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경. 행단춘풍(杏壇春風) 구절재에서 행단으로 넘어오는 훈훈한 봄바람.

제 2경. 세류앵가(細柳鶯歌) 세류마을 버들가지에서 우는 아름다운 꾀꼬리 소리.

제 3경. 무성현가(武城絃歌)  무성현의 현가루(絃歌樓)에서 글 읽는 소리

제 4경. 류상곡수(流觴曲水) 최고운(崔孤雲)선생과 검단대사가 술잔을 띄우면서 글을 읊었다는 감운정 옛터인 유상대를 휘어 감도는 물길.

제 5경. 월연락조(月延落照) 원촌 뒤에 있는 월연대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노을.

제 6경. 석탄모종(石灘暮種) 석탄 동남쪽 봉우리에 있는 석탄사의 은은한 종소리.

제 7경. 시산명월(詩山明月) 송산 뒷산인 시산봉에 떠오르는 둥근 달.

제 8경. 강정어화(江亭漁火) 송정(원촌) 밑에 흐르는 동진천에서 밤에 고기 잡는 휘황한 불빛.

칠보의 아름다운 풍경 중에 여덟 개를 소개한 고현팔경(古懸八景)이다.

그 옛날의 진경(眞境) 중에 진경들이  절로 피어올라 나의 발걸음을 칠보로 재촉한다.

조선 초기 칠보면의 옛 지명인 태인군(泰仁郡) 고현내(古縣內)의 여덟 가지 명승을 선정한 고현팔경은 다른 지역에 비해 소리와 바람, 물길, 노을, 불빛 등 대부분 소프트웨어적인 대상을 선정한 것이 신선하고 내 눈과 귀와 가슴 가까이에 머무는 듯 하다.

새벽에 집을 나서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정읍에 내려 칠보로 가기 위하여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마침 오늘이 정읍 칠보장(4,9일)이 열리는 날이다.

정읍 터미널 앞 정류장에는 여러 촌로들이 담소를 나누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십여 분 기다린 끝에 버스에 올라보니 예상외로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이 탄 노인께 “오늘이 칠보장날 맞지요? 그런데 승객이 그리 많지 않네요?”하고 말했더니 그분이 대뜸 “장도 안돼요. 점방 열어 봤자 사람이 있어야제.” 하신다.

군데군데 정류장을 들려 몇 분의 승객을 모아 싣고 칠보로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서 바라본 들녘은 겨우내 곤한 잠자던 호남평야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어린 씨앗을 품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얕은 산 말랭이 연초록 질펀한 골짜기에는 도화가 함부로 퍼질러 피어 봄볕에 잔뜩 취해 있었고.

가벼운 몸의 시내버스가 그 칠보의 가운데로 들어서는데 반기는 건 동진강 줄기의 물 흐르는 소리 뿐이었다. “여기가 칠보예요?” 하고 버스에서 내리려 하니 기사님이 나의 성급함을 제지하며 말씀 하신다.

“다음 정류소에서 내려야 해요. 터미널 가지 않나요?” 엥? “아니오? 칠보장에서 내리려고요.” 기사님은 답이 없고 그저 고개만 갸우뚱.

결국 터미널에서 내려 물어보니 자그마한 시내 도로가 바로 장터라고 한다. 하지만 몇몇 의류 노점상, 푸성귀 노점상, 신발이나 슬리퍼를 놓고 귀한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그리고 골목 어귀에 묘목과 모종을 펼쳐 놓고 더부룩한 수염에 모자를 푸욱 눌러 쓴 아저씨가 칠보 오일장의 전부였다. 바람은 오늘 따라 휑하니 마을을 가로지르며 왜 그렇게 내 외투의 깃 자락을 털어 대던지…….

어쩔 거나, 이 텅 빈 칠보장 좁은 가슴을……. 내가 다 가슴이 허전하여 “왜 이렇게 동네가 한산해요? 오늘이 장날인데.”하고 묘목상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이제는 슈퍼와 가게가 마을인구에 비해 비대하게 들어서있으니 오일장의 의미는 칠보에서 떠난 지 오래라고 하신다. 그 작은 칠보가 한없이 허전해 보인다. 그래도 이곳은 선비문화권이라 하여 신라말기의 대 문장가 최치원의 흔적이 많다고 하니 새벽에 나선 내 정성이 헛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거리를 둘러보고 면사무소에 들러 면을 소개하는 관광용 팜플릿을 부탁했더니 공무원 한 분이 그나마 남겨진 한 권의 홍보용 인쇄물을 건네주신다.

표지에는 ‘태산선비문화의 고장 칠보(七寶)’. 1914년에 칠보로 명명 된 이곳에는 이름에 걸 맞는 일곱 가지의 보물이 있을법하여 도록(圖錄)을 펼쳐보니 사진과 함께 일곱 가지의 자랑이란 명제로 세세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정극인선생의 고현향약(古縣鄕約), 조선초기의 왕조실록에 관련된 분충거의(奮忠擧義), 조선시대 교육 기관이었던 무성서원(武城書院), 태조 이성계가 내린 공신록권(功臣錄券), 가사문학의 효시인 정극인(丁克仁)선생의 상춘가곡(賞春歌曲), 단군의 비(妃) 정순황후의 왕비유지(王妃遺地)와 더불어 칠보수력발전소를 이루는 3개의 인공 폭포인 화경폭포(火鏡瀑布) 등을 보배로운 일곱 가지로 나에게 들이민다.

농촌의 거리를 카메라에 담고 시내 끝 자락에 있는 효심 가득한 송현섭선생의 노래비등을 둘러보고 이 고장의 유적인 이원오사(二院五祀:두개의 서원과 5개의 사당)와 정각(亭閣: 루각) 중에서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가장 많은 유적이 자리하고 있는 무성리 원촌(院村)으로 향했다.

마을을 막 벗어나기 전에 좌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서 맑은소리로 흐르는 동진강 물길에 가로놓여진 다리를 건너면 곧 원촌에 다다른다. 이곳은 고운 최치원의 자취보다는 조선 초기의 학자 정극인선생의 그림자가 짙다.

마을로 들어서자 마자 보수를 위함인지 포장용 막을 둘러 입은 2개의 루(樓)가 나의 눈에 거슬린다. 무성리 원촌.

여기에는 이 지방의 많은 사당과 정자가 제각각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서서 동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필양사, 송탄사, 시산사를 비롯해서 한정, 송정, 후송정, 영성정, 모정이 있으며 곁의 무성서원에는 최치원을 비롯해 이 지방에서 꽃을 피웠던 선비들을 향사 한 태산사가 있다. 그렇게 많은 사당과 정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정읍에서 또는 칠보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나고 물소리를 벗 삼아 학문을 닦을 수 있으며 죽어서는 으뜸가는 명당터임을 증명하는 듯 하다.

봄빛이 여유롭게 머물기 충분한 원촌. 마을을 소개하는 입간판을 지나서 원촌에 들어서니 이 지방이 자랑하는 두분 중 하나인 정극인선생 동상이 나의 발걸음을 모르는 척 태연하게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옆에 서서 선비의 얼과 학문을 후손들에게 모두 상속하여 이미 자신의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미처 못다 핀 봄꽃봉오리들을 거느리고 서있었다.

정극인선생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나 처가인 이곳 고현내면에 내려와 원촌에 초가삼간을 지어 불우헌(不憂軒)이라 칭하고 지내며 이곳에서 안빈락도(安貧樂道: 불만 없이 빈곤한 생활을 즐김)하면서 성종임금에게 가사문학의 효시가 되는 상춘곡(현재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 됨)과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어올렸다고 한다.

곁의 사료관에는 이곳의 일곱 가지 자랑과 고현향약, 칠광십현도, 고현팔경 등 칠보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들어서려는 나에게 사료관은 휴관이라고 명찰을 내 보이며 나를 저지하여 조금은 아쉬웠다.

사료관을 뒤로 돌아 야트막한 성황산 기슭에 오르니 애국지사 춘우정 김영상(春雨亭 金永相)선생을 모신 사당인 필양사(泌陽祀)를 비롯하여 여럿의 사당과 정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영역을 지키며 서있었는데 그 중 송정(松亭)의 안내글이 나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 정자는 조선조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스스로 광인(狂人)을 자처하고 시를 읊으며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유유자적했던 칠광십현(七狂十賢)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 한 정자라고 한다. 중국에 죽림칠현(竹林七賢: 중국 진(晉)나라 초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 들어가 청담을 나누었던 일곱 선비)이 있다면 조선에는 올곧은 기개의 선비들인 칠광십현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도 문에 결계가 쳐져 있어서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따사로운 봄볕이 마당에 가득한 송산사를 곁눈으로 살피며 성황산을 내려와 연꽃이 물밑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연못을 끼고 돌아 나와서 실개천을 따라 드러누워있는 길을 따라 잠시 몇 걸음 옮기고 마을 안쪽에 버티고 서있는 홍살문을 마치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하듯 지나 무성서원으로 들어섰다.

이곳 무성서원은 옛날의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학교에 해당하며 특히 이곳에 있는 태산사에는 신라 말의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최치원은 예전의 TV 드라마 ‘왕건’에서 후백제 견훤의 책사로 나오는 최승우와 나의 조상이신 최언위와 더불어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그곳에서 벼슬을 하다 신라로 돌아온 동 시대 천재 3최(三崔)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현위를 거쳐 황소의 난 때는 고변의 종사관을 지내며 문장을 중국에 떨쳤다. 28세에 신라로 돌아와 한림학사 등으로 중국에서 배운 바 자신의 뜻을 펼치려 했지만 왕족들과 귀족들의 의심과 배타에 뜻을 펼칠 수 없고 간신이 판을 치니 선생은 외직을 자청해서 칠보면의 옛 지명인 이곳 태산군의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더욱 나라가 쇠퇴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죽음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혹자는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최치원 외에도 조선 중종 때 태인 현감을 지낸 신잠과 유학자인 정극인, 송세림 등 일곱분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 태산사라고 한다. 하지만 닫힌 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으나 태산사는 아쉽게도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길 거부하는 자물쇠를 내밀어서 대 문장가에게 향 한 자루도 올릴 수 없었다.

봄바람이 무척 세차서 내가 쓰고 있는 모자를 종종 손으로 붙들고 걸음을 옮겨야 했는데 무성서원 편액의 문체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서원 안에는 오래된 선인 문객들의 싯구가 텅 빈 서원을 찾은 나그네를 반긴다. 무성서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 이층 문루인 현가루에 올라 작은 마을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니 푸른 아지랑이가 봄바람에 한껏 흔들리면서도 들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피향정을 찾기 위해 마을로 돌아오니 시간은 이미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장기를 앞세워 터미널 주위에 있는 순대국밥집과 우족탕집을 갈등하며 오가다가 결국 순대국밥은 여느 장터에서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으니 우족탕집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마악 끝나는 시간인데도 손님이 꽤 앉아 있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우족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하고 메뉴판을 슬며시 확인하니 가격표 8천원을 붙이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조금 과용하는 듯 하다. 잠시 후 뿌연 국물에 구수한 향의 우족탕과 같이 내온 반찬이 혼자서는 너무 많은 십여가지나 되었다. 찬류를 네 가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주방으로 물리니 종업원아주머니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씨익 웃으며 “식사하기 전에 주방에 갖다 놓았다가 다른 손님 상에 내 놓으세요. 이것 네 가지만도 내가 혼자 다 먹을 수 없이 많은 양이니…….” 하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웃으시며 “녜에” 하고 가져 왔던 찬들을 쟁반에 담아가신다. 즐겁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족탕에 듬뿍 들어 있는 우족살을 안주 삼아  소주를 한잔 들이키니 칠보장터가 거의 사라져 아쉬웠던 마음이 쌩 하니 달아나 버리고 봄의 한낮만이 가슴에 가득 차 올랐다.

이미 터미널에서 버스시간표를 확인하여두었던 터라 여유롭게 음식값을 지불하며 “잘 먹었습니다.”하고 식당을 나서니 아주머니들이 입을 모아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기원해 준다.

내가 여행을 할 때는 가능한 그러하듯이 오늘도 운전석 옆의 맨 앞 자리에 몸을 실었는데 버스는 잠시 시동소리로 출발을 알렸으며 나 외의 손님은 더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터미널을 떠난다. 푸릇푸릇 울긋불긋 봄 들녘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외로운 승객이 되어 외로운 기사님에게 한마디하였다. “참 외롭겠네요. 승객이 저 혼자라…….” “하하하 농사철에 들어서니 더 손님이 없어서 종종 혼자서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아하! 참 그렇겠네요.” 둘이 같이 “하하하하”

중간에 타고 내리는 승객이 없으니 출발한지 채 2십분도 안되어 칠보에서 6키로 거리인 태인 터미널에 버스가 들어서고 기사님은 귀한 승객인 나에게 “이 옆이 피향정 입니다. 내리셔야 해요.” 하셨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빈 버스 안에 남겨 둔 채 카메라가방을 둘러메고 내렸다.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가 남원 광한루(廣寒樓)라면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은 이 피향정(披香亭)이라고 한다. 이곳을 피향정이라 명명함은 정자주변의 연못에 핀 연꽃 향기가 주위에 가득하여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신라 말기 고운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재임하면서 이곳 상, 하연지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연지는 없어지고 하연지만 남았으며  피향정의 창건연대도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심을 버렸던 선비는 얼마나 마음이 여유롭고 홀 가분 했었겠는가. 그렇게 유유자적하고 싶어서 호를 ‘외로운 구름(孤雲)’이라고 지었을까?

그 외로운 구름 한 덩이 이곳 연꽃향기 가득한 연못가에 머무르는 그림이 절로 떠 올려지는 피향정. 하지만 아쉽게도 근 현대식 건축물과 문명의 왁자한 이기들이 정자를 에워싸고 윽박지르며 옥 조이고 있는 것 같아 나그네의 가슴을 한없이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옛날 최치원이 여유롭게 풍류를 즐기는 영상을 호수에서 찾다가 피향정을 이십 여분 돌아보고 태인 터미널에서 칠보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니 칠보에서 올 때 타고 왔던 버스가 신태인 종점까지 갔다가 칠보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나를 태운다.

버스에서 내려 작년 단풍절기에 내장산등반을 마치고 지인의 안내로 국화꽃 축제에 들렸다가 인연이 맞닿은 태산선비문화관 사무장으로 계시는 최재필선생을 찾아갔다. 동진강변에 단출하게 서있는 문화관으로 들어서니 금방 칠보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나오신 최선생이 반갑게 맞으며 녹차를 내어놓으신다. 바쁜 업무에 방해를 주는 것 같아 약간 미안한 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쉽게 그리고 자주 올 수 없는 칠보이기에 염치를 불구하고 오늘 돌아보았던 문화유산의 궁금증과 또 다른 호기심들을 풀어놓았다. 최재필선생은 싫은 내색 없이 나의 질문에 세세한 설명과 또한 최치원선생의 이야기가 짙은 감운정으로 손수 차를 몰아 나를 안내하시고 설명도 해주셨다.(더불어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 같은 칠광십현도 영인본도 한 장 넘겨주셨다.)

문화관에서 불과 오백 여 미터 거리에 있는 감운정(感雲亭)은 이곳을 휘어 감도는 물길에서 최치원선생과 검단대사가 술잔을 띄우고 글을 읊는 류상곡수(流觴曲數)를 즐기시던 유상대 옛터에 후손들이 최고운(崔孤雲)을 기리고 사모하기 위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 류상곡수놀이는 중국 진나라때 왕희지가 지은 난정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반곡리에서 흘러내려오는 고운천의 물과 동진강 상류 칠보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큰 암반 위에 곡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1930년대 칠보수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물의 양이 많아져 동진천을 넓히고 수로를 바로잡으면서 이제는 그러한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복원도 어렵다고 한다.(검단대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이 들어오기 전인 신라시대 스님으로 고창 선운사를 창건했다고도 하는데 연대는 확실치 않다.)

이곳에서 수 킬로를 거슬러올라간 강가에 세류앵가(細柳鶯歌)의 고장인 세류마을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버드나무도 찾아볼 수 없고 꾀꼬리의 소리는 더더욱 머물지 않는다고 하여 아쉬움을 남기며 인근의 용계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 이름 그대로 용의 냇물인 동진강 가에 태극을 가슴에 그려넣고 서있었는데, 최재필선생이 서원의 대문을 열어주시겠다는 호의를 감사한 마음으로만 갈무리하고 나지막한 담을 넘겨다보는 걸로 만족을 하기로 했다. 이곳은 무성서원과 함께 칠보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조선조 숙종 때 창건하여 최서림(崔瑞琳)을 향배하고 그 후로도 여러 선조 문인들을 배향했다고 하는데 담 너머의 서원에는 근자에 발길이 끊긴 듯 인적의 자취가 가물하였다.

이제 최재필선생에게 감사와 안녕을 고하고 터미널로 돌아와 서울로 향하는 저녁 귀가 길에 접어들었다.

정읍의 칠보면을 중심으로 ‘태산선비문화권역’이라고 하는데, 이 권역에는 이곳을 거쳐간 많은 인물들을 바탕으로 유풍과 학풍이 성립되었으나 그 첫번째가 최치원선생의 ‘태산풍류’라고 하고, 이 ‘태산풍류’를 바탕으로 광주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산풍류’를 비롯하여 김삿갓의 시가 태어난 화순 적벽의 경치와 문화인 ‘적벽풍류’로 이어진다고 한다.

자랑스런 향토사적과 문향이 진하게 맺혀있는 이곳 칠보에는 보존되어 있는 많은 유적과 소실된 문화유적들이 잔존하고 있는데, 이런 유적들을 하루빨리 발굴, 복원하고 발전시켜 이 문화권이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최치원 중심의 태산풍류로 다시 부활되어 많은 문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기 바라며, 성가신 나그네에게 도움을 준 칠보면 직원과 문화관의 최재필선생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