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랜티코.

 몇 년 전 내가 경주 지방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시무할 때 일이었다. 약방의 감초 같은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며, 말도 시원시원하고, 익살스러움에서도 둘째가라면 서운 해 하실 분이셨다.

 그의 유머(Humor)에는 웃지 않고 배기질 못하기 때문에 어딜 가나 아기들과도 잘 어울리고 또 잘 놀아주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소형차인 “티코”를 타고 다니셨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검소한 분이신가를 알고도 남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직장에서도 상당한 직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인 집사님도 피아노 교습을 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을 때 일이었다. 식사를 차리기까지도 참지 못하고 다섯 살짜리 아이와 어울려 장난을 치면서 놀았다. 그 아이를 붙잡고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뭔지 알아?” 하고 물었다. 그 아이는 “티코”라고 답했다. 그 집사님이 눈을 부라리고 큰 주먹을 들어 보이면서 “다시 한 번 말해봐”하고 물었더니, 그 아이도 분위기를 읽고, “그랜저”라고 답하며 배시시 웃었다.

 얼마 후 저만치 도망을 간 아이가 “집사님 차는 티콘데 티코”하고 놀려대자, 그 집사님이 아이를 붙잡고 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집사님 차가 무엇인지 다시 말해봐”하고 말이다.

 그 아이의 입에서 걸작 품이 튀어나왔다. “집사님 차는 그랜티코”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랜티코”라고 하는 것으로 낙찰을 보았다. 서로가 반만의 승리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그러니 좌중은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랜티코? 그렇다. 세상에는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상황을 고려한 나머지 “그랜저도 아니고, 티코도 아닌 그랜티코” 와 같은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오늘의 사회는 “그랜티코”라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만족해하는 사람이 많은 어정쩡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랜티코”는 이 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운 얄팍한 처세술의 일면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라고 할 자리에서 예라고 할 줄 알고, 아니요 라고 할 자리에서 아니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높은 사람,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온 어른들의 모습이, 이 어린 아이에게 투사되어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자녀에게 이런 “그랜티코”의 지혜를 요구해 왔고, 또 몸으로 가르쳐 왔다. 그리고 그러한 아이들을 영특하다고 부추겼다. 자기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눈치작전을 펴면서 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대학 입시철이 되었지만, 대학입시만 해도 그렇다. 학교나 학과 하나 소신껏 지원하지 못하고, 온 가족이 동원되고, 무전기까지 동원되어 무슨 군대의 작전을 방불케 하는 쇼를 벌이며, 상황을 살피다가, 마감 시간 직전에 생명을 건 필사의 질주를 하는 경우를 보지 않는가?

이 세상에 이러한 “그랜티코”들이 많을수록 정의사회구현은 요원할 것이고 아리송한 세상이 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랜티코” 와 같은 기회주의적 언어와 처신이, 정치계는 물론, 종교계, 그리고 사회나 가정의 장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 걱정스러워진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