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횡단하는 여행은 절로 여유롭고 풍요롭다.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의 숨소리도 그렇거니와 작은 마을어귀에 어김없이 붉은 결실을 풍성하게 달고 한가로이 서있는 감나무의 자태는 나그네를 더욱 느긋한 가을향에 머무르게 한다.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안을 달리는 가을은 넓은 들판의 살아 숨쉬는 것들에게 공급하던 햇볕을 차창너머 나에게도 아낌없이 나눠준다.

내가 탄 버스는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멈추는 정류소마다 삼삼오오 태운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제법 제 몸을 채우더니 큰 도로와 작은 도로를 번갈아 오르내리던 끝에 2시간 여 만에 남도의 작은 도시 의령으로 들어선다.

이곳 의령의 5일장은 각 3,8일에 열리는데, 승객의 대부분 장을 보기위해 이렇게 찾아온 것이며, 나 또한 그 틈에 끼어 볕이 좋은 5일장을 구경하기 위해 아침을 거른 채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다른 승객들은 마을입구의 시장근처에서 내렸지만 나는 굳이 되돌아 몇 십분 걸어 나올 것을 감수하고 터미널에서 내린다.

이곳 저곳으로 떠나는 버스시간표를 메모하며 이번 일정을 간략히 계획해 보는데, 일반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이라 버스시간표는 상당히 중요한 사전 지식인 것이다.

이제 준비도 끝났으니 인근의 장터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의령5일장

십 수분 걸어서 도착한 의령시장은 제법 커다란 재래 장터였다.

입구에 있는 상점에서는 대나무로 만든 물건들 사이에 송곳같이 내 눈에 들어서는 물건이 있었다.

‘아~! 저건 도리께?’

콩이나 깨를 말려서 두드려 터는 도리께를 팔고있었는데, 내겐 하등의 필요도 없는 물건인데 낯선 곳에서 낯설게 만나니 그저 반갑다.

기존 상점들에도 각종 상품들이 그득히 들어차서 인근에서 온 손님들의 흥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것들을 언제나 다 팔꼬?’하고 내가 걱정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콩, 좁쌀, 찹쌀 등 곡물상점과 무와 배추 등을 파는 야채상점, 해산물상점, 방앗간, 속옷가게, 등뼈를 앙상하게 발라 놓은 푸줏간, 신발가게 등등…….

하지만 5일장구경의 백미는 시장 끄트머리 양지바른 곳에 아무렇게나 벌려 놓고 파는 할머니들의 작은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이리라.

이곳 저곳 텃밭에서 뽑아온 것 같이 한 웅큼의 상추, 콩, 마늘, 대추, 고추들 사이에 처음 보는 열매들도 있어 물어보니 산초열매, 개암, 동부(콩 종류),시금치씨앗 등 낯선 작물들을 볼 수 있었다.

팔리던 말던 마냥 볕을 쪼이고 한가롭게 앉아있는 할머니들 품에서 이런 귀한 산물을 구경하는 것은 마치 어렵게 찾은 숨은그림처럼 절로 나의 엔도르핀을 솟아나게 한다.

그밖에도 벌려서 둥글게 진열된 닭과 껍질을 벗겨서 말린 개구리, 각종씨앗, 가을의 상징 태양초고추 등 장터를 세세히 구석구석 둘러보다 보니 걸음을 서둘렀는데도 어느새 정오가 넘어가고 배가 몹시 출출하다.

5일장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구수한 국밥에 막걸리 한 잔이 제격일 것이다.

할머니들에게 물어서 최고 맛있는 국밥집을 찾아간다.

의령에는 ‘망개떡’과 지금도 일본식으로 ‘소바’라고 부르는 메밀국수와 더불어 ‘소고기국밥’이 명물이라고 한다.

사실 국밥은 장터구석에 탁자와 의자를 널브러지게 놓은 마당에서 시장의 살아있는 소리와 함께 먹어야 제 맛인데, 이곳 명물인 소고기국밥은 군청 입구의 대형 음식점들이 최고 맛있는 전문식당이라고 한다.

가르쳐 준대로 찾아간 식당은 주차장완비에 제법 큰 건물이었는데, 이곳의 소고기국밥은 다른 지방에서는 소뼈로 육수를 내는 것과는 다르게 순수 소고기로만 육수를 우려낸다고 한다.

구수한 냄새를 따라 전문 식당인 중동식당에 들어서니 홀이 2층까지 있으며 1층에는 거의 만석을 이루고 있었고, 종업원들의 발걸음이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2층으로 부산하였다.

혼자서 한 테이블을 차지하기는 약간 미안한 감도 없지 않지만 어찌 이곳 명물이라는 국밥을 외면하리요.

앉아서 내 차례를 기다리니 어언 20여분 만에 먹음직스러운 국밥이 몇 가지 찬과 함께 내 앞에 다소곳이 내려앉는데, 긴 기다림에 식욕이 더 당기고 소주 한 병을 시켜서(마침 막걸리는 동이 났단다.) 새우젓과 다대기로 간을 맞춘 소고기국밥을 먹으니 ‘그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되어졌다.

국밥의 가격은 6천원.

맛있게 한 그릇 먹고 신발을 찾아 신으며 음식값을 내놓는 나에게 종업원 아주머니가 거스름돈을 내주면서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미안합니다.”한다.

“아니오? 기다린 보람을 느끼게 하는 국밥 맛이네요. 의령이 자랑스럽게 내 놓은 맛으로 손색이 없더군요.”라고 화답을 하니 “어이구! 참 고맙습니다.”하고 얼굴을 활짝 피운다.

**충익사(忠翼祠)

소싸움으로 유명한 의령은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역사가 있으니 의병장 곽재우장군과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곳간을 소유하게 한 전설적 경제인 호암 이병철회장의 탄생이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 곽재우장군의 사당이 있는 충익사는 시장에서 불과 수분거리에 있으니 남은 시간을 쪼개어 들려보기로 하였는데, 이곳에 왔으면 장군께 인사와 향 한 자루를 올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시장에서 도로를 건너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 곳에 충익사는 조용히 자리잡고있었고, 입구인 다리 저쪽에는 장군과 17장수, 그리고 수천의 의병을 상징하는 하얀 의병탑이 마치 역발산기개세를 뽐내듯 지키고 서있었다.

어느 곳이나 탐방객이 한적한 선조들의 사당처럼 익어가는 가을 한낮의 충익사는 따사롭기만 한데 병아리처럼 노오란 유니폼을 입은 유치원생 2십 여명이 나들이를 온 듯 충익사의 잔디밭 여기저기에 앉아 노오랗게 물들이고 있어 한결 공백의 크기를 줄이고있었다.

이곳 충익사에는 곽재우장군의 사당 좌우로 충의각과 기념관 등 부속 시설들이 늘어서있는데, 사당에 향을 피우고 장군과 장령 및 무명의 의병들에게 예를 드리고 올라선 기념관에는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의 기마상이 준엄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장군의 유품 등 보물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예전 같으면 유림에 해당하는 내가 오늘 여기에서 유독 무신인 장군의 장검에 마음이 머무는 건 아마도 국난에 대한 장군의 애국심을 나도 같이 느끼고 있음일 것이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장군(郭再祐將軍)’

그보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우리 국민들이 가슴속 깊이 존경하는 장군은 남도의 한적한 도시 의령에서 그렇게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며 머물고있었다.

**일붕사와 봉황대 그리고 예술촌

충익사를 나와 버스터미널로 걸음을 재촉해서 궁유행 2시30분차에 어렵게 올라탔는데, 그건 미리 시간표와 일정을 비교해서 그나마 돌아볼 세가지가 모여있는 궁유로 갔다가 오늘 늦게나마 벌교로 떠날 참이었다.

조정래선생의 대작 ‘태백산맥’의 주무대이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꼬막의 고장 벌교에서는 내일 5일장이 열린다고 하여 일정을 잡은 터였다.

들길을 건너고 산길을 오르는 노선이 한없이 여유롭긴 한데 급히 버스를 탄 터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정확히 몰라서 불안하던 차에 마침 뒷문 옆에 앉아계신 젊은 여스님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일붕사로 가는데 스님도 그곳으로 가시느냐는 내 짧은 물음에 여스님은 일붕사에 가는 동안은 물론이고, 도착해서도 일붕사와 봉황대에 대한 많은 설명과 조언, 더군다나 일붕사 앞의 상점에서 따끈한 커피도 한 잔 얻어 마시는 즐거움까지 주셨다.

버스는 산과 밭 사이로 난 도로를 더듬어 가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여유롭게 내리고 타시도록 무한정 기다려주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버스가 정차하는 건 연로하신 노인들이 움직이는 차 속에서 넘어져 다치지 않도록 정차 후 일어서서 내리시고, 타서 좌석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출발을 한다는 설명을 듣고 가을들녘에서 기사님들의 따스한 마음을 읽을 것 같아 내 마음은 더욱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여스님과 함께 들어 선 일붕사는 여느 사찰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고 곁에 있는 실버타운과 복지관등 사회사업을 위한 덩치 큰 건물동이 눈에 들어와 썩 호감이 가질 않았지만, 사찰이 생존하려면 그만큼 필요한 자본이 있어야 할 것이라 이해를 하며 둘러보았다.

같이 온 스님은 전에도 이곳에 머물렀었는데, 오늘 다시 얼마간 살러 왔으며 큰스님께 인사부터 하러 가야 한다며 나한테는 천천히 둘러보라고 하신다.

이곳은 ‘봉황대’라는 암반절벽의 허벅지에 살을 내려 지어진 사찰로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총본산이라고 하는데 ‘일붕선교종’은 그때까지 내가 생소한 불교 종파였다.

사찰 곳곳을 둘러보다 대웅전에 당도하니 어느새 여스님이 인사를 마쳤는지 내 앞에 나타나 안내를 하는데, 따라서 들어선 대웅전은 겉에서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자그마한 절 집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희미한 조명 속에서 웅장하게 넓고 또 깊었다.

이곳은 원래 서기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 자리로서 현 주지스님이 돌산을 오랜 기간 장비로 깎아내서 동굴법당을 지었다고 하는데, 영국 기네스북에 인조동굴로는 세계최대 동굴법당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며 그 증표를 입구에 훈장처럼 달고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줄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일본은 물론 중국의 동북아공정에 맞서야 만이 향후 나라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여스님의 열변을 뒤로하고 일주문을 나서 일붕대종사의 유적을 지나 봉황대에 올라서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지러운 암벽을 지난 바람을 달콤한 어미젖인양 늘여 물고 의령의 들녘은 그곳에 누워있었다.

가녀린 암반 외길을 걸어 내려와 코스모스가 제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 있는 들판을 가로 질러 의령예술촌으로 찾아 든다.

이곳은 폐교한 초등학교를 활용하여 잘 꾸며놓았는데, 이미 시간은 오후 5시로 접어들어 폐장이 되었는지 가을볕만 마당에 가득 적적하여 관람을 포기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뜰에 전시된 인상적인 작품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들어서는 전시실 입구에서 한 아낙네와 퍼뜩 맞닥뜨린다.

“안녕하세요? 구경 왔어요.” 하고 인사하니 관람객이 없어서 한시간 일찍 문을 닫으려고 나오던 길이라며 되돌아서 기꺼이 문을 열어준다.

스위치를 올려 전등을 켜고 들어선 이곳은 2층 건물에 시화와 전래풍습 미니어처, 민속공예와 생필집기, 사진작품과 동서양화 등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놓았는데, 그래도 나는 글을 더 좋아하는지라 시화들에 맘이 있어 짧은 시간에도 조금이나마 더 시간을 할애하여 감상하였다.

가을햇빛이 누런 결실에 제 그림자를 키울 때쯤에 나도 내 그림자를 재촉하며 예술촌을 나와 궁유의 버스정류장이 있는 구멍가게 앞에 닿을 수 있었다.

농촌의 구멍가게가 다들 그렇듯이 전등을 켜기 전의 전방(廛房) 앞에는 아저씨들 네 분이 소주 한 병에 오이김치 한 접시를 소반에 얹어 놓고 정담이 한창이었다.

버스시간을 물으니 앞으로 30분의 여유.

탁배기 한잔하고 싶은데 30분만에 안주 한 접시는 정말 과용인지라 머뭇거리다 아저씨들한테 어렵게 부탁을 해본다.

“제가 버스 오기 전에 막걸리 한잔하고싶은데 오이김치 몇쪽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 하니 손을 들어 반겨 맞으며 얼른 오라고 하신다.

옆에 있는 양조장에서 궁유막걸리 한 되(2천5백원)를 사고 잔을 빌려서 아저씨들의 술상에 합류하였더니,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저녁반찬으로 준비했던 고등어조림과 두부김치를 아낌없이 내놓으셔서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격 없이 도시와 농촌이 사는 이야기, 그리고 가을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흥에 겨워 거푸 술을 마시다가 얻어 먹은 안주와 정담 값으로 소주 두병을 사서 아저씨들에게 강권하고 잠시 이야기에 젖어 들 무렵 버스가 오는 소리에 황급히 배낭을 둘러메고 손 흔들어 작별하며 달려가서 의령행 버스에 올랐다.

타고 보니 저녁이 깊지도 않은데 승객은 나 혼자다.

기사님과 단둘이 버스를 타고 어스름 밤이 내리는 들판을 거슬러 내려오는데, 궁유의 아저씨들이나 버스 기사님이 벌교보다는 내일 의령의 신반면에 장이 선다며 구경하고 의령을 더 둘러보라고 권하니, 가을바람에 서서히 흔들리는 벼 알곡처럼 내 마음은 어느새 묵직이 움직이고있었다.

신반장 근처에는 곽재우장군의 생가와 이 시대 우리나라 최고부자를 탄생시킨 이병철회장의 생가가 있다고 하는데, 언제 다시 이 의령에 내 발길이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이미 어둠에 갇혀버린 의령에 되돌아와서 나는 내일의 여정을 위해 달랑 깍두기 한 접시와 나온 의령명물 ‘소바’ 한 그릇을 날름해치우고 인근 대폿집에서 두부김치에 막걸리 한 잔으로 하루를 마감한 후 모텔을 찾아 들었다.

**신반5일장

오늘은 어떤 모습의 5일장이 내게 기쁨으로 다가오려는지…….

나는 이미 엊저녁에 벌교로의 계획을 변경하여 의령의 또 다른 장인 신반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아침은 잠시 후 만날 신반장의 국밥으로 점심과 겸해서 즐길 요량으로 10시 10분 대구행 시외버스에 올랐다.

기왕 온 김에 의령이라도 더 제대로 여행해볼 생각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사실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면 조금 더 망설이고 일행을 배려하며 협의를 거쳐야 하는 일을 이렇듯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 ‘홀로여행’ 만의  매력인 것이다.

신반면으로 가는 노선 중간중간에 곽재우장군의 생가와 호암 이병철선생의 생가가 있으니 시간을 잘 활용하면 두루 둘러보고 여유롭게 다음 행선지로 향할 수 있으리라.

헐겁게 승객을 싣고 들길로 나서는 대구행 시외버스는 곳곳의 촌락을 들르고 고갯길을 사뿐히 넘어 신반면으로 달린다.

30여분 만에 도착한 산간의 한 마을은 어떻게 이곳에 그 큰 또아리를 틀었는지 의령만은 못하지만 제법 마을이 크고, 이곳 저곳으로 오고 가는 교차점인 터미널에는 할머니들이 짐 보따리를 앞에 두고 가을 따가운 볕을 피해 서늘한 그늘에 나란히 앉아계셨다.

터미널은 항상 도착의 즐거움 속에 이별의 아릿한 통증이 스며있는 곳이다.

시장은 제법 큰데 아무래도 의령보다는 문을 닫은 상점도 군데군데 있고 손님들 발길이 조금 한가롭다.

시장 속으로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스며들어갔다.

조금은 바랜 것 같은 빛깔의 장터에는 잡화를 조금 늘어놓은 좌판을 필두로 잔뜩 널브러지게 늘어놓고 토란대를 까는 할머니, 햇밤을 파는 할머니, 빙 둘러서 앉거니 서거니 하여 소주를 나눠 드시는 할아버지들이 시골장의 풍경을 한가롭게 그려 놓고있었으며, 어린아이 엉덩이처럼 오동통하게 쑤어 내 놓은 도토리묵, 밑동을 철사로 꿰어서 동그랗게 펼쳐놓은 포기상추며, 언제 말린 건지 잘 말린 나물들이며, 가을볕을 쪼이며 모여있는 옹기 항아리들이 이곳이 산촌의 시골장임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었다.

속속들이 시장의 속살을 들쳐보다가 신반시장의 최고 맛있는 국밥집을 상인에게 물으니 어디랄 것도 없이 시장에 단 하나뿐인 돼지국밥집을 알려주었는데, 이름하여 ‘소문난 국밥집’.

뿌옇게 달아올라서 시장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국밥 그 향기를 따라 들어 선 곳에는 아직 점심시간이 일러서인지 내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돼지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을 시키니 아주 자그마한 아주머니가 잰 몸짓으로 맛깔스러운 국밥을 한 그릇 말아 내온다.

시장에서 먹는 국밥은 이렇듯 분주하고 조금 덜 정돈된 곳에서 막걸리 한 잔과 같이 먹는 맛이 정말 제대로 된 국밥 맛이다.

마침 허기졌던 차에 한 그릇 잘 먹고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를 건네며 밥값을 내미니 “타지에서 오신 것 같은데 국밥은 입에 맞습니까?”하고 물으셔서 나는 주저 없이 “원래 경상도음식은 서울사람들에게는 별로 맛이 없다는 선입관이 있는데 여기 국밥은 참 구수하고 맛이 있네요.”하고 답을 하니 요즘은 시골장터에도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이제는 그 입맛에 맞추다 보니 타지 사람들에게도 국밥 맛이 거북하지 않게 맞춰졌다고 하시며 흡족하게 웃으셨다.

**곽재우장군과 호암 이병철선생 생가

정오를 못 미처 신반장을 나서서 터미널에서 다시 의령으로 내려가는 버스시간표를 확인하니 12시와 2시30분에 신반을 출발한다고 한다.

곽재우장군의 생가를 지나 이병철선생의 생가를 거쳐서 의령으로 돌아가는 노선이니 버스시간과 시간사이를 잘 활용하여야 한다.

나는 인근 유곡면에 있는 현고수와 장군의 생가로 가기 위해 12시차에 몸을 실었다.

내가 여행 중에 버스를 탈 때면 가능한 한 맨 앞 좌석에 앉는데, 그건 이렇게 여유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커다란 대형화면으로 보듯이 맘껏 즐겨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맨 앞 좌석을 보니 농촌버스승객답지 않게 세련된 차림의 다소 젊은 여성 한 분이 앉은 옆 좌석이 비어 있어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기사님에게 곽재우장군 생가를 간다고 하였더니 옆 자리의 여성이 그 지역사람인지 참 고맙게도 세세하고 자상하게 곽재우장군의 생가와 이병철선생의 생가에 대해 위치와 관광포인트 그리고 유래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장군생가입구의 다리 앞에서 배낭을 메고 내렸더니 버스는 뭐가 그리 바쁜지 나를 내려놓자마자 쏜살같이 산길을 더듬어 달아나버리고, 근처 야산에선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만이 나를 반기며, 한낮의 마을은 한가롭고 텅 빈 채로 깊은 가을을 나고있을 뿐이었다.

아득한 가을볕을 뒤로 지고 들어선 마을어귀에는 전설의 ‘현고수’가 양양하게 서있었는데, 이름하여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는 전국 최초의 의병 발상지의 상징적 느티나무인 것이다.

내가 바라본 느티나무 ‘현고수’는 허리를 우로 잠깐 숙였다가 500년 제 나이도 잊은 채 올 곧게 제 늙은 몸짓을 뽐내고있었다.

어쩌다 마주친 농부에게 길을 물어서 장군의 생가로 찾아가는데, 금새 메뚜기가 후두둑 튀어 오를 것 같은 들을 지나 작은 마을 속으로 들어서니 곳곳이 유적인 것같이 고택마다 각자의 고고한 이름표를 대문 위에 내붙였다.

촌락의 가옥들 낮은 담을 지나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장군의 생가.

5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수문을 서는 정문을 지나 들어선 곳에는 북적대는 애국의 발길은 없었고 하양 어지러운 어린아이들의 발길과 웃음소리만 가득 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애써 잡으며 생가를 더듬는데, 그 옛날 장군의 애국심과 기개세를 생각하니 마음은 서글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나는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이렇도록 무관심한 국민들이 국난이 닥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라를 구하려 민족을 지키려 나섰던 우리의 국민성을 나는 깊이 믿기 때문이다.

옛 것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2002년 월드컵에서의 대대적인 국민의 융합 단결을 보여준 응원의 함성, IMF 어려운 시기에 너나없이 서민층들로부터 일어난 금 모으기 등 위기 때마다 모아지는 우리 국민들의 단합을 나는 보아왔기 때문이다.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초야에 묻혀 문무를 닦다가 선조 25년(서기1592년) 4월13일 왜병이 침입하여 서울로 향하자 ‘나라를 지키는 일을 관군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4월22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의 나이 41세에 마을 앞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집안의 종들을 주축으로 주위의 민중들을 모아 의병군을 창설하였다고 한다.

이제 장군의 생가도 다 둘러 보았는데 정오에서 30여분이 지난 시각.

이병철선생의 생가를 가려면 아직도 2시간 여를 기다려야 대중교통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정부의 대중교통정책은 대도시에 머물러 있을 뿐 이곳에서는 해답이 없어 난감하지만, 이용객이 적어서 어쩔 수 없는 교통 체계일 수 밖에 없으니 마땅히 감수해야 하겠지.

이병철 생가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2시간은 나의 일정에 시간 낭비며 의미도 없고 부담스럽다.

할 수 없이 하이킹을 시도해보지만 산적같이 험한 내 몰골을 보고 선뜻 차를 세우는 운전자들은 없었다.

하긴 나도 대형덤프 트럭들을 손들어 세울 엄두도 못 내겠으니 할 수 없이 6킬로 떨어져 있다는 이병철선생 생가를 도보로 방문할 수 밖에 없었다.

따가운 볕을 머리로 맞으며 걷는 인도가 부실한 산길에 왜 그리도 많은 대형덤프 트럭들은 굉음을 내면서 나를 위협하고 지나가던지…….

걷고 묻고 걷고 또 물으며 이병철선생 생가를 가는 길이 오랜 걸음에 덥고 갈증도 났지만 신반에서 떠나올 다음버스를 생각하니 발걸음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가운 볕을 받으며 두시간 가까이 걸어서 어렵게 들어선 마을에는

가옥들이 고풍스러운 담장을 서로 견주고 있었고, 이정표를 따라서 들어선 이병철선생 생가에는 관리인과 몇 분의 방문객, 여성 자원봉사자가 뜰을 지키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곳은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을 하고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이 되어 맺혀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 아니라, 널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기 때문에 재물이 쌓일 수 밖에 없는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를 중요시하는 동아시아 삼국은 모든 묘터와 집터, 사옥까지도 풍수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인 이병철선생 후손들이나 그 외 손꼽히는 부자들도 사옥을 지을 때 철저히 풍수지리에 의존해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는데, 물론 좋다는 설에 굳이 역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의 비과학적인 풍수에 대한 의지가 조금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바삐 서둘러 걸어오느라 갈증이 심하다.

잠시 생가를 둘러보고 마을로 들어올 때 봐두었던 입구의 작은 식당에서 버스시간을 확인하고, 짧은 자투리시간을 할애해서 주인 아주머니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곁들여 시원한 동동주를 마시다가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진주행 버스에 몸을 실으니 의령의 여문햇살도 제 몸을 추스르고 나의 가을여행에 따라 나선다.

2009년 10월 볕이 좋던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