는 학을 선물하기 위하여 그녀를 위해 500원짜리 동전 천개를 모으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연을 듣는 순간 “맞다! 저거다!”하고 무릎을 쳤다.

그날부터 결혼 30주년까지 남은 날 수를 대충 헤아려보니 약 850일 정도 되었다. 그렇다면 하루에 한 개 이상씩만 동전을 모은다면 그날까지 천 마리의 학을 사냥하기는 무난할 듯싶었다. 500원 동전이 천개면 50만원이 되니 그때 그 돈으로 짧지만 알찬 여행을 한다면 아이들이나 내 부담도 적고 천 마리 학을 선물 받게 될 아내도 의미 있는 기념일이라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퇴근하고 돌아와 식사를 하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 계획을 발표했더니 아내도 자신의 학을 천 마리 모아 그날의 행사에 보태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나는 커다란 돼지저금통 두 개를 구입하여 학을 포획하기 시작하였다. 큰아들은 기념일까지 모아서 모자라는 학은 일시불로 충당해 주겠다고 하고, 살가운 작은아들은 제 여자 친구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말해서 수시로 동전을 바꾸고 모아 둘이 만날 때마다 그동안 모은 학을 5,6개씩 가지고 들어와 아내와 나의 돼지에게 넣어주고 있다.

그런 도움으로 이제 모은 지 90여일이 되었으나 각자의 돼지 뱃속에 들어 찬 학은 백 마리를 충분히 넘고 있으니 우리들의 계획은 차질 없이 무난하게 달성 될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족에게 포획되는 천 마리의 학은 우리 부부의 진주혼식에 내가 아내에게, 아내가 나에게 남은 생을 서로 사랑하며 잘살아보자는 서로에 대한 두 번째 프러포즈의 의미로 소중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서로의 따뜻한 가슴에 남을 것이며, 우리가족의 주머니를 비우지 않고도 뜻 깊은 기념일을 지낼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재원이 될 것이다.

올해도 이제 이달 중순이후부터 열리는 각종 송년회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올해의 마지막 밤을 지나면 2010년은 우리에게는 다시 올 수없는 머나먼 암연의 세계로 떠날 것이고, 그러면 지나온 올해의 각종 기념일도 내년의 다시 도래하는 기념일들에게 우리들의 낭만을 부탁하고 추억이란 알싸한 앙금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지난 의미 있는 기념일들이 각종 기념일 뒤에 맺혀 있으니 삼겹살데이와 치킨데이 속에 숨어 있는, 지금은 우리국민에게서 멀어진 제비가 돌아오는 음력 3월 3일과 강남으로 떠나는 음력 9월 9일이 있으며, 화이트데이인 3월 14일은 세계수학자의 날인 ‘파이(π)데이’ 인데, 이날은 프랑스의 수학자 ‘자르투’가 세계 최초로 원주율 3.14를 고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로 서유럽에서는 이미 보편화되어 이날이 되면 π와 관련된 각종행사를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을 전후해 포항공대의 수학동아리를 비롯해 수학 관련단체나 교사들을 중심으로 π데이 행사를 매년 하고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뻬뻬로데이’에는 두 사람이 대지 위를 힘차게 걷는 모습을 형상화해 2007년에 우리나라의 세계걷기운동본부 주관으로 ‘세계걷기의 날’, 즉 ‘뚜벅이데이’로 선포하였으며 올해도 국토해양부는 이날을 ‘보행자의 날’로 정하여 (사)세계걷기본부 주관으로 뚜벅이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이제 깊어가는 이 가을에 연인에게 또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저렴한 뻬뻬로라도 선물하여 아직도 낭만이 건재함을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상술적인 기념일 그 이면에 스며있는 의미들도 조금은 상기하고 화두로 이야기하며 기리고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의 가을을 사는 로맨티스트들의 매너 있게 잘사는 ‘참살이’의 한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