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

                                    송 담   김  일  선

  1.첫 키쓰, 그리고 청혼.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첫 여름 이었던가? 논에 물이 없었으니까 보리를 베어 낸 즉후 였던가 본다.

해남 땅끝 고향 마을 입구에는 우람하고 수려한 느티나무 한 구루가 서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의 수호신답게 150여년의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마을과  희 노 애 락을 함께 해온 당산나무라 할 수 있다.

  우리 집에서 가장 좋다는 논은 모두 그 부근에 모여 있기 때문에 이 논들을 연결하고 있는 농로는 나의 좋은 산책로이기도 했다.

  그 날도 나는 무료함을 달래느라 논둑을 거닐다 무심코 앞을 보니  느티나무 옆 초가집 마당에 서서 그녀가 조용히 나를 응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M항의 여객선 부두에서 이었다.

  나는 M고등학교에 진학 하여 1학년 농번기 방학으로 시골에 내려가기 위하여 M시~여서군길 여객선 갑판 위에 올라 서있었다. 그녀는 내 고향 집 아래 집에 사는 박양과 함께 이 배의 승강장 앞에 나란히 서서 박양의 아버지를 전송하고 있었다. 내가 짐작 한 바로는 그녀들은 M여중에 함께 진학하여 하숙도 같은 집에 함께 정한 것 같았다.

  그녀는 여중에 갓 입학하여 1학년인 탓에 교복은 하복부터 입기로 작정한 듯 일상 입던 그대로인 노랑 저고리와 분홍치마를 입고 있는 아리따운 소녀였다. 금세 고향집의 부모님이 그리운 듯 친구 아버지를 전송 하는 자리에서 저고리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고 서있는 가냘프고 귀여운 자태는 몹시 가엾게 보였다. 그녀가 땅 끝 근동에서 가장

예쁜 소녀라는 소문은 일찍 듣고 있었지마는 눈으로 직접 확인 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후 M고를 졸업하기까지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 후로 두 남동생들이 연년생으로 중학교에 진학 해 와서 경제적인 어려움과 동생들을 간수해야 하는 빡빡한 시간 때문에 고교시절은 너무도 여유 없는 말하자면 집에서 학교로 오고 가는 시계 추 같은 생활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누구와 노다니며 고향 여학생들의 소식인들 들을 수 있었겠는가? 대학생활은 더 어려워진 인고의 세월 속에서 흘러갔으며 독서의 즐거움이 없었다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상이 되었으리라.

  아버지의 사업이 신통치 않은 중에 벼농사의 수확만 가지고 칠남매의 장남인 내가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옹색하고 가년스러워 낭만의 여유는 눈곱마치도 없었다.

  대학 4학년의 1학기를 마치고 보니 동료들은 졸업반으로 수강신청을 하는데 나는 함께 갈 수 가없었다. 왜냐하면 2, 3학년 1학기는 동무 따라 등록을 하고 2학기(후학 기)는 모두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고로 동무들이 졸업반에서 수강신청을 하고 있을 때 나는 2학년 후학기분을 수강신청을 해야 했고 동료들이 졸업한 후에야 3학년 후학 기를 등록 하고 ,그 해 후학 기에 비로소 졸업반이 되는 순서였던 것이다,

  이렇게 낙오자의 외로운 신세가 되어 후배들과 별 친교 없이 수강 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돈을 벌면서 학점을 따자는 아르바이트 생각이 나기 시작 했고 궁하면 통한다든가? 그때 고향 중학교에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다. 즉시 전라남도 학무국에서 시행하는 중등영어 강사 임용시험에 원서를 냈고 합격하여 땅 끝 중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그녀는 한 참을 움직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서 있었고 나는 그녀의 눈빛에 끌려 역시 한 참을 움직이지 않고 서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눈이 나를 부르고 있었고 나의 영혼이 그 부름을 받아  두 다락치의 논을 가로 질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담장이 없는 초가 집 마당에 거의 왔을 때 그때 까지 나의 시선을 받아들이던 그녀가 조용히 몸을 돌려  행랑채 뒤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저돌적이고 육감적인 생각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아가가 응가를 한다고 해서요……."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띠면서 안고 있던 동생을 내려놓고 뒤를 보이고 있었다. 한동안의 겸연쩍은 분위기가 가신 후 나는 그녀를 따라 안채로 나왔고 마루에 앉은 그녀의 옆에 다가 앉았다. 이렇게 그녀와 단 둘이 가까이 앉아 보기는 내 생전에 처음이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녀를 M항 부두에서 처음 본 후로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내가 두 번째로 그녀를 보게 된 것이 위의 휴학 기에 고향에 머물고 있었던 그 해 늦은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집은 장석거리(장삿거리의 옛말인 듯)의 수리조합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키가 작고 상냥하면서 항상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하는 자태가 꼭 일본사람 닮아서 사람들은 일본 여자라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키가 장대 같이 크고 꾸부정하게 걷는 작태를 보고 누군가가 ‘비 맞은 장 닭’이라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요리를 하는 바쁜 일상에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어야 했다.

그날도 나는 고향 친구들과 그 집 앞을 지나다 그녀를 해후 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옛날에 보았던 귀엽고 예쁘장한 꽃 봉우리 소녀가 아니었으며 이미 활짝 핀 어엿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예쁘다하기 보다는 아름답고 요염하기 까지 하였다. 요염하다고 해서 표현이 맞을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웃을 때 두 눈이 감기는 듯한 양미간과 코와 입술 언저리가 너무도 고혹적인 아름다움이여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성숙한 미모의 규수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한 눈에 반해 버렸고, 즉시 그녀 주변의 사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 이웃에는 J 대 독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내 친구의 동생이 있었다. 그는 대장간 집 딸의 방에 침입하여 강간인지 화간인지 알손 달송하게 재미를 보다가 들통이 나서 근신 중에 있었으므로 더는 연쇄적으로 사건을 전개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 밖에 염문은 없었다.

특히 그녀 아버지는 엄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바쁜 일상에 그녀가 어린동생들을 돌보지 않으면  식당을 경영 할 수 없으므로 그녀의 어머니가 노상 그녀 곁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녀는 틀림없이 정숙하다고들 했다.

햇볕이 완연히 엷어지고 지열이 식어가기 시작한 그 여름의 끝에 나는 고향친구들과 그녀 집을 찾아 갔다.마침 그녀의 아버지는 출타 중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부엌에 계셨던가? 그녀는 거실 방에 있었다. 나는 무작정 그녀에게 펜과 종이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의아해 했으며 그녀는 마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 신속하고 사분사분하게 내 앞에 펜과 편지지를 내 놓았다. 그리고 한발 물러나 다음 지시를 대령 하는 듯 얌전히 앉아 있다.

나는 “바다여 모래여 태양이여!”라 시제를 짓고 거침없이 시를 써 내러 가기 시작 했다. 바다는 나요 모래는 그녀이고 태양은 그녀와 나를 묶어 주는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정열이라고 상징 하였다.이 시는 이번 여름에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그녀를 연모하면서 착상 했던 시였으므로 막힘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바다와 모래는 하루도 걸러뛰는 일이 없이 정해진 시간에 핥이고 쓰다듬고 속삭이면서 영겁으로 향하는 두 연인이라고 읊었던 것 같다.

“다 썼으면 주어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친구가 짐짓 눈치를 챘다는 듯이 내가 끝맺음 하는 것을 보고 채근 된다.

“응, 이것 읽어 보아!”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즉흥시가 읊어진 종이를 내밀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너무도 정숙한 표정으로 고분고분 받아 옆방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열렬히 사모하고 있다는 나의 첫 고백이 된 것이다. 그 때 그녀의 심정이나 느낌은 어떠했을까? 여자의 신비한 제육감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녀에게 고백시를 바친 후 나는 밤 낮 없이 그녀의 얼굴만 떠올랐다 답답해 서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집 뒤 감나무 밭에 올라가 그녀의 집을 저 아래 바라보면서 목청껏 세레나데를 부르곤 했다. 정말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 해 낸 것이 그녀에게 책을 갖다 주는 것이었다.<앤드래 지드>의 <좁은 문>이 그 첫 번째 책이었다. 책을 빌려 주러 가서 한번 만나고 책을 찾으러 가서 다시 만나고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녀 어머니는 상냥하고 선선히 그녀를 불러 주었다.

그러나 중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면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졌다.

중학교 기성회 간부들이 교직원들을 초빙하여 회식을 하게 될 때 그녀 집으로 찾아 가게 되었으므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젓하게 그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전히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고 어쩌다 심부름을 갈 때는 그 동생을 등에 업고 가곤 했다

그녀 집에서 회식이 있을 때에는 나는 항상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를 원하였고 그녀가 거처하는 방에 신경이 써지는 것이었다. 운 좋게 그녀와 눈이 맞을 때에는 그녀는 예의 두 눈이 감기는 듯한 매혹적인 모습으로 살며시 미소 짓곤 하였다. 그럴 때의 나의 행복감은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으랴

 가까이 바로 옆에서 보니 그녀의 짧은 치마 밑으로 보이는 맨 살의 두 다리는 너무나 매끄럽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순결했다. 그녀의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그녀를 더욱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께서 출타를 가시면서 저더러 집을 보아 달라 하셔서-----“

 그녀는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안했다. 나는 두 뺨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온 몸이 화끈거렸다. 두 다리는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어데서 생겨 난 것일까?  나의 영혼의 힘이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나의 왼 손이 그녀의 등 뒤로 돌아 그녀의 얼굴을 끌어 당겨 그녀 의 입술을 훔쳤다.

 합의도 예고도 없는 기습적인 것이었으나 그녀는 너무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나는 벌떡 일어서고 달아나듯 물러서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부끄러움이나 노여움이 없이 나를 일별 하고 아래를 내려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뺨에도 불꽃이 피어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터질듯 한 심장의 고동 소리를 진정 시키기 위하여 집으로 가기를 서둘렀다.

그녀와의 첫 키스는 두 영혼의 힘에 의해 이뤄진 육체적인 첫 교합 이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운명적인 것 이었고 운명적인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흘 동안 번민한 끝에 드디어 아버지께 그녀와 결혼시켜 달라고 말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긴데, 어서 해 보아."

나는 필경 아버지가 깜짝 놀라 면학에 지장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시거나 좀 더 두고 보자든가  소극적으로 나오실 줄 알았는데 전혀 반대였다.

"응, 그 허 아무개네 예쁜 여식 말이구나. 그렇다면... ,네가 좋다면 내 오늘 저녁 당장 찾아가 담판을 짓고 오마."

 아버지와 그녀 아버지는 갑계 친목계를 하는 같은 계원이고 막역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내심 나와 그녀의 객관적인 세평으로 볼 때 내 우위를 확신하기 때문에 저 쪽에서 환영 해 마지않는 혼담이라 자신하고  의기양양 하게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 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날 밤 늦게 돌아오셨고 그녀의 아버지와 약주를 많이 하셨다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그게 말이다. 참 어렵게 되었구나. 김해 김 씨와 김해 허 씨는 동본 동근이라 한 뿌리라 하지 않느냐? 김수로왕의 아들 중 장남이 왕위를 계승하고 2남과 3남이 어머니 황후의 성씨(허씨)로 사성되고 궁궐을 떠났는데 이들이 김해 허 씨의 시조가 되었다 하니 김해김씨와 김해 허 씨는 동본 동근이라 결혼할 수 없다 하니 어쩌면 좋으냐? 그래서 이 혼담은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했다.........더 시간을 갖고 달리 궁리 해보기로 하자”

나는 이날 밤 그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 보내면서 내 청혼의 의지가 바위와 같이 굳세다는 뜻을 전하였고, 법으로 규정하기는 동성동본은 금혼으로 하였지만, 일단 성이 다르면 동본이라 할지라도 금혼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얘기해 두었다. 그리고 동성동본이라 할지라도 동거생활로 들어가 있는 사실혼의 남녀에게는 혼인신고를 받아주게 되어 있다는 예외사항도 있다는 것을 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무렵 대학 4년간의 수업을 이유로 보류 되었던 입영영장이 어김없이 나왔다.

나는 입영해야 했다.

이 <청혼>은 어쩐지 뜬 구름과 함께 가는듯한 슬픔과 공허만을 나에게 몰아치고 있었다.

  다음 2.입영, 밀월휴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