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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임정수 수필소설작가 문학서재

ㆍ작성자 임정수
ㆍ작성일 2007-09-02 12:12
ㆍIP:
석굴암에서 참선 중에
석굴암에서 참선 중에 / 임정수


살며시 어깨를 스치며 자아를 깨우는 한가닥 실바람에 내 몸이 어물고 있는 공간이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참선의 깊이를 가늠하여 내가 속한 공간이 한줄기 실바람에 반응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
화들짝 깨어나는 공간의 존재감 앞에 무릎을 꿇을 때가 있는 것이다.

눈 한번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에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버린 실바람의 감촉을 깨우는 공간의 느낌,
수 만가지 의문으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 존재 앞에 나의 자아는 갑자기 깨어나 금새 잠이 든다.

어디로 갈까?
바람이어도 좋다.
하얀 구름처럼 정처가 없어도 좋다.
내게 중요한 것은 조그만 몸짓에도 자아가 깨어나 반응하는 것이다.

참선을 하다보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르게 때로는 비슷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계절을 다 보내고도 뚜렷이 잡히는 게 없는데도 나를 깨우는 자아는 언제나 나와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다.
다만, 나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을 뿐이다.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다 잠시 쉬었다 가는 바람을 보았다.
나를 깨워준 바람이었던가.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바람, 이 바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러다 문득 탄식한다.
바람은 아무런 댓가도 바라지 않고 지나갈 뿐인데,
잠시 어깨를 스치며 나를 일깨웠다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한여름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아래 구름도 햇볕을 피하고 바람도 잠시 쉬어가자고 들른 곳인데,
그 가운데에 내가 있었을 뿐인 것이 아니던가.

하얀 구름 아래에 청설모가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내가 있는 석굴암 빈 공간의 한 모퉁이에선 산까치가 푸드득거리며 날개짓을 한다.
이렇게 변하는 공간만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은 깊이 잠든 자아를 일깨우기에 나의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 가득히 차있는 공기들이 파동을 이루고,
바람이 남기고 간 잔잔한 입자들이 태양의 알갱이와 함께 어우러져,
몸 속으로 깊이 들이닥치는 상쾌한 느낌 속에서 나는 즐거워 한다.

어깨를 스치는 바람과 푸드득거리는 산까치의 날개짓에서 나의 자아가 깨어나고,
바람이 던지고 간 화두 속에서 깨닳음을 얻은 것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엔 분명 눈에 보이진 않지만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어느 틈에 매미의 애절한 사연을 담은 구슬픈 노랫가락이 적막을 깨트리며 온 산을 가득 메운다.
무성한 낙엽으로 둘러싸인 큰 나무와 갈라진 바위의 틈새에서도
날개를 부딪히는 이름모를 풀벌레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순환하는 계절의 틈새엔 의도하지는 않으나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참선의 공간이 있는 것 같다.
계절과 계절의 틈새에 자리한 그 참선의 공간은 자아 발견을 위한 나만의 공간에도
'깨닳음'이란 단어로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힘들고 삭막한 일상 생활 속에서 아주 잠시나마 스쳐 지나가는 머뭇거림이라 하여도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형용사가 무어라 표현키 힘든 감탄사로 승화되어 나올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자아가 나를 인도하게 될 것이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고독한 존재로 돌아가 참선이 가져다 주는 풍부한 감성의 맛과
나를 일깨우는 멋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석굴암 안으로 잔잔히 쏟아지는 햇볕의 알갱이를 주워 담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다.

한낮의 햇살이 토해내는 후끈한 열기 속에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왈칵 짜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봄이 있으면 겨울이 돌아오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이렇게 비를 피할 수도 있고 마음 편히 앉아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질 않겠는가.

등 따시고 배부르니 누울 자리 밖에 안보인다는 인간의 이기적인 속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진다.

참선은 그날 그날의 컨디션과 마음의 상태를 콘트롤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이기도 하다.

무언가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나 풀리지 않는 생각의 매듭이 있을 땐 참선을 통하여 풀어내기도 한다.
참선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의 마음 상태는 여러가지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때로는 참선이 내마음의 어떤 매듭을 진단하고 풀어주는 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맺힌 것은 풀어야 하고 어떠한 형태로라도 표현을 해야한다.
참선을 통해 내가 표현한 마음의 상태는 무의식 중에 일차적인 치유의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로 인해 엉겨있던 마음도 반복되는 참선을 통해 풀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참선을 통하여 내 의식을 환기하는 감성은 마치 죽은 나무에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미감을 지닌 것이어서,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안식의 기억을 자극하곤 한다.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나를 깨우고 더듬어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를 발견하고 깨닳음을 얻게 된다.

지금 내 손 안엔 방금 주워 담은 햇볕의 잔잔한 알갱이가 있다.
이 알갱이들이 공기와 접촉하거나 먼지와 만나서 흩어지고 사라져 버리고 나면
새로운 햇볕의 알갱이들이 또다른 인연을 통해 내 손 안으로 내려 앉을 것이다.

그 인연이 다해지면 고요히 내려앉던 햇볕의 알갱이들도 사라질테지만,
석굴암 안으로 가득히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살은 수 많은 알갱이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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