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부업 삼아 서양 벌(양봉) 몇 통을 치고 있었다.
소사라 불리던 나이 든 분이 학교의 모든 잡일을 하고 있었는데 벌을 돌보는 일도 이분의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시골 경험이 없는 소운은 그물망을 쓰고 연기를 내뿜으며 벌통을 돌보는 것이 신기해
지나던 길에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구경을 하고 있으려니 그물망을 벗은 소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벌들은 사람 못지않게 윤기가 있어요" 무슨 소리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아, "윤기가 뭐예요?" 물었더니 대뜸,
"아니 선생님이 윤기도 몰라요" 선생보다 벌에 대해 더 알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던지 말투가 아주 당당했다.
벌들의 집단생활은 나름대로 윤리(倫理)가 있다는 뜻인 듯한데 쉽게 알아들을 표현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추석 무렵이면 동네 어귀에 걸려있는 플래카드에 -척사대회-라고 쓰여있는 것이 무슨 대회인지 궁금했고,
동서울 터미널 인근 건물 벽에 걸려 있던 두채 협회라는 간판을 보고 무슨 협회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척사대회는 윷놀이 대회이고, 두채 협회는 콩나물 협회란다.
구두닦이는 미화원이고, 때밀이는 세신사라고 하니 나만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다.
옛날 국민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높임말과 낮춤 말이 떠올라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높임말은 한문이고 낮춤말은 우리 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고 교육이 잘못됐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글은 글자에 의미가 없는 소리글이다. 소리글은 각 낱말에 대해 어떻게 쓰기로 약속된 글이다.
뜻글은 글자를 조합하면 미리 약속된 것이 아니더라도 글자를 보고 의미가 통하게 되어있지만,
소리글은 사용하는 사람이 서로 아는 소리글을 옮겨야지, 뜻글을 그대로 옮기면 의미전달이 어렵다.
豆菜협회나 洗身사는 약속되지 않은 뜻글을 소리로 옮긴 것이니 한문으로 적든지 주석을 달든지
그렇지 않으면 약속된 소리글 콩나물, 이나 때밀이 라고 써야 뜻이 통하는 표현이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 때 이미 알고 있는 소리글의 조합으로 만든 멋진 글도 많이 있다.
담뱃재를 떠는 -재떨이-, 벽을 더럽히지 않게 맨 밑부분을 일컫는 말 -걸레받이- 펌프로 물을
퍼 올릴 때 미리 붙는 물을 -마중물-이라 하거나 도로의 가장자리 길을 -갓길- 이라 하는 것은
설명을 한 번만 들으면 아! 하고 이해가 가는 훌륭한 소리글 낱말 들이다.
(갓길을 노견(路肩)이라 했다가 일본식 한자라 하니 길 어깨라는 어색한 명칭을 거쳐 갓길이 탄생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쉼 없이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지만, 우리 언어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자동차를 타고 가다 오던 길로 돌아와야 할 경우를 우리는 -유턴-이라고 한다.
이를 -되돌이- 라고 했다면, 유턴이라는 말을 대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인 단어가 늘어
어느 시기가 되면 우리글은 거의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문학인을 위시한 지식층에서 선도해야 할 사안이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문학인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도 뜻글을 소리로 옮긴 어색한 단어들을 나부터 습관적으로 쓴다.
흔히 좋은 글이나 귀한 글이란 뜻에서 쓰는 -옥고- 라는 단어도 그렇고, 글쓴이나 말하는 이를 뜻하는
-화자- 라는 말도 약속된 소리글이 아니다. 玉稿로 쓰거나, 話者로 쓰면 모를까 소리글로 옮기기에는
약속된 의미가 미약한 낱말들이라 할 수 있다. 좋은 글이나 글쓴이, 또는 읽는 이라고 표현하는 게 한결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향필이라는 말도 더 좋은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다.
(향필을 폰으로 검색해 보았는데 검색 결과가 없었다. 筆이란 말은 알겠는데 향이란 한자어가 아리송하다)
-자지는 조지고 보지는 만지라(自知는 早知고 補知는 晩知라)-
스스로 깨우침이 일찍 깨우침이요, 도움을 받아 깨우침은 늦은 깨우침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본 글인데, 약속되지 않은 뜻글을 소리로 옮기면 이런 웃지 못할 낭패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나 더 예를 들겠다. 오래전에 어느 책에서 본 글로 생각이 가물대긴 하지만 대충 이런 글이다.
어느 상놈이 돈을 벌어 평생의 원이던 양반을 자신이 되긴 그렇고 양반 사위를 얻어 혼례를 치렀는데,
공교롭게 잔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나타나 장인을 물고 달아나는 참사가 생겼다.
사람들을 모아 얼른 장인을 구하러 가야 하는데 사위가 아무리 외쳐대도 아무도 모이지 않았다.
"유총자는 지총하고 유창자는 지창하고 무총 무창자는 지봉하고 속속래 하라!"
(有銃者는 持銃하고 有槍者는 持槍하고 無銃 無槍者는 持棒하고 速速來)
총 가진 이는 총을 창 가진 이는 창을 총도 창도 없는 이는 몽둥이를 가지고 속히 모이시오,
"저 친구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이 친구 하도 한심해 고을 원이 볼기를 치니, 아둔(我臀 내 엉덩이) 아둔! 했다지,
우리글은 소리글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아둔, 아둔, 식의 표현은 피해야 한다.
소리글은 약속된 글이다. 한문에서 온 글도 이미 뜻이 널리 공유되어 알려진 글은 소리글로
봐도 무방하지만 우리끼리라 해도 일반인이 봐서 뜻이 통하지 않을 단어는 피하는 게 좋겠고
더 나아가서 좋은 우리 말로의 표현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좋은 우리글을 잘 살려 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기에 횡설수설 방담을 늘어놓아 보았다.
*우선 나부터 좋은 표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에서 쓴 글로 누구를 비판하는 글이 아닙니다.
정찬열
2018-02-28 16:18
소운작가님 안녕하세요 저역시도 한팔로 겪는 어려움 핑게로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放談에 글 "우리 글은 소리글이다" 평소에 詩 평론집을 보면 話者 라는 표헌을 자주 읽어
당연한 걸로 알아왔는데 그렇군요. 또한 玉稿 역시 무심코 써왔는데 새롭게 알고 갑니다.
쉬우면서도 이해할수 없는 한글도 많아지난 20일경 "D일보" 문화면 에""정수화" 한글 자음
사전 이 소개되어 참 좋은 책일것같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한글(종도)테스트.
2. 한글(정글)자음과 모음.
3. 한글(정글)사전 .4. ~6
넘 좋은 사전일것 같아 구입해 놓고 보니 "정글"이란 정수화한글" 을 줄임 말로 우리말 형성에
깊이 관여 한 문자 체계가 존재 한다는 사실에 ... 그러나 너무나 실망이 커서 몇번 그냥
버릴까하다 얼마되지 않은 도이지만 반품을 했습니다.
한자의 뜻 글과 우리글의 소리글의 낱말의 의미 에 많은 것을 배워 갑니다.
우수가 지나니 이곳 광주에는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립니다.
항상 健安 하시고 幸運 이 충만 하시길 기원 합니다. 감사 합니다.
박목철
열심히 하시는 모습을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언어면에서는 오히려 북한이 잘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같이 새로운 낱말을 계속 제정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말을 찾기 어려운 날이 올듯 합니다. 저도 옛 한문투의 단어를 습관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작가님 늘 평안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3/4 12:52
백낙은
2018-02-28 18:50
소운 작가님.
한참을 웃었습니다.
-자지는 조지고 보지는 만지라(自知는 早知고 補知는 晩知라)-
(有銃者는 持銃하고 有槍者는 持槍하고 無銃 無槍者는 持棒하고 速速來)
이 모두 자기의 유식을 자랑하고파 애쓴 흔적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말을 직역하다보니 무리한 용어가 많은 듯합니다.
예를 든다면 노견(路肩)이라고 하다가 길어깨라고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갓길" 이 얼마나 좋습니까?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유익한 말씀 고맙습니다. 춘삼월에 복 많이 받으소서.
박목철
문인 서재에 댓글을 달다가 문득 이런 단어를 일반인이 알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옥고 하면 대게의 경우 감옥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고, 향필은 향이 香인지 다른 뜻이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쉬운 우리말을 두고 화자니 옥고니 하기 보다는 읽는 이나 고운 글, 이라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는 앞으로 그렇게 쓸려고 합니다. 저만 몰라서 그런 것이니 남을 비하하는 글이 아닙니다. 위원장님 따뜻한 봄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3/4 13:07
김경렬
2018-03-01 08:52
무심코 들렸다가 작가님 서재에서
한바탕 폭소, 눈물이 찔끔!
깊은 의미의 글임에도 재미있는 문장으로
즐거움을 안겨 주시는 묘기의 글입니다.
박목철
김삿갓의 시를 보면 웃기는 것들이 많더군요, 정말 그분이 쓰신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한문투의 단어를 많이 쓰는것을 반성하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화 된 단어가 아니면, 한문투의 낱말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문인들이 오히려 한세기는 뒤진듯 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한세기 전 낱말을 많이 쓰지만, 애들은 놀랄만큼 산뜻한 낱말을 많이 쓰기도 한답니다. 작가님, 좋은 휴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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