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김숙자

8~9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10월이 오면 좀 한가하려나,

생각할 겨를없이 어느 순간 10월이 빠르게 앞을 지나간다.

하루가 다르게 나뭇잎의 색깔이 변하고.

도로변 가로수 밑엔 상수리, 호두, 밤(먹을 수 없음)이 떨어져 수북이 쌓이고 있다.

다람쥐, 청솔모는 온종일 나무 위를 오르락내리락 풍성한 가을걷이에 지칠 줄을 모른다.

눈이 한 자씩 쌓일 긴긴 겨울 채비에 하찮은 미물도 제 삶의 지탱을 위해 온 힘을 쏟는 것 같다.

교회 앞마당엔 크고 작은 누런 호박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끌어안을 수도 없는 커다란 호박부터 주먹만 한 크기의 호박까지 수천 개의 호박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든다할로인 날인 10월 마지막 날까지 집안의 악귀를 쫓아내는 장식용으로 이집 저집에 팔려가는 듯싶다.

부촌으로 이사를 하여, 작년에 보지 못했던 마당 가득 놓인 호박무더기를 보니,

올해는 할로인 날을 위해 각 가정의 정원들을 어떻게 꾸밀까? 기대가 크다.

이곳에선 집집이 울타리가 없는 정원에 집주인의 취향에 맞게 꾸며진 정원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다양한 야생화부터 아름드리 고목까지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진다.

거기에 하루가 다르게 단풍으로 아름다워지는 뉴저지 가을의 모습은 풍성하고 넉넉하기만 하다.

아름다운 단풍 속에서 펼쳐질 여러 가지 행사와 공연의 프로그램이 곳곳에 게시되어 있다.

어렵게 미국으로 유학 온 큰아들네 가족과 함께 날짜별로 행사에 참여하고 즐기는 여유로움,

마음 든든하고 흐뭇하다.

큰아들 가족은 우리 집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큰아들이 좋아하는 아욱국을 끓이거나 새로운 반찬을 만들면 상을 차리다 말고 싸들고 간다.

어떤 때는 이른 새벽에 냄비째 들고 가서 큰아들이 먹고 출근하도록 챙겨준다.

매일 왕복 3시간 반을 거리에서 출퇴근 시간으로 허비하고 있다.

이곳은 차가 없으면 꼼짝을 못한다.

생활용품이나 식품도 1~2주의 소모될 양을 한 번에 사나르게 된다.

쇼핑과 물건 사나르는 것도 며느리와 함께 한다.

손들 다섯 명을 아침 8시 30분까지 등교시키는 일,

오후 3시에 하교하는 손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숙제를 도와주는 일도 며느리와 함께 한다.

또 테니스장에 가서 운동교습을 받고, 공원에서 놀기도 보살피고, 이렇게 일주일을 거의 함께 보내고 있다.

몸은 아주 고되지만, 내 혈육을 품 안에 끼고 보살피는 행복감을 이 가을 속에서 만끽하고 있다.

'루스벨트' 초등학교에선 10월 5일은 Superhero Day라고 상징적인 옷을 입고 오라고 한다.

딸과 며느리는 손들의 상징적인 옷을 사느라 바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손들 다섯은 Super Man, Bat Man, Spider Man, Captain America 등 상징적인 옷을 입고 아주 즐거워한다.

이런 상징적인 옷을 입고 걸어서 5분 거리의 등교하는 다섯 손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외손 형제는 노부부가 돌보지만,

며느리는 혼자서 세 아이 뒷바라지와 뉴욕 코넬대학 병원으로 출근하는 제 남편을 위해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챙기고 있다.

더구나 9월 한 달간, 아이들 셋의 도시락과 간식까지 챙겨야 했으니

미국 오기 전엔 손에 물도 적시지 않았던 큰며느리였건만,

귀태 나던 몸매와 얼굴은 어느새 고생에 찌드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도저히 며느리 혼자서는 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내고 있다.

"어미야!, 하지도 않던 막노동에 네 비싼 노동의 값을 소모하다니."

 "어머니, 병원 일이 훨씬 편한 것 같아요,"

'내년 8월까지 이런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 학교에선 10월부터 급식을 한다.

"아가!, 도시락 싸느라 고생 많았다. 아이들이 먹든 안 먹던 무조건 급식 신청을 하여라"

며느리에게 당부한다.

주말이 되면 친손들을 우리 집으로 오게하여, 외손까지 다섯 명을 모두 내가 돌보고 있다.

손들은 고종사촌끼리 어울려 노는 것을 무척 좋아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 계획이 있어서이다.

서울에 들어가면 모두 한두 학년씩 학교수업의 결손이 생기게 된다.

제 학년의 학습도 하지 않고 진급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된다.

유학생활에서 얻는 것도 많지만, 아이들한테는 잃는 것도 너무 많다.

대책 없이 한국에 가면 미국에서 학교생활이 힘든 것 못지 않게, 

한국에서도 또 힘든 학교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토요일~ 일요일은 우리 집은 1학년, 3학년, 5학년까지의 과외교실이 된다.

외손자는 3학년 과정의 학습까지 충분히 보충되었지만, 친손들이 걱정된다.

큰아들과 며느리는 시간만 나면 4학년의 손녀, 쌍둥이 손자를 데리고 온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

 늙은 어미를 믿고 제 자식들의 학습지도를 맡기는 아들 며느리가 고맙기도 하면서

'급했구나, 너희 과외비 듬뿍 내놔'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다행스럽게 친손들은 할머니 집에 오기를 아주 좋아한다.

내 인연의 고리의 끈을 붙들고 늙은 할미의 여력을 쏟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기쁘고, 

손들과 가까이서 함께 사는 뉴저지의 생활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하다.

딸이 하는 공부가 내년 2월 말이면 마무리된다,

노부부는 딸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동안 힘들었고, 어려워서 딸과의 마찰도 많았다.

내 돈 써가면서 노예생활한다고  퍼붓기도 하였다.

굽이 높은 구두 신기를 좋아하던 지난날이 엊그제였건만,

요즘은 굽이 낮은 구두에서 아예 운동화를 신어야 발이 편하다.

빠른 세월처럼 몸과 마음의 변화도 아주 빠르게 변해버렸다. 

"늙은 할미가 미국생활 하면서 자식들 뒷바라지에 5년은 더 빨리 늙어버렸어요."

남편한테 화풀이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란 말도 있잖아,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도와줘야지."

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자식들의 유학 뒷바라지이지만, 이제는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단풍으로 아름다워지는 뉴저지에서,

자식들과 손들을 품 안에 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만족하려고 한다.

무자식이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몸은 고되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유 자식이라, 상팔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2015년 10월 10일  뉴저지에서 Kim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