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산하를 꽁꽁 결박하던 추위가 잠시 물러가고 다소 따사로운 훈김이 서리더니 오늘은 저렇게 하늘가에 층층구름이 몰리는걸 보니 내일은 기상대의 예보대로 눈이나 비가 오겠다.

어느덧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어내려 온지 꽤 됐지만 아이들 소망처럼 기왕 내릴 거면 비가 아닌 눈송이가 하늘을 가득채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감사의 주간인 금주도 이제 명을 다하고 있으니 2009년 한해의 수명도 그저 터럭만큼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평소 종종 하던 산행은 겨울이 되면 일기상 섣불리 할 수가 없다.

전문적은 아니지만 나는 여기 저기 산을 찾아 가벼운 등산을 즐기곤 했었는데, 무리 없이 오르는 산행은 아무래도 거주하는 지역에 가까운 관악산이 최고 만만하여 시간적, 경비적 제약을 피해 종종 올랐었다.

올해도 10여 번 정도 관악산에 올랐었는데, 서울과 과천, 안양에 걸쳐 위치한 관악산을 오르다 보면, 산길에서 가끔은 본지 오래된 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은 산행 중에 커다란 기쁨이었다.

지인들뿐만 아니라 사회 인사들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지난 늦가을에는 산정에 올랐다가 삼막사로 오르는 길을 거꾸로 거슬러 서울대 앞으로 내려 가는데, 여당 국회의원 한 분이 지역구 당원들과 함께 가쁜 숨을 참아가며 올라오고 있었다.

서산에 해가 언뜻 걸리려는 시간이라 서둘러 내려가던 나는 인사와 악수를 나눈 후, “남은 산행 잘 하세요.”하고 각자의 갈 길로 향했다.

몇 년 전까지는 돌계단이었던 등산길을 해당 지자체에서 억지 포장한 나무계단을 아내와 같이 내려가면서 잠시 상념에 빠졌었다.

오늘 나는 이렇게 내려갈 산길만 남아있을 뿐, 더 이상 오를 정상이 없는 것이 이 시각 산객인 나의 현실인 것이다.

내려 만 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 보다는 훨씬 덜 힘들겠지.

하지만, 저 의원의 산행은 나름대로의 오를 정상도 있고, 다시 내려갈 산길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산행을 인생에 비교하면 과연 나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나는 이미 봉우리에 올랐다 내려가고 있는 지금, 이 산행처럼 내게는 또 다른 등산할 인생의 봉우리는 없는 걸까?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지천명인 내가 판단하건 데, 더 이상 오를 봉우리는 없을 것 같다.

그저 군말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내 인생의 산행에서 이제 목적지는 산 아래 마을일 뿐, 하나님의 자애로운 은총을 내가 더 이상 기대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지금 산길을 오르는 저 의원의 등산길은 오를 봉우리가 남아있고, 인생의 산행도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고, 국제축구협회 부회장이면서 여당의 대표이니 부러울 것 없는 그 이지만 오르려는 정상이 그에겐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최고의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아직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에 비해 세월을 산 건 그나 나나 지척간인데 나는 크게 오른 곳도 없고 이제는 오를 곳도 없다.

그렇도록 삶의 산행에서 부질없이 내려가던 하산길인 올해는 내게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오늘 나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가 같다’라는 뜻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李珥)가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일체이니 정성껏 받들어야 하며, 자기 생각대로 스승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좋지 못하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됐다고 하는 ‘군사부일체’.

조금 더 자료를 찾아보니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중국 남송시대 유학자인 주희(朱熹)가 편찬한 소학에서 나왔으며, 더 근원으로 올라가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 중 진어(晉語)에서 비롯됐는데, 조선시대 율곡선생이 소학과 관련된 여러 주해서(註解書)들을 모아 편찬한 ‘소학집주(小學集註)’에서 이 말이 나온 것을 보고 이이 선생의 말에서 유래됐다고 설명하고있다.

‘갑자기 웬 군사부일체?’하고 의아해 할 테지만 올해의 나는 정확히 군사부일체를 모두 다 잃었다.

아니, 군사부일체가 모두 나를 떠나가셨다.

그 중에 한 분이신 아버지는 내게

“아범아! 소주 좀 사다 줘라. 변이 안 나와 밥도 못 먹겠다.” 하셔서

“아버지! 반 병씩 만 드세요.”하고 소주 3병을 사다 드렸던 이틀 만에 그마저 다 못 드신 채 소주 한 병을 남기시고 85세의 연세에 불현듯, 오랫동안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서 식물인간으로 간신이 살고 계시던 어머니보다 먼저 4월에 내 곁을 떠나셨다.

5월.

아버지를 곱게 빻아서 호국원에 모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여동생과 간병인의 통화내역을 알아들으셨는지 두 번이나 삶의 끈을 놓으시려 하셨었다.

오래도록 무의미하고 고통스럽게 버티시던 어머니는 그렇게도 편애하시던 큰아들의

“이젠 그만하세요.”

“죽음에 항거하지 마세요.”

“힘들잖아요.”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세요.”

“이젠 편안하게 가세요.”라는 말을 들으신 후 권유를 받아 들이셨는지 이틀 만에 75세의 일기로 아버지 곁으로 떠나가셨다.

부모님을 불효스럽게 보내드린 후 올해의 슬픔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올해의 여름이 꼬리를 말고 나와의 인연을 마치려 할 즈음에 갑자기 전해 져온 비보.

고등학교 3년 동안 담임이셨고, 특히나 은퇴하신 후에도 우리부부를 위해 주례를 서주시고 특별히 예뻐해주시던 내 존경하는 스승님이 갑자기 비브리오 폐혈증으로 내 곁을 떠나신 것이다.

사모님을 사랑하여 사모님을 위해 모든 끈을 놓고 은퇴하시어 난을 재배하시던 내 선생님.

난초 잎처럼 얇지만 강건하게 사시던 내 은사님은 그렇게 또 가셨다.

거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겁하고 구차한 삶을 용감히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남북정상회담의 역사를 흔적으로 남기고 다음 세상으로 떠나셨다.

그 분들은 내 맘에 안 들었던, 잘못된 정책을 했던, 나를 포함한 이 나라의 한 때 임금이고 국부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올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내 의사와 관계 없이 모두 보내드렸다.

사실 미디어의 중독성인지 몰라도 영화제목인 ‘두사부일체’, ‘상사부일체’가 먼저 떠오르고 정작 ‘군사부일체’는 내 뇌리의 변두리를 뱅뱅 돌다가 어렵게 내 손끝으로 떨어지니, 나는 이미 효도할 자격이나 충성할 자격, 심지어 스승의 은혜를 논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보내고 싶은 분들은 내 뜻과 달리 가셨지만, 올해 끝내고 싶었던 몇 가지 일들은 질기게 나를 물어 뜯으며 해를 넘기고 있다.

못난 처신의 결과라 내려가야만 하는 내 삶의 산행길에서 예상하면서도 감수하는 내게 그 질기고 힘든 악연들은 종종 곤혹스럽게 나를 괴롭힌다.

그렇게 아쉬운 군사부일체는 애달프게 나를 떠나버리고, 벗어버리고 싶은 인생의 굴레는 느릅나무에 올라타고 배배 감아 도는 저 발칙한 칡넝쿨처럼 내 인생의 마디마디를 휘감고 해를 넘기며 끈질기게도 옭아맨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는가?

이제 우리나라가 경제의 바닥을 쳐서 더 떨어질 곳이 없는 것처럼 내게도 더 이상의 나락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도 우리 국민들의 삶도 또한 내 삶도 내년에는 나아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가오는 새해에는 그나마 남은 우리의 것을 아껴가며 남들처럼 커다란 정상은 아니더라도 뒷산 아지랑이 피는 작은 동산에라도 오르는 꿈을 꾸며 살아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반딧불 같은 희망을 찾아 다시 살아 볼 사유를 갖게 되는 것이며, 죽기보다는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 아니던가.

내년에는 호랑이해 인데, 호랑이처럼 크게 포효하지는 못할지라도 한번 호랑이울음을 흉내는 어설프게라도 내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흥!”

이제, 나름 어려웠던 올 한해를 교훈으로 삼고 새해를 알차게 계획하고 잘살아 봐야 할 일이다.

크리스마스인 내일은 정말 겨울비보다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굳이 어린아이들 마음을 빌리지 않더라도 떠나가신 나의 ‘군사부일체’에게 눈송이를 흰 국화꽃 삼아 이 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번 명복을 빌고 싶다.

아팠던 올해의 기억들을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눈이 내일은 내렸으면…….

200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