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제천 청풍호 시티투어

지하철을 타고 오던 것보다는 겉옷을 가져오지 못한 후회가 엷어지도록 부전 행 무궁화호 기차 안은 그리 냉하지는 않았다. 어제 늦도록 잠실야구장에서 야구를 관전하고 일정에 없던 청풍 시티투어를 시작하는 아침이 그리 쾌적한 기분은 아니어서 간간이 눈을 붙이다 깨어보니 열차는 이미 원주를 지나고 있었다. “아빠! 엄마랑 내일 뭐 해요? 갑자기 취소하기 힘든 여행 티켓이 두 장 있는데, 내일 가실래요?”로 시작한 오늘의 여행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새벽에 선잠을 굳이 깨워 나선 여행길이다. 단지 기상 예보와 달리 비가 내리지 않는 쾌적한 나들이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단체 관광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해온 터라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15여 년 만의 제천 여행은 나의 흥미를 조금은 자극하였다. 하지만 역시 이 여행은 ‘어쩌다 여행’이 될 수밖에는 없다. 열차를 기다리며 새벽에 본 청량리역 주변은 그 옛날 부림 호텔과 맘모스 백화점은 사라지고 맘모스보다 더 큰 역사가 청량리를 지키고 있었다. 열차 시간을 기다리다 화단에 곱게 핀 분홍색 무궁화에서 대한의 은은한 숨결이 유구함을 느꼈고, 무궁화 열차를 타고 가는 오늘은 74주년 광복절 아침이다.

두 시간여를 달려 9시 30분 어림에 제천역에서 내렸는데, 이 역에는 셀 수 없이 몸 양쪽으로 다리가 주르륵 달린 회색 지네 같은 시멘트 운반용 열차가 몇 대 길게 몸을 늘여서 쉬고 있는 모습이 한결같다. 물기를 머금은 하늘을 보며 역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는 시티투어용 관광버스에 올랐다. 반쯤 찬 관광객을 태운 버스(아이러니하게도 버스도 무궁화여행사 버스다.)는 제천시 문화 해설가의 설명을 따라 핸들의 방향을 의림지로 향해서 십 여분을 달렸다. 제천역과 지척에 있는 이 의림지(義林池)는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인공저수지 중 하나로서 현재까지 수리시설을 하는 저수지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아마도 15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이곳 제천의 지인과 함께 이 저수지로 한겨울에 빙어 낚시를 온 적이 있는데, 내 기억으로는 무척 황량하고 바람이 날카로웠었다. 물론 불순한 일기 덕에 빈 바구니로 꽝꽝 얼어붙은 저수지를 떠나야만 했었다. 하지만 다시 찾은 여름의 의림지는 제방을 호위하듯 기묘하게 허리를 비튼 소나무들과 잔잔한 호수가 멋들어지게 어울려 운치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 모든 강과 호수에 사는 빙어의 조상인 의림지 공어(公魚)는 치어였을 때 수박 향 맛이 난다고 해서 ‘과어’라고도 불린단다. 해설사님의 해설은 더운 여름 날씨에도 열심이신데, 듣는 이들은 무심한 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마도 수려한 의림지의 경관에 스마트폰 카메라 촬영으로 관심이 분산된 탓이라 여겨져 내가 홀로 겸연쩍었다. 그래도 해설사의 설명이 조선 순조 때 세워졌다는 영호정(暎湖亭)의 곁에서 내 귀를 당겼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1948년경 건립되었다는 경호루(鏡湖樓)의 정(亭)과 루(樓)의 차이를 물어보셨는데, 내가 아는 건 그저 정자는 대충 단층의 구조로 건축하고 루는 2층 구조로 세워진다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외에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 남한의 3대 제일루인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남원 광한루(廣寒樓) 등은 절대 개인 소유가 될 수 없지만, 정자는 개인 소유라고 한다. 아하! 그래서 조선 시대 절대 권력자 중 한 사람인 한명회의 그 압구정(鴨鷗亭)도 루(樓)가 아니고 정(亭)이었구나. 해설가님의 해설을 고맙게 청취하고 의림지를 한 바퀴 돌아서 버스에 올랐다.

새벽에 집을 나서느라 아침도 변변히 챙겨 먹지 못해 허기진 뱃속을 달래느라 제천의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다시 시내로 들어와 재래시장 입구에 서니 아케이드 시장 입구에 붙어있는 이름이 내토 재래시장이란다. 내토? 나중에 집에서 검색해 봤더니 제천의 고구려 때 지명이 내토(柰吐)였다. 이 시장에는 빨간 어묵이 일미(一味)라고 하는데, 둘러본 시장에는 점심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마도 오늘이 광복절이라 한산한 모양이다. 이 시장은 특이하게 한쪽 끝 건너편으로 중앙시장이 있고 반대편 끄트머리에는 동문 시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외에도 제천에는 매 3일과 8일 열린다는 제천역 앞 풍물 오일장이 자리하고 있다. 어쨌든 3개 시장을 다 구경하고 약간은 허름한 할머니네 식당을 선택하여 보리밥에 소백산 막걸리 한 병을 즐겼다. 역시 보리밥은 삐까뻔쩍하게 깨끗한 식당보다 할머니의 잔주름이 정겨운 이런 집에서 먹어야 제맛이다. 할머니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보리밥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내일 먹거리로 3천 원 주고 호박잎 두 단을 사서 배낭에 갈무리하고 오늘 수고하시는 버스 기사님과 해설가님에게 드릴 시원한 아이스커피 두 잔을 사 들고 버스에 올랐다.

이제는 오늘의 주 관광코스가 되는 청풍호 유람선 관광과 케이블카 탑승을 위해 충주댐 상류인 단양 선착장으로 버스는 달리는데, 오전과는 다르게 창밖 빗줄기는 예사롭지 않다. 오후 버스에서도 내내 입을 쉬지 않으시는 해설가님이 비가 많이 오면 유람선 관광에는 문제가 없으나 케이블카는 운행을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악천후가 없기를 바라며 한 시간여를 꼬불꼬불 산길을 달려 선착장인 장회나루에 닿았다. 여기 전망대 주변에는 뒤쪽으로 월악산 제비봉과 앞쪽으로는 청풍호 건너 구담봉이 펼쳐져 있고, 단양 15대 군수였다는 퇴계 이황과 관기였던 두향의 전설을 표현한 작은 공원이 있었다. 두향의 이야기는 단양 팔경 중 유일하게 단양에 위치하지 않고 청풍(지금은 제천에 속함)에 소재하는 빼어난 절경 옥순봉에도 서려 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기생 두향이 퇴계에게 간청해 옥순봉을 단양에 편입하도록 졸랐는데, 퇴계는 청풍 부사에게 간곡히 부탁했으나 거절 당했고 결국 아쉬운 마음을 담아 옥순봉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 새기고 ‘이곳이 단양의 관문이다.’라고 정했다고 한다. 후에 청풍부사가 옥순봉의 각자를 보게 되었는데, 힘차고 살아있는 그 글씨에 탄복하여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했다는 전설뿐인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오늘 나는 단양 팔경 중에 이미 예전에 보았던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과 더불어 구순봉과 옥순봉을 감상하게 되었다.

비 내리는 청풍호 유람선에서 구순봉과 옥순봉을 바라보니 운무가 봉우리의 정수리는 살짝 가렸다. 후에 해설가님이 내게 “비가 내려서 구순봉과 옥순봉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쉽겠네요.” 했을 때 “웬걸요. 우중 절경을 맞을 확률이 훨씬 귀하니 이 또한 저의 복입니다.”하고 답했다. 청명한 날씨나 단풍이 물든 청풍호는 마음먹으면 몇 번이라도 감상할 수 있으나 우중 절경은 그리 쉽게 접할 수 없다는데 내 마음이 닿았다. 미녀의 누드보다는 실루엣이 더 아름답듯이 다시 봐도 운무가 낀 봉우리는 참으로 저기가 신선계고 내 마음이 신선의 마음이었다. ‘지난주 갑자기 소천하신 장모님이 들어가신 정령계가 저렇다면 어머님은 무척 평안하시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배는 꾸준히 미끄러져 내려가 청풍 대교를 밑으로 통과, 호숫가에 닿아 청풍나루에 제 몸을 묶는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승강장으로 올라가는데 구순봉에서 내리던 비도 악착같이 내 우산을 따라 같이 오른다. 다행히 케이블카는 정상 운행을 하였고, 또 다행히 비 오는 날씨 덕에 승강장은 관광객이 한산하여 잠시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3층 승강장에 올라가기 전에 케이블카를 타고 전경을 감상하며 마시려고 1층 편의점에서 캔맥주 하나를 사서 승강장 검표를 하는데, 케이블카는 절대로 음료나 음식을 가지고 탈 수 없다고 한다. 단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도 정상에 편의점이 있어서 맥주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대합실에서 마시고 천천히 케이블카에 올랐다. 역시 손님이 한산하여 8인승 카에 우리 부부 포함 네 명이 타고 쾌적하게 정상으로 향했다. 비 내리는 차장 밑에는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덩치 큰 삽살개처럼 넙죽 엎드려 그 비를 다 맞으며 하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울지는 케이블카 창밖을 올려 다 보니 내가 드디어 선계로 오르는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졌는데, 오르고 보니 역시 여기도 인간계였다. 커다란 커피숍에서 따스한 커피를 마시는데, 밖에는 격에 안 맞는 산중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다. 하지만 그 또한 귀해서 좋았다. 이 충주호는 8십년대 후반부터 7, 8년 동안 붕어낚시를 하기 위해 아마도 몇 바퀴는 돌았던 인공호수인데, 지금은 낚시터의 호시절 기운은 다 빠지고 유람선, 케이블카, 번지점프장 시설 등 관광 호반으로 환골한 것 같았다.

시티투어를 마치고 오늘 하루 수고해 주신 기사님과 해설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역 앞 시장으로 들어가는데, 아까 유람선과 케이블카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던 ‘기차여행’ 테마 관광객들이 시장을 나선다. 일인 버스킹 공연을 하던 가수도 마지막 곡을 마치는 여기도 아마 거의 파장인 듯하다. 1시간여 남은 여백을 역전 풍물시장에서 메밀전병과 막국수에 막걸리 한 병으로 오늘을 매조지해 나간다. 오일 장날이 아니어서, 혹은 늦은 오후여서인지 상설 매장들만 불을 켠 시장은 한산하고 해설가님의 말처럼 약재상이 그래도 여럿이 눈에 띈다. 이렇게 여행사를 통한 테마 나들이를 ‘관광’이라 하고 개인적인 나들이를 ‘여행’이라 구분 짓는다는 어느 여행가의 주장이고 보면 나는 관광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여행과 여행 중간중간 관광도 나름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 일정이었다. 끝으로 유홍준 박사님의 명언이라고 전해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해설가의 전언에 깊이 동조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2019년 8월 15일 제천시 ‘청풍호반 시티투어’를 다녀와서