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실의 계절.

  그녀의 아버지도 일본에서 나왔다는 소문은 있는데 확실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빈손으로 나온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수리조합 앞에서 식당을 경영했던 가게 말고는 아무런 재산도 갖은것 없이 식당영업만으로 살아 왔는데  새 식당들이 여기저기 생겨나고 수입은 떨어지는 반면에 그녀의 남동생은 교육대학에 진학하여 교육비는 증가하고 따라서 빚도 자꾸만 늘어나고 결국은 파산의 지경에 이루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식당 손님이 줄어들어 영업이 거의 안 될 무렵인 그 해 여름 날 그녀의 집 앞에 있는 수리조합의 이사 방 사혁이 그녀의 집에 하숙을 정하였다. 방 이사는 상처하고 이곳 수리조합에 부임 해 왔으며 여자관계가 난잡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과년한 처녀를 집에 두고 있는 부모가 상처하고 행실 나쁜 홀아비를 하숙손님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기야 그녀 아버지는  절체절명의 처지에 놓였는데 무슨 일인들 못할까마는 누적된 채무 때문에 미녀인 딸을 팔려는 생각을 설마 가상인들 했겠는가?

  하숙손님이 된 방 이사는 천연스럽게 그녀 아버지와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세타령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돈 있음 돈 좀 돌려 달라-는 말이 나오기 마련인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리저리 하다가 대차관계가 성립되고 그녀 아버지는 순식간에 방 이사를 대주로 모시게 되고 큰 은인이나 된 듯 굽실거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파산지경의 자기 집을 구제해준 은인인데 매사에 감사의 뜻을 담은 친절과 미소를 고의로 절제할 수야 없었을 것이고 또 그러기는 누구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면 물심부름도 하게 될 것이고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하면 손목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간악한 방 이사는 젊잖게 참지 못하고 급격한 기망수단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즉 온 식구가 다 모인 저녁시간에 회충약이라고 속여서 강력수면제를 모두에게 먹이고 얼마 후 모두가 잠 든 후에 그녀의 방에 침입하여 어렵잖게 겁탈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러고도 버젓이 불륜의 장면을 지키면서 그녀의 부모들이 현장을 확인 하도록 유도까지 하는 대범한 수법을 썼다.  새벽에 그녀가 기겁을 하여 부모님을 깨고 야단법석이 된 그 현장에서 방 이사란 놈이 한말은 이미 짜진 시나리오에 의한 일장의 연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은인인 대주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고발을 해서 시끄럽게 한데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세상에 망신살은 허 씨 집안이요 웃음꺼리는 허 씨네 딸 아닌가?

  그녀의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삿대질 할 것 같은 자세로 방 이사를 노려보고 있고 그녀는 한쪽 구석에서 머리를 두 무릎에 푹 숙인 채 동그마한 등만 뒤로 보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세상에 과음하여 실수하는 일도 많이 보아왔지만 이런 경우가 어데 있당가?”

  “아이고, 제가 그만 죽으려고 환장한 모양입니다.”

  “잔소리 들을 것 없고 수리조합 웃 기관에 예기해서 모가지 잘라 버리고 경찰서에 얘기해서 징역 살려버려야 내가 분이 풀리제 이대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먼요.”

 “말로야 별말을 못 하는가? 그래 봤자 우리한테 돌아오는 게 뭐랑 말인가? 숫처녀를 망처 놓았응게 인재 좋은 대로 시집가기는 틀려 버렸응게 보상을 해 줄 일이고 그 무엇이냐 위자료를 주어야 하것다 이 말씀이야.”

  그녀 아버지가 친권자다운 결론을 도출하도록 유도한다.

  “잘 알겠습니다. 처녀성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상을 금전으로 어떻게 환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용서를 구하는 뜻으로 벼 300섬을 드리도록 하면 어떨는지요? “

  그녀의 아버지는 한참을 뜸을 드리고 침묵 하더니,

  “벼 300섬을 가지고 내 딸의 처녀 몸을 살 수야 있겠는가? 마는 앞으로 살아갈 험한 세상을 생각하면 그만치도 없어서야 어찌 살것소? 그럼 기한은 언제까지로 하것소?”

  “예, 두 달만 여유를 주십시오.”

  이런 연고로 하여 방 이사는 그날부터 하숙을 옮기고 두 달 안으로 채무를 이행하도록 되었으니 대차주가 완전히 바뀌고 만 셈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눈치 빠르고 남 말 잘하는 사람들이 어디나 있는 법이다. 방 이사가 갑자기 하숙을 옮기자 허 씨하고 사이가 소원해진 것 같고 그의 딸도 문밖출입이 뜸해지고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무엇인가 있다고 추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뜬소문 사흘이라는 속담처럼 사흘쯤 지나서 없어졌으면 좋으련만 새로운 폭탄이 터진 것이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인데 달 걸이가 안 나타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건은 새로 심의되기 마련이다. 아기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낳은 아기는 누가 키울 것인가. 깊은 밤에 남 몰래 방 이사를 집에 부른 허 씨는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후, 방 이사의 의견을 물었다.

  “아기를 낳아 주시면 제가 감사히 받아 키우겠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짐승 같은 자가, 나이 오십 다 된 홀 애비가 스물다섯 새파란 처녀를 재취하여 재미 보겠다는 심보인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 마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라! 쳇, 기가 막혀, 짐승 같은 새끼는 죽어도 낳게 안할 것이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참았던 울분을 다 털어버릴 심산인지 그 조용한 성품에서 도저히 들어 볼 수 없는 악담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면 댁에서 원하시는 대로 임신 중절을 시키시겠다면 멀리 남이 잘 모르는 곳에 가서 수술을 하고 수술 후 며칠간 충분히 조리도 잘 해서 보내도록 책임을 다 지겠습니다.”

  이렇게 되어 위자료로 볏섬을 오십 섬 더 내기로 하고, 대전으로 가서 수술하되 방 이사의 부담으로 하기로 약조하고 떠 날 날을 약속하고 해어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방 이사로부터 받은 위자료의 일부로 채무를 모두 갚고 식당집도 매도하고 이사를 떠날 준비를 착착 하기 시작했다. 가엾은 그녀는 남이 알까 보아 방 이사와는 따로따로 대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집을 나섰으니 이것이 그녀와 내가 첫사랑의 맹세도 허무하게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되는 비탄의 순간인 것이다.

  금호강변의 조약돌들이 식어가기 시작하고 강 수면의 햇볕이 만양 약하게 반사되기 시작할 무렵인 9월의 초순경에는 육군정보학교 연구실의 번역병인 내 형편도 훨씬 좋아지고 있었다. 연락병인 한 상병이 전보되고 신병이 들어 온 것이다. 상급 병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번역 실적도 오르고 실장님도 매일 웃고 지내시니 연구실 분위기는 학교 내에서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지낸지 두 달 만에 그녀로부터 마른하늘에 벼락 떨어지는 듯한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촛불 곁에서 썼는지 촛농이 묻어있는 편지지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오빠에게, 이 시간 이후 이렇게 부를 수도 없게 된 저의 비참한 운명을 한없이 원망하면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올립니다. 말씀 드릴 수 없는 부끄러운 일로 인하여 저의 부모님께서도 땅 끝을 떠나시고 저도 멀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갑니다. 이제 저는 오빠의 사랑을 받고 오빠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순결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에게 맹세코 할 수 있는 말은 저는 오빠 한 사람만 사랑했고 영원히 오빠만을 사랑한 체 오빠와의 짧았던 휴가 오셨을 때의 사랑을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오빠! 꼭 성공하세요!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훌륭한 여성과 결혼하시고 행복하게 잘 사시기를 빌고 빕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첫 키쓰를 했던 때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한 동안을 말없이 나를 응시한  체 서있었고 나는 아무리 그녀에게 다가 가려 해도 갈수가 없었다.

  다음 날 연구실장에게 정식휴가를 청했다. 정식휴가를 갈 때가 되어있었고 연구실에는 식구가 단 4명뿐인지라 경합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없었다.

  고향에 가서보니 그녀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와서 현관과 마루를 개량하여 새 상호로 식당을 개업하고 있었고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리조합의 방 이사는 사표를 쓰고 퇴직금을 받아 그녀의 고질병을 치료 해주려고 대전에 있는 어느 병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소문으로 미루어 보면 마치 그녀가 방 이사의 재취가 되어 병 치료를 위해 떠난 것처럼 들렸다.   .

  이때의 나의 허탈감은 말할 수가 없었다. 후회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결혼을 빨리 하기를 원했고 나와 결혼을 못 할까봐 안절부절 하던 심정을 이해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미 엎드러진 물이 되어 버렸으니 이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 탓이요, 내 탓이로다.

  휴가를 다녀 온지 5개월쯤 후 제대를 했을 때는 그녀와의 비련의 상처도 눈 내리는 겨울의 삭풍과 함께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 겨울이 끝자락을 감추려 할 무렵 나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얼마쯤 창피스럽게 여기면서 군청에서 실시하는 지방공무원 임용시험에 응시했고 그 시험 후 곧 실시된 농업금융기관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 당시 내각 사무처에서 병역을 필한 즉시 임용하겠다고 약속한 공문서가 있음을 아버지께 환기 시켜 들였다면 그리고 그렇게 추진했다면 내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몰랐는데 어떤 사유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만 농업금융기관에 입사하고 말았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보아야 옳다.

   다음 첫 사랑이여 안녕! 으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