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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ple01_next.gif이인철 수필 소설 문학서재

ㆍ작성자 이인철
ㆍ작성일 2014-01-15 13:07
ㆍIP: 124.xxx.149
슈킹 (113회)

  2개의 통장으로 각각 5억의 금액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로써 4개

잔고업체의 돈이 그것도 무려 4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거액이 입금 완료된

것이다.

 현우가 벽시계를 의식적으로 바라본 시간은 10시 40분이었다.

 먼저 동인이 보안카드를 복사한 용지를 옆에 놓고 한양금융의 이체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발급 받은 공인인증서의 암호를 넣고 몇 번의 클릭으로

J은행으로 입금된 10억에서 5억이 작업통장으로 이체되었다. J은행은 1일

최대 이체금액이 5억이므로 오늘 한번 이체를 안 하면 내일 5억밖에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나머지 업체의 이체는 12시가 넘어서 천천히 해도 여유가

있었다. 고려금융에서 입금된 각각 5억의 통장에서 2번의 이체작업으로

5억씩이 다시 작업통장으로 이동되었다.

 인터넷 뱅킹으로 타행이체를 하면 이체금액에 상관없이 5백 원의 이체

수수료가 붙는다. 이 돈은 어느 대출손님의 명의로 몇 만원이 입금된 통장을

미리 만들었기에 여기서 수수료를 나가게끔 해놓았다. 이체 횟수가 워낙

많으므로 이 수수료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거액의 자투리 돈이

남아 인출할 때 일이 번거롭고 복잡해진다.

 대양의 이체도 무난하게 작업통장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서울금융을 제외한

3개 잔고업체의 초벌구이 이체작업은 끝났다.

 아마 내일 오전에 이 3곳의 명동 사채사무실은 비상이 걸리고 난리법석이 날

것이다. 30억이란 거금이 비슷한 시간대에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렸으니 어찌

기절초풍하지 않겠는가!

 이제 마지막 한양의 이체작업은 은행영업시간이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금부터 동인이만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미 그의 노트북 옆에는

이체하는 경로가 적힌 A4용지가 무려 5장이나 준비 되어 있었다.

 한양금융에서 빼낸 10억은 벌써 10여 번의 이체작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B은행의 작업통장으로 보관되었다. B은행은 유일하게 1일 이체금액이 개인이라도

10억 이상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각기 다른 4개 은행의 통장으로

5억씩이 입금된 4개의 작업통장이 만들어졌다. 여기까지 작업이 끝나자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이체를 시작한 때부터 2시간이 훨씬

지났다.

 은행마다 이체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자정 30분 전부터

오전 1시 30분까지 약 2시간 정도는 시스템점검을 하므로 이체 등의 대부분

업무가 마비된다. 동인도 그 시간 이후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상보다

시간이 걸린 것은 그가 연습할 때와는 달리 작은 실수라도 조심하려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형들, 다음 작업을 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씩 눈을 붙이도록 해요.

오전부터 엄청 바쁠 테니까요.“

 이체 작업을 모두 마친 그가 피곤한 듯 기지개를 폈다.

 현우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것이 꼬박

밤을 새우는 것보다 오늘을 위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그는 잠을 자 두려고 했지만 한참이 지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긴장되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벌써 동수는 소파에서 비슴듬히 쓰러져 잠에 빠져 들었다.

 “나 옥상에서 머리 좀 식히고 올게.”

그는 창밖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인을 향애 말을 던지고는 나왔다.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적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니 왠지 낯설어 보였고 꽤나 지친 표정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오늘을 고비로 180도 달라져 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을 다독거렸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느새 그는 꽁초를 버리고 새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빨고는 허공에다 내뱉었다. 까만 도화지에 흰색 물감이 퍼지듯 연기가

선명하게 춤을 추었다.

 무심코 허름한 창고가 눈에 띄었다. 창고의 문을 살짝 당기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너를 보는 것도, 출입하는 것도 마지막이야.’

 아직 어둠이 걷히려면 한참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겨울이라 밤 시간이 유난히

긴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자신에게 명령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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